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생,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우연한 생

지음 정길연

브랜드 은행나무 | 발행일 2015년 4월 15일 | ISBN 9788956608587

사양 변형판 128x188 · 316쪽 | 가격 13,000원

분야 국내소설

책소개

우연한 생,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선명하고 단호한 문장들로 음각하는 생에 대한 환멸 혹은 아이러니

정길연 8년 만의 신작 소설집

 

삶과 사랑의 문제들을 인생이라는 불가사의하고도 불가피한 과정으로

그려내는 이 작가의 시선은, 섬세하다 못해 주밀하다. _방민호(문학평론가)

 

장편소설 《변명》으로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은 작가 정길연이 8년 만에 신작 소설집 《우연한 생》(은행나무刊)을 선보인다. 올해로 등단 31주년을 맞은 작가특유의 명확한 문장과 섬세한 심리묘사가 한층 뚜렷해진 이번 소설집에서는 일그러진 가족, 연인관계를 중심에 둔 일곱 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각각의 이야기에는 연민 때문에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희생하는 여성, 속악한 세상의 이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황하는 여성들이 전면에 등장한다. 읽다보면 현실의 고통이 그대로 전이돼 가슴을 아리게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들은 무너지지 않는다. 살아간다는 일의 괴로움을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묵묵히 아주 성실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연민, 그토록 순수하고 지독스러운 사랑이 또 있을까

 

기계화된 감정에 지배당하고, 진짜 감정에 인색한 요즘 같은 시대에 상대를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는 ‘연민’은 쉽사리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 할 만하다. 영리하고 똑똑한 사람에게 연민이란 빛나는 내일을 파괴할 거추장스러운 것에 불과하다. 이런 시대에 작가는 연민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감싸안은 여성들을 그린다. 소설집의 첫 단편 〈수상한 시간들〉의 여성 주인공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마주친, 잘 알지도 못하는 옛 회사 동료의 임종을 지키고 장례식까지 떠맡게 된다. 어느 누구도 강요한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든 피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나’는 외면하지 않았다. 아니 외면할 수 없었다.

 

언제나 그래왔듯 이번에도 단호하지 못해 미적거리는 새 일이 커지고 있었다. 내게 인생은 늘 갈림길이었고, 좋지 않은 것과 덜 나쁜 것 간의 양자택일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엉거주춤 등 떼밀리거나 휩쓸려가거나, 누구에겐가 이끌려갔다. (〈수상한 시간들〉)

 

그녀의 등을 떠밀어 휩쓸려가게 하고, 누군가에게로 이끌어가게 한 주범은 연민이었다. 이 지독한 장난은 〈자서自序, 끝나지 않은〉에서도 이어진다. 여성 주인공 ‘나’의 남편은 조폭 출신의 두 번 이혼한 경력이 있는 열세 살 많은 남자다. 결혼은 가혹한 운명의 시작점이었다. ‘나’는 남의 배로 낳은 아이 둘, 자기 배로 낳은 아이 둘을 길러냈으나, 30여 년이 흐른 현재 남편은 거동조차 못하는 상태가 되었고, ‘나’는 수년째 병수발을 들며 손녀 아이를 키운다.

 

그때까지 나는 운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내 앞에 펼쳐지는 상황을 수용하도록 강요당하며 살아왔다고나 할까. 내가 자진해 뛰어든 구덩이조차도 실은 불운의 여신이 등을 떠다밀었기 때문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자서自序, 끝나지 않은〉)

 

주인공 ‘나’의 오늘을 만들어낸 건 불운의 여신이 아니라, 연민의 장난이었으리라. 결국 연민은 두 이야기의 끝을 파국으로 몰고 가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연민이 모든 것을 감싸안은 까닭에 그녀들의 삶은 일정한 질서를 유지한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 아닐까.

 

 

생의 아이러니, 속악한 세상을 향한 그녀들의 분투

 

한편 연민을 넘어서 고약한 현실을 향해 몸부림을 치는 세 편의 이야기 역시 인상적이다. 〈가면과 깃털〉의 명효는 여고 동창들과 은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고상한 얼굴을 하고 있으나 속은 물욕과 허영심으로 가득 찬 그들의 속물적인 민낯에 물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Delete〉의 여성 주인공은 “자신의 배우자에게 진저리를 내면서 자기 자식에게는 꿈에라도 만날까 무서운 ‘웬수’를 붙여주지 못해 안달하는” 어른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결혼이라는 인생 최대의 과제를 거부한다. 시대의 흐름에 정면으로 맞서는 그녀들의 분투는 다소 걱정스럽긴 하지만 통쾌한 감정을 선사한다. 그런가 하면 〈우연한 생〉에서 한 속물 의사를 만나 아이를 낳고도 버림을 받음과 동시에, 연애 스캔들로 무대에서도 내쫓긴 전직 연극배우 혜련의 대처방식은 치명적이면서도 극단적이다.

 

어어어어!

양 씨가 무서운 속도로 곤두박질치는 물체를 인지하고 어둔한 소리를 내는 순간, 그의 전 생애가 눈앞을 휙 스쳐지나갔다. 동시에 그의 외마디 비명보다 더 크고 둔탁한 소리가 그를 삼켜버렸다. 그는 단숨에 밤보다 깊은 어둠 속으로 나가떨어졌다. (〈우연한 생〉)

 

혜련과 아파트 경비원 양 씨, 두 사람의 인연의 끈은 한순간의 선택으로 얽히고 만다. 수십 년간 사람들과 왕래 없이 홀로 지내던 혜련도, 떳떳하고 만족스럽게 무난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고 자위하던 양 씨도 이런 방식의 운명적 만남은 결코 원치 않았을 것이다. 이 순간을 맞닥뜨리면 “인생 운칠기삼은 그나마 호시절 때 얘기고, 이제는 운 아홉에 재주 하나, 운구기일이라는 말을 옳다고 여기게끔 되었다” “일곱이든 아홉이든 타고난 대로 살다 접으면 그만이다”라고 했던 양 씨의 인생관이 머릿속을 맴돌게 된다. 제목이 ‘우연한 생’인 까닭이다. 부와 성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을 향해 두 인물은 온몸으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삶은 우연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누구에게나 삶의 무게는 있다. 특히 이 소설집에서 작가는 여느 사람이라도 버티기 힘들 만큼의 묵직한 삶의 무게를 그려낸다. 〈당신의 심연深淵〉에서는 생사를 모르고 지내던 양부가 가정용 세척제를 들이마시고 자살을 기도했으니 보호자 된 자격으로 달려오라는 연락을 받은 여자가 존재하며, 그녀 곁에는 시도 때도 없이 그녀를 버리고 잠적하는 남자가 애인이라는 이름으로 자리하고 있다. 〈알래스카, 그 후〉는 얼핏 가벼워 보이나,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뭉근한 아픔이 느껴진다. 인생의 중반부를 넘어서 새 출발을 하려는 여성 주인공 ‘나’와 아들 휘 그리고 애인 B는 함께 아메리카 종단을 하던 중, 결국 알래스카에서 갈등이 폭발해 다시 각자의 길을 간다.

 

나는 가속페달을 힘주어 밟는다. 자동차는 발사대를 벗어난 미사일처럼 앞으로 튕겨나간다. 그리고 단단한 부리로 바람을 가르는 극북의 맹금류처럼 대지의 어둠을 뚫고 앞으로, 앞으로 내달린다. 지금 내가 할 일은, 정녕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얼음 벌판 위를 미끄러지듯 달려나아가는 것뿐이다. (〈알래스카, 그 후〉)

 

그렇다. 그녀들은 아주 천천히 한걸음씩 앞을 향해 내딛는다. 바로 거기에 살아가는 의미가 있다. 같은 무게라도 누군가에게는 버겁게 느껴질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 않게 느껴질 수가 있다. 우리 삶의 무게가 이 이야기들 속에서보다 무거울지, 가벼울지는 짐작할 수 없으나, 각자가 느끼는 자신의 생은 모두 일정만큼의 무게를 분명히 지닌다. 그렇기에 《우연한 생》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걸어가야 하는 이유다.

 

“내가 나와 갈라설 수 없으니 실질을, 흉금을 꺼내기로 한다. 4월의 구근球根처럼, 다행히도 조금씩 생기가 돋는 듯하다. 이참에 기지개를 켜리라. 두 팔을 쳐들고, 허리를 곧추 펴리라.” (작가의 말 중에서)

 

추천글

 

누군들 아가리를 쩍 벌리고 발밑 어두운 자의 영혼을 기다리는 크레바스를 두려워하지 않을까마는 정길연 소설들에 파인 검고 깊은 생의 벼랑은 유독 처연하다. 선명하고 단호한 문장들로 음각하는 생에 대한 환멸이 심장을 옥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순간, 비로소 생은 만만해진다. 삼십년 내공의 힘이다.  _조용호(소설가)

목차

수상한 시간들 • 7
당신의 심연深淵 • 49
알래스카, 그 후 • 93
자서, 끝나지 않은 • 147
우연한 생 • 185
가면과 깃털 • 227
Delete • 267

작품 해설 | 방민호 • 299
작가의 말 • 313

작가 소개

정길연 지음

1961년 부산 출생으로,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4년 중편소설 〈가족 수첩〉으로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내게 아름다운 시간이 있었던가》 《변명》 《사랑의 무게》 《그 여자, 무희》 《백야의 연인》, 소설집 《다시 갈림길에서》 《종이꽃》 《쇠꽃》 《나의 은밀한 이름들》 《가족 수첩》, 산문집 《나의 살던 부산은》 그리고 장편동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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