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목 깊이의 바다
“최민우는 입장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가 지닌 머릿속 상상의 도서관을
열람해보고 싶은 작가들 가운데 한 명이다”_구병모(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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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현실의 범주에 속한 것을 현실로 불러내는
신비롭고 환상적인 서사의 힘
최민우 신작 장편소설 《발목 깊이의 바다》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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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편 《점선의 영역》으로 2019 이해조소설문학상을 수상한, 현실과 환상을 자유자재로 변주하며 소설의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평단의 호평을 받고 있는 최민우의 두 번째 장편소설 《발목 깊이의 바다》가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격월간 문학잡지 《Axt》에 연재했던 소설로, 1년간의 대대적인 개고를 거쳐 연재 당시와는 달라진 결말로 독자들에게 새롭게 선보인다. 소설은 ‘사단법인 도서정리협회’에 불로불사의 존재인 엄마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남긴 소년 한별과, 사라진 한별의 엄마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실종’ 사이의 연관성을 파헤치는 경해의 닷새를 그리고 있다. 이 짧은 시간 속에서 소설은 비극적 과거가 낳은 피해자와 그로 인한 희생의 정당성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직진하는 상상력과 적재적소에 배치된 위트, 그리고 묵직하게 울리는 문학적 성찰, 매력적인 인물들을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소설의 심부가 될 ‘대실종’이라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인물들 사이에 던져놓는다. 소설가 구병모는 《발목 깊이의 바다》를 두고 “보통의 사람들이 비현실의 범주에 모셔두고 잊은 지 오래인 신비를 현실로” 불러내고 “그것을 최적의 음계로 조율하여 이름과 의미를 부여”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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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사람들, 반복되는 균열
과거와 현재, 현상과 환상을 틈입하는 응시의 흔적들
‘사단법인 도서정리협회’는 전국에 열아홉 곳의 지부를 두고 있다. 하지만 도서정리협회는 그저 이름일 뿐, 이들은 비밀스럽게 움직이며 주변 곳곳에서 발생하는 기묘한 사건들을 해결하는 사람들이다. 경해와 노아가 일하는 지부 사무실은 버스 종점에 위치한 낡은 상가 건물의 3층. 의뢰받은 거울을 찾은 직후 사라져버린 노아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경해 앞에 ‘한별’이 나타난다. 한별은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무 때나 찾아오라고” 했다며 노아의 명함을 경해에게 건넨다. 그리고 소년은 놀랍게도 자신의 엄마가 불로불사의 존재이고, 그래서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고 말한다. 어른을 당황시키는 조숙함을 가진 밝은 연갈색 눈동자의 소년. 경해는 열 살 아이의 의뢰를 보호자 동의 없이 받을 수 없어 우선 소년의 아버지를 찾아간다. 하지만 한별의 예상대로 한별의 아버지는 아내를 찾으려는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인다.
“자기가 우리를 찾아온 데는 이유가 있다고 그러셨어요. 언젠가 엄마가 집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때 너무 슬퍼하면 안 된다고요. 근데 저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엄마를 찾고 싶은 게 아니에요. 그건 괜찮아요. 어쩔 수 없다는 걸 아니까. (……) 하지만 그 사람들이 엄마를 찾고 있다는 말은 전해야 해요.”_본문에서
고민에 빠진 경해 앞에 협회 매니저이자 중간 관리자인 곰 선생이 나타난다. 그는 경해에게 두툼한 서류 더미를 건네며 일을 맡긴다. 문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발굴된 유골의 수는 무려 91구. 일단 언론보도를 막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중요하지 않은 중요한 걸 찾아.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알고 있겠지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는 모두 의미가 있어.” 그 과정에서 다시, 노아의 손에 들어왔었던 거울의 행방을 찾는 의뢰가 들어온다. 소년이 찾아오고, 뼈가 드러나고, 거울이 나타났다. 좌우가 바뀌지 않는 특별한 거울. 한별이 경해를 찾아온 것도, 그 이전에 노아가 한별의 가족을 찾아갔던 것도, 죽지도 늙지도 않는 여인이 자취를 감춘 것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뼈가 사방에서 나오기 시작한 것도 결국 어떤 흐름의 일부인 듯했다. 모두 하나의 사건에서 비롯된 ‘현상’이자, 어떠한 징조였다. 경해는 그 사건이 무엇인지 밝혀내야만 한다.
“우주는 넓은 천이고, 별들은 중력에 의해 움직입니다. 우리는 우주의 일부이고요. 그러니 우주의 법칙을 따르면 됩니다. 경사를 따라가면 돼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문제의 핵심에 다다를 수 있죠.”_본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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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보다 깊어진 밤
뒤틀린 과거의 틈새에 스며든 희미한 빛
머나먼 어둠 속에 잠들어 있던 커다란 큐브는 한 소년이 ‘사단법인 도서정리협회’의 문을 두드리면서부터 다시 짜맞춰지기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것들을 끌어들이게 되어 있다”는 노아의 말처럼 소설 속 인물들은 소년 ‘한별’을 중심으로 한데 모이게 되고, 독자는 작가가 구성한 치밀하고 촘촘한 얼개를 따라 흩어진 퍼즐 조각을 하나씩 주워 맞춰나간다. 얼룩진 과거로부터 비롯된, 순리를 거스른 존재. 《발목 깊이의 바다》는 그 존재를 추적하는 사람들과 지키려는 사람들이 대치되며 힘 있게 달려나간다. 또한 한별은 단순히 이야기의 심지에 불을 붙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모습을 직면하게 하는 일종의 ‘거울’이 된다.
“우리는 폐건물 안으로 들어가 기다렸다. 나는 부뚜막이었던 곳에, 노아는 문턱이었던 곳에 걸터앉았다. 밤이 깊어졌다. 밤하늘에 초승달이 빛났다. 풀벌레가 울고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_본문에서
최민우는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우리 사회의 심부를 관통하는 유의미한 이야기를 써내는 작가다. ‘불로불사’의 존재인 엄마를 찾아달라고 의뢰한 아이, 문 너머로 홀연히 사라져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무더기로 발견된 백골……. 미스터리한 사건의 도처에 널린 실마리들이 모여 단단한 밧줄이 되고, 비극적인 역사가 빚어낸 거대한 ‘쐐기’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 끝에 한 줄기 빛으로 떠오르는 건 한별과 경해가 종국에 보여주는, 그들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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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의 말
최민우는 입장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가 지닌 머릿속 상상의 도서관을 열람해보고 싶은 작가들 가운데 한 명이다. 사람이 잠을 자고 꿈을 꾸는 존재인 한, 기이한 현상과 환상적인 오브젝트 자체는 누구나 조형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보통의 사람들이 비현실의 범주에 모셔두고 잊은 지 오래인 신비를 현실로 불러낼 때 그것을 최적의 음계로 조율하고 거기에 이름과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이 작품에 나타난 ‘쐐기’와 ‘틈’이 그 조율의 결과를 보여준다._구병모(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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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서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던 작고 단단한 소음이 차츰 한데 뭉치면서 일정한 리듬을 타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음악처럼 인공적인 규칙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떨어지지도 않았다. 질서와 무질서 사이, 인식할 수 있는 것과 감지할 수 없는 것 사이 어딘가에서 빗소리가 출렁였다. _120쪽
소용돌이의 모양이 복잡해졌다. 여자가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 책상에 놓았다. 감람석 내부에서 녹색의 광채가 어른거렸다. 마치 창밖에서 엿보는 벽난로의 불빛처럼. _124쪽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소문은 소문일 뿐이고 늘 실제보다 큰 법이에요. 저녁의 그림자가 긴 것은 곧 밤이 온다는 뜻이죠. 어둠이 뒤에 있으면 소문은 부풀려지게 마련이고요. _129쪽
문이 열리면서 안이 보였다. 문 뒤는 어둑했다. 잿빛 안개가 두텁게 끼어 있는 것 같았다. 저 멀리 희미한 주황색 불빛이 달무리처럼 흐릿한 둥근 윤곽을 그리며 반짝거렸다. 깊은 새벽의 외로운 골목에서 불을 밝히는 가로등처럼. _184쪽
우리는 타인이라는 바다의 해변에 서 있을 뿐이다. 가끔씩 밀려와 발목을 적시는 파도에 마음이 가벼이 흔들리도록 자신을 내맡기면서, 언젠가는 저 바다 끝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스스로도 믿지 않는 헛된 희망에 매달리고 있을 뿐이다. _1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