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tro
“다시쓰기는 태어남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폭력을 비난하고, 억압과 침묵을 뒤집어엎고, 제국주의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원전을 희롱하는 직접적인 패러디를 넘어선 다시쓰기가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다시쓰기는 다시쓰기라는 쓰기 그 자체가 화자가 아닐까, 그것이 주체가 아닐까 생각한다. 바리의 노 젓기 같은 말하기. 침묵한 자가 침묵으로 말하는 것, 부재한 자가 부재로 말하는 것. 모두가 떠들고 있는데, 떠들지 않은 자의 말이 제일 크게 들리게 하는 것.”
―김혜순, 「무한한 포옹」 중에서
다시쓰기는 자기 자신을 부수고 스스로 낳고 기르려고 하는 몸짓, 그곳에서 문학이 탄생한다. 시인 김혜순은 이 다시쓰기의 자리에 여성의 문학을, 그리고 스스로를 다시 낳으려는 모든 사람의 문학을 불러온다. 모방으로 시작했으나 전복하고 다음으로 이행하는 글쓰기. 이 잡지에 담긴 모든 글을 각자의 방향으로 다시 써온 사람들의 흔적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 글이 닿는 곳에서 또 하나의 다시쓰기가 일어나기를, 또 하나의 판본이 탄생하기를, 이 탄생의 계절에 함께 기도해본다.
● cover story
“언어와 언어 사이에는 틈새가 있다는 걸 일찍 알게 되었어요. 언어라는 게 굉장히 불완전하구나 깨닫게 된 거죠. 그러다 보니 내 마음을 온전히 알아듣는 사람은 지구상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런데 너무 찾고 싶어, 그런 사람을. 처음엔 그런 마음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백수린, 「cover story」 중에서
41호 cover story 인터뷰이는 언어와 언어 사이의 불균질한 틈새를 예민하게 감각하는 소설가 백수린이다. 그는 모국어라는 말 속에서 무화되는 무수한 차이들을 하나하나 살려내어, 우리 앞에 가져온다. 이국의 감각으로 언어를 낯설게 바라보면서 언어가 감춘 폭력을 밝혀내는 작업을 계속해온 그의 성실하고 꼼꼼한 기록이 이곳에 담겼다. 번역과 창작으로 언어 사이를 여행하면서 마음과 마음을 잇는 일, 문자 그대로 ‘어느 여행자의 사랑’의 기록이다.
인터뷰는 소설가 김유진이 진행해주었다. 창작과 번역, 그 깊은 두 골짜기를 함께 넘는 동료 소설가로서 동료 번역자로서의 공감과 고민을 나누어주었다. 언어의 괴리를 견디며 끊임없이 안쪽을 향해 안부를 묻는 일, 두 소설가의 목소리가 쉽게 끝나지 않을 여행길을 다정히 함께 걷는다. 그 무한한 사랑의 자리를 독자들이 함께 걸어주시기를 바란다.
● key-word * short story * novel
key-word에는 ‘관심종자’ 테마의 마지막 소설, 소설가 손원평의 「모자이크」가 수록됐다. 손이나 발, 신체의 일부만 등장하는 편집된 영상을 통해 존재하는 ‘나’ 목소리를 빌려, 소설은 현대사회의 관심이 어떻게 모이거나 흩어지는지를 주목한다. 관심의 대상인 ‘나’조차 통일된 존재가 아니라면 관심종자라는 말은 어떻게 성립될 수 있을까? 1인칭 화자의 설득력 있는 목소리를 따라 독자들도 조각난 거울의 미로 속에 들어와보길 바란다. 한편 ‘도시괴담’을 주제로 한 새로운 테마 연재도 시작된다. 소설가 조우리가 포문을 열어주었다. 그의 소설 「모르는 척하면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몰래카메라 이슈를 다룬다. 실체가 있기도 없기도 한 도시의 괴담, 그 근저에 놓인 공포와 불안에 대해 문학의 언어로 포착해보는 시도. 새로이 독자를 만나는 key-word ‘도시괴담’의 여덟 소설에도 독자들의 기대와 관심을 바란다. short story에는 올해 신춘문예 당선자 소설가 김기태 함윤이의 글이 실린다. 젊은 시선으로, 그러나 누구보다 진중하고 단단한 무게감으로 세상을 응시하는 두 신예 소설가의 근작이다. 독자들에게 내보이고 싶을 이야기가 가득한 두 편의 글, 「세상 모든 바다」, 「강가/Ganga」에 독자들의 눈길이 오래 머무르기를 바란다. novel에서는 세 편의 연재소설이 수록된다. 특히 소설가 김희선의 『247의 모든 것』은 이번 화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변종니파바이러스의 숙주 247, 자신의 발견을 관철하려던 병리학자, 양심적 처방을 하던 약사 L과 그 현장을 목격한 의사 K. 그들을 둘러싼 모든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에 독자들을 초대할 수 있어 기쁘다. 7회의 연재 내내 멋진 세계로 독자를 데려다준 소설가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소설가 윤고은의 『불타는 작품』에서는 배달 알바로 생계를 잇던 성공하지 못한 한국인 예술가에게 〈캐니언의 프러포즈〉의 작가, 강아지 로버트를 위해 설립된 로버트재단의 연락이 닿으며 이야기의 배경이 크게 달라진다. 그랜드캐니언에서 벌어진 사건을 단숨에 한국과 연결시키며, 이야기는 한층 더 흥미진진해진다. 소설가 박서련의 『폐월閉月』에서는 주인공의 비밀을 아는 의뭉스런 소녀 두화의 등장으로 긴장감이 한층 더 고조된다. 주인공의 과거 행적을 알고 있는 듯한 두화는 마침내 주인공에게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을 건네는데……. 다음 연재를 기다리게 만드는 두 소설의 매력에 독자들도 함께 마음 졸여주시기를 바란다.
● table * ing * hyper-essay * colors
table에서는 라틴아메리카 소설의 차세대 작가로 떠오르는 사만타 슈웨블린의 소설 『리틀 아이즈』를 두고 번역가 엄지영, 편집자 양재화 그리고 소설가 이원석이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켄투키’라는 인형 모양의 반려로봇을 두고 벌어지는 일을 담은 이 소설은, 상품-되기와 상품-소유하기가 공존하는 현대의 사회상을 날카롭고 매력적인 상징으로 은유한다. 특히 번역가 엄지영은 이 소설의 독특한 화법을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특수성과 연결하여 설명하며, 번역에서 주안점으로 삼았던 것들을 공유해주었다. 처음 이 소설을 접할 독자들뿐만 아니라 이미 소설을 접한 독자들에게도 일독을 권한다. ing에는 러시아 최초의 커밍아웃소설, 미하일 쿠즈민의 『날개』를 번역한 번역가 이종현의 에세이를 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소설의 본문에는 번역의 불가능성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필자는 이 부분을 반박하고 또 수용하면서 이 책이 한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번역된 역사를 함께 훑는다. 러시아 퀴어소설이 세계에서 수용되는 다양한 양상까지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에세이를 소개할 수 있어 기쁘다. 여성작가가 읽어 낸 여성작가를 다루고 있는 hyper-essay에서는 시인 장혜령이 프로젝트와 출판물의 경계를 휘젓고, 적는 자와 적히는 자의 구분을 흐리는 소피 칼의 독특한 작업을 독자에게 소개한다. 여성의 몸으로 수행한 것들에 대한 글과 쓰인 것들에 대한 수행을 담당하는 몸을 오가면서 새롭게 창출되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이 작업이 지금의 여성작가와 공명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해외고전문학을 다루는 colors에서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를 다룬다. 평론가 손정수는 1차,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유태인 지식인 츠바이크의 내력을 소개하고 그의 소설에서 드러나는 모티프의 원형을 밝히는 글로, 소설가 김종옥의 글은 ‘본질적인 빼앗김’이라는 측면에서 두 소설의 주인공이 겪는 상황을 재해석하는 글로 츠바이크를 읽어 내려갔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읽어간 두 개의 글은 독자들이 츠바이크를 읽으며 독자적 판본을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 review * biography * diary * insite
review에서는 아홉 권의 작품이 독자들에게 소개된다. 김성중 정지돈 김멜라 최유안 임선우 신종원 서이제 김연덕 보배 9인의 필진이 최근 함께한 작품을 독자들에게 건넨다. 서로 다른 취향과 관점으로 읽어낸 책 중에 2022년 3,4월의 독자들에게 닿을 글이 있기를 바란다. biography에는 첫 책으로 『은의 세계』를 낸 소설가 위수정의 에세이가 실렸다.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에서 소중한 말은 점점 더 소중해지는 일. 어쩌면 그것이 소설가가 글을 쓸 때의 마음일까. 고심하여 길어올렸을 소설가의 고유한 세계에 발을 들여놓아주시기를, 그리하여 더 많은 경계의 언어가 솟아나기를 기대해본다. diary에서는 2021년의 마지막부터 2022년의 시작까지의 시간을 통과한 시인 신해욱의 글과 사진이 실렸다. 안개와 눈과 파도. 흰 것들에 포위당한 ‘흰 일기’를 엿보며 시인과 함께 계절을 통과해보자. 사진잡지 『VOSTOK』와 함께하는 insite에는 사진작가 김유자의 작업이 실렸다. 작은 존재들에 집중하여 그들이 생물이 되는 순간을 포착하는 순간. 『VOSTOK』 편집장 박지수는 작가의 작품을 ‘삶의 목소리가 발화된 빛줄기를 애써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여 마주하는 장면들로 명명한다. 이미지와의 충돌 속에서 독자들에게도 순간의 빛줄기가 반짝이기를 기대해본다.
◆ 41호 차례
intro
김혜순 무한한 포옹・002
review
김성중 버지니아 울프 『등대로』・022
정지돈 워커 퍼시 『영화광』・028
김멜라 니나 라쿠르 『우리가 있던 자리에』・032
최유안 안이희옥 『안젤라』 ・037
임선우 시리 허스트베트 『불타는 세계』・041
신종원 김태용 『러브 노이즈』・047
서이제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라스트 울프』・051
김연덕 마크 헤이머 『두더지 잡기』・056
보 배 바바라 바인 『그 아이의 아이』・062
cover story
백수린+김유진 어느 여행자의 사랑・066
biography
위수정 같이 걸을까, 영원처럼・1089
key-word
손원평 모자이크・116
조우리 모르는 척하면서・132
diary
신해욱 흰 일기・152
hyper-essay
장혜령 두 겹의 삶, 두 겹의 쓰기 ― 소피 칼・164
insite
김유자 입김・180
table 사만타 슈웨블린 『리틀 아이즈』
엄지영+양재화+이원석 불균형의 욕망 위에서・196
ing
이종현 영혼 없는 인형・232
colors 슈테판 츠바이크 『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손정수 기이한 인물 속 평범한 인간의 모습・242
김종옥 이야기의 힘・248
short story
김기태 세상 모든 바다・256
함윤이 강가/Ganga・272
novel
윤고은 불타는 작품(2회)・290
김희선 247의 모든 것(최종회)・316
박서련 폐월閉月(3회)・344
outro
손보미・3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