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툴지만 푸른 빛
생의 은유이자 시, 철학이자 기도,
다른 이를 빗대어 나를 보는 일로서의 여행의 기록
“길을 헤쳐갈 때마다 하늘은 도시의 조각들을 조금씩 잃었고
도무지 가진 게 없는 나는 더 이상 잃을 게 없다.”
낯선 곳을 여행하며 사진으로 풍경을 담아내고 글을 쓰는 일. 이를 꿈꾸지 않는 자 어디 있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가와 사진가, 작가가 범인들에게 꿈의 영역인 것은 특별한 재능과 용기를 수반하기 때문일 것이다. 은행나무에서 선보이는 애호 생활 에세이 브랜드 ‘Lik-it 라이킷’ 04호 《서툴지만 푸른 빛》은 대범한 앵글과 섬세한 색감으로 찰나를 기록하는 트래블 포토 에세이스트 안수향의 사진 에세이다.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모로코, 필리핀, 미국. 언뜻 맥락 없어 보이는 행로에서 포착한 이국적인 풍경에 깊고 담백한 글을 곁들였다. 이 책에는 여행 에세이에 기대하기 마련인 여행지에서 겪은 에피소드나 관광 정보는 없다. 상세히 지명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타지와 타자에 빗대어 자신을 성찰하고 마침내 긍정하는 과정에 침잠해 한 청년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펼쳐 보일 뿐이다. 숨이 탁 트이는 사진들이 쉬지 않고 이어지며 여행지의 온도와 향기를 전한다. 감각을 일깨워 일상을 돌아보게 하는 여행의 힘을 보여주되, 진짜 여행은 여행하지 않는 일상에 있음을 역설하는 이 책은 도피가 간절한 떠나지 못하는 이들에게 포근한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인생이 소설이라면 여행은 시
인생이 짧은 여행이라면, 여행은 영원한 삶
세상의 숱한 여행에는 이유도 많고 목적도 많다. 여기 아무것도 얻지 않아도, 깨닫지 않아도 되는 여행이 있다. 부산에서 태어나 자란 작가는 어린 시절 지리적으로 가장 북쪽이라는 이유 하나로 아이슬란드를 동경하게 된다. 몸이 자라는 만큼 어디까지 갈 수 있나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삶이 고돼서 벗어나고 싶었던 걸까. 그저 불가능해 보여서 더욱 소중히 꿈을 키워왔는지도 모른다.
우연한 기회에 아티스트 레지던스 작가로 초청되어 아이슬란드의 시골 마을 스카가스트론드에서 체류하게 된 그는 짧은 사진작가 이력을 가진 자신의 예술 세계가 빈곤하다고 느끼며 좌절한다. 작업실에서의 나날들은 고요하고, 세계 각국에서 온 아티스트들은 부지런히 반짝인다. 예술이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리고 아이슬란드는 십 년간 품어온 꿈과 다르다고 어렵사리 고백하자 마침내 자유로운 창작욕이 그의 안에서 깨어난다. 서늘한 풍경에서 자신의 모습을 똑 닮은 고독을 발견하고, 서툶마저 진솔하게 담아낸 글과 사진들은 오히려 성숙에 가깝다.
아이슬란드는 몸서리 날 정도로 심심하고, 사하라사막엔 폭우가 쏟아지고, 서핑을 하러 간 모로코에서는 하염없이 파도를 기다리고, 미국에서는 좋아하는 햄버거 하나 마음껏 먹지 못한다. 우리가 익숙하게 떠올리는 소설 속 모습과는 다르다. 그러나 그는 길에서 본 선인장, 조약돌 하나를 두고 마침표를 찍을 곳을 고심하는 시인의 마음을 떠올린다. 오로라 아래에서 7시간 시차를 사이에 둔 남자친구에게 보내지 못할 편지를 쓰고, 흐드러진 벚나무 아래에서 십오 년 전 헤어진 아버지에게 못 전한 그리움을 회상한다.
“끝이 있음을 생각한다. 영속하지 않는 단편적 행위의 끝에서 우리는 여행이라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야만 하겠지. 여행을 또 다른 짧은 생이라 믿어 본다면 여행의 끝은 그 생의 소멸이라 해야 할까. 어느 날 갑자기 이틀, 사흘, 혹은 일주일, 한 달을 살다가 죽게 된다면…”_18쪽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꿈결 같은 사진을 넘기노라면 이 여행은 끝이 없음을, 그저 살아 있음에 감복하게 한 북극광은 영원히 포착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 알 수 없음의 영원함이 이 책을 더욱 빛나게 한다.
멀리 떠나게 하는 동력에 대하여
충만하게 하는 외로움에 대하여
작가는 “그저 사진 몇 장 남는 여행보다 슬픈 건 없다”고 말한다. 많은 팔로우를 거느린 SNS 스타인 그가 말하니 더욱 의외다. 그에게 이 여행은 ‘바다’라는 낱말을 여러 언어로 배우는 일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책은 ‘바이킹’, ‘빙산’, ‘파도’, ‘조금’, ‘사리’ 등 ‘바다’로 대체 가능한 푸른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대신, 광활한 자연 앞에 홀로 서 있노라면 마주하기 마련인 화려한 수사의 감탄이나 자기 연민은 없다. 묵묵히 장을 봐 정성껏 밥을 지어먹고, 끝이 보이지 않는 도로를 느긋이 달리고, 엉뚱한 언어로 인사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손 내밀어 이름을 알려준다. 그리하여 고독을 용감하게 직면하고, 소외된 것들에 온기를 나누고자 하는 선한 의지를 다진다.
그것 말고도 이 여행 에세이에는 보기 힘든 미덕이 많다. “여행 한 번에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지는 않”는다고 폭로하면서도, “희박했던 긍정 한 송이 정도 피울 힘”은 얻는다고 덤덤하게 고백한다. 혼자 걷는 길을 만끽하면서도, “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잊지 말자고 일러준다. 무엇보다 이 책은 여행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관둬도 괜찮아’, ‘떠나도 괜찮아’가 범람하는 세상에, ‘떠나지 않아도 정말 괜찮다’고 숱하게 떠나본 자가 말을 하니 마음에 한결 와닿는다.
1. 겨울 섬…아이슬란드
꿈의 도중
서툴지만 푸른 빛
아무것도 없다
이름이 자리 잡는 시간
단어만 남은
예술이 뭔지도 모르면서
고마워요, 거기 행복한 사람
아델라
우리는 사리를 겪는 바다처럼
빙산
예술 안쪽
늦은 대답
긴 호흡, 사이
2. 오래된 가을 노래…노르웨이
E10, 북극의 시
노던라이츠
이름에게
나를 멀리 가게 하는 사람에게
너에게
안녕 남자친구
몸살
3. 여름, 물과 공기의 언어…모로코, 필리핀
물 아래의 생
고래상어
바다 유영
골목 풍경
모하메드101
새벽에 바다를 걸어서 모로코에
서퍼
야속한 타진
별과 바다와 반짝이는
아우마르에게
다클라의 축복
광장에서 발견한 굉장한 사치품 세 가지
나는 갇혔다
아미 만세
라이언
4. 봄, 늦은 귀가…미국, 부산
여행 일기
자, 이 길을 따라 마음껏
가장 어두운 밤과 어떤 상처
우리는 단지 햄버거를 먹고 싶었을 뿐이다
혼자 걷는 길을 좋아하지만
당신에게
떠나지 않아도 괜찮아
비행기
우리의 세계
최초의 기억
나만 있어, 고양이
아빠의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