일상의 순간을 소묘하는 80편의 아포리즘 에세이
바람, 바람
한국문학 최초의 아포리즘 에세이집 《바람, 바람》
소설적 서사와 시의 함축을 담아낸 80편의 짧은 노래
한국문학 최초의 아포리즘 에세이집《바람, 바람》이 은행나무에서 출간되었다. 아포리즘 에세이란 시처럼 짧은 글의 형식을 말하는데, 최근 수필계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바람, 바람》은 최근 수필계에 불고 있는 짧은 글 쓰기 열풍의 결산이라 할 만하다.
시인이 에세이집을 출간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수필가가 시집을 출간하는 것은 드물다. 산문에 익숙한 사람이 운문인 시를 쓰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하지만 2000년 《현대수필》로 등단한 노정숙은 2012년 《시작》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수필가 노정숙이 시처럼 짧은 아포리즘 에세이집을 출간할 수 있었던 이유다.
작가는 산문시를 연상케 하는 80편의 짧은 글 속에 그의 눈에 담겼던 세상의 다양한 표정들과 시적 전율의 순간을 적절히 배합해 녹여낸다. 각각의 글은 원고지 2매를 넘지 않을 정도로 짧지만 그 여운은 옛날 앨범을 천천히 넘기고 난 뒤의 느낌처럼 길고 아득하다. 이 에세이집은 시와 수필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소설적 서사와 시의 함축을 에세이의 진정성에 담아냈다. 세상을 관조하는 따뜻하고 웅숭깊은 작가의 시선은 본문에 함께 곁들인 마흔 컷의 모노톤 사진들로 더욱 빛을 발한다.
‘바람의 편력’에서 ‘사람 풍경’에 이르기까지
지친 영혼을 위한 위로와 치유, 성찰의 에피그램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는 《바람, 바람》의 아포리즘 에세이는 각 편들이 하나의 주제와 소재에 머물지 않고 다양하다. 척박한 현실도 그의 눈을 거치면 순화된다. 사람살이에서 얻는 통찰과 자연에 대한 관조가 일상어로 친숙하게 그려졌다. 그의 문장은 무기교를 기교로 꾸밈이 없고 담백하다.
나는 등짐 지고 사막을 건너는 쌍봉낙타. 사람들이 사막에서 풍장을 할 때마다 내 앞에서 내 어린 것을 함께 죽였다. 나는 그들의 표지판이다. 그 길을 지날 때마다 어린 것을 생각하며 가슴이 에인다. 내 눈물을 보며 사람들은 조상의 무덤을 찾지만, 나는 상처에 상처를 더한다.
_<눈물 표지판> 부분, 21쪽
1부 ‘바람의 편력’은 여행과 방랑의 장이다. 작가는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인도, 유럽 등지로 떠났던 자신의 여행 경험을 모티프로 쓴 글들에서 우리 일상의 ‘낯설게 하기’를 시도한다. 그의 글에서 여정의 서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바람도 쉬었다 가는 그곳에서, 몸이 경험하고 영혼이 바라본 진실한 삶의 표정이다. 낯선 곳에서의 풍경이 풍경으로 끝나지 않고 타자에 대한 연민과 상처받은 역사까지 아우른다. 이 서사는 또 다른 바람을 품고 생에 대한 끝없는 긍정으로 이어진다. 시적 산문의 향기가 물씬하다. 그의 세상읽기는 대립과 갈등, 분노를 곰삭혀 서늘한 웃음에 도달해 있다.
아, 오래전 깊이 덴 흉터 하나 근질거리네. 볕바른 날이나 비오는 날이나 여지없이, 취한 날이나 취하지 않은 날이나 문득문득 들썩이는 흔적. 아무튼 그도 슬쩍 스치기만 했는데 염치없이 깊이 새겨진 검붉은 화인花印.
_<그 사람> 부분, 64쪽
2부 ‘미안하다, 사랑’은 인연과 사람에 대한 희원希願의 장이다. 견실한 은유로 짜여 있으며, 모든 인연을 귀히 여기는 작가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어느 날 뜨거운 프라이팬에 살짝 스친 그는 3도 화상의 진단을 받고 오래전 아주 잠시 스쳤던 ‘그 사람’을 떠올린다. 문득문득 치미는 통증처럼, 슬쩍 스치기만 했을 뿐인데 근질거리는 검붉은 화인火印이 되어버린 어떤 ‘사랑’에 대해 누군들 다른 말을 더 보탤 수 있을까. ‘미안한 사랑’이라는 표현이 그리움의 옷을 채 입혀주지 못한 인연의 다른 말임을 깨닫게 한다.
또 퇴짜를 맞았다.
내가 고른 통통하고 길쭉한 열무와 얼갈이가 내려지고 흰 띠를 두른 일산열무라는 것으로 올려졌다. 5백원씩 더 비싼 것이란다. 빗어놓은 머리채같이 고무줄로 챙챙 묶은 단정한 달래도 휙 던져지고, 산발한 달래 다발이 담긴다. 오늘은 돌미나리가 맛나다며 내 얼굴 한번 쳐다보고 쓱 담는다.
_<배운다> 부분, 85쪽
3부 ‘백년학생’은 인생의 경이로움과 희열의 장이다. 작가에 의하면 인생의 경이로움이란 대단한 일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매주 목요일마다 서는 동네 장에서 자기가 고른 채소를 ‘퇴짜’ 놓고 알아서 좋은 녀석들로 바꿔 넣어주는 장사꾼의 모습에서 기막힌 상술보다 당당한 삶의 자세를 배웠다고 고백한다. 또한 지갑에 참을 인忍 자 석 자를 넣고 다닌다는 보일러공 시인 이면우에게서는 인내하는 삶의 경건함을 깨닫고, 20년째 사용하고 있는 세탁기를 보면서는 귀물이 되지 못한 고물들끼리 눈 맞추며 수럭수럭 사는 일상의 평화로움을 우리에게 넌지시 제안한다.
내 어깨에 누가 사나봐. 지그시 내리누르는 놈, 쿡쿡 쑤셔대는 놈, 성가시게 구는 놈이 한둘이 아니야.
눈과 눈 사이 나비들이 날아다니네. 모시나비 호랑나비 때로 나들이 왔나봐.
_<몸, 지다> 부분, 135쪽
4부 ‘사람 풍경’은 과거와 미래, 향수와 희망의 장이다. 병과 죽음, 사회문제, 노인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무거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그윽한 인간적 숨결을 느끼게 한다. 풍자와 해학미를 선보이는 대목이다. 꽃과 달을 찬미하는 대신 사람을 예찬한다. 지나온 시대의 향수와 앞으로의 기대를 노래하면서도 현재, 오늘에 방점을 찍었다.
노정숙의 아포리즘 에세이는 현학적인 수사나 과장, 푸념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넌지시 보여주면서 뒷말을 접으며 독자의 몫으로 열어두었다. 간혹 피식 웃음을 짓게 하는 대목에서 그의 내공을 짐작한다. 허허실실의 전략이라 할까, 삶의 자세가 허술하여 오히려 정겹다. 빈손으로도 넉넉한 사람됨을 생각하게 한다.
1부 바람의 편력
갠지스 강가에서 | 홍매는 동주를 보았네 | 아란, 국경에서 | 그 침대 | 늑대, 제 피를 마시다 | 타슈켄트, 그 농장 | 눈물 표지판 | 템플스테이 | 누운 자에게 말 걸기 | 데카브리스트 기념관 | 파타야 코끼리 | 겨울 채비 | 필연 | 중산간도로 한가운데서 | 신세계 | 시인의 집 | 바람 벌판 | 새대가리의 거룩한 소견
2부 미안한 사랑
종 | 늑대가 사라졌다 | 박꽃 | 희망고문 | 겨울산 | 꽃뱀 | 백 년 치의 사랑 | 파리지옥 | 확실이 | 낮술 | A4 용지 | 치명적 사랑 | 신발 | 그 사람 | 가로등 | 겨울, 기억 속으로
3부 백년학생
지저스, 지저스 | 모시풀 | 빨래의 꿈 | 소금 | 고물들 | 시간 | 해오라비난초 | 광장의 촛불 | 실족 | 배운다 | 대포항 | 불협화음 | 늑대를 위하여 | 꽃들, 전시장에서 만나다 | 오늘 | 경의를 표함 | 나무 | 冊, 울다 | 잡설 | 정말이야 | 오래된 수필론 | 밟아주세요
4부 사람 풍경
재미나는 인생 | 백구두 | 다비 | 장삼에 대한 기억 | 여름 | 시차 20년 | 텃밭 | 집 | 외할머니의 왼손 | 목련과 춘자 | 노인은 나의 미래 | 딸에게 | 골목길 | 해바라기 하나 | 양순이 | 아들에게 | 첫사랑 | 천년살이 | 결혼식장에서 | 모든 죽음은 타살성이 있다 | 견딜 수 없네 | 몸, 지다 | 나를 받아주세요 | 그 집 앞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