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긋기
악스트 Axt 2024.07-08
새로워진 격월간 문학잡지 『Axt』 55호의 키워드는 ‘선 긋기’이다. 최근 MBTI, ‘MZ 세대’ 등의 말이 유행하기 시작하며 사람들은 서로를 쉽게 범주화하며, 개개인을 깊게 알아보려 노력하는 대신 틀 안에 끼워 넣고 간단히 분류해버리는 사회가 되었다. 이러한 분류는 한 사람을 쉽게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수단이지만 동시에 또 다른 차별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라고도 볼 수 있기도 하다. 한 번 그어진 선은 쉽게 넘거나 지울 수 없고, 대개는 이를 벗어나고자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번 호의 키워드를 선정하며 우리는 각자의 ‘다름’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더불어 그어진 선의 기준은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선을 어떻게 지울 수 있을지에 대해 폭넓게 이야기하는 자리를 만들고자 했다. 미리 가이드라인을 그려뒀지만 그 선을 넘거나 지우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 interview
“저는 제가 쓰는 모든 글이 시가 되길 바라요. 그러면 결국 모든 것이 될 수 있거든요. 보이지 않는 경계와 선을 지우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감추려 함으로써 그 존재를 더욱 현현하게 드러내는 것이 시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시의 역할이라고, 지금은 믿고 싶어요.” _박참새, interview 중에서
interview에서는 북 큐레이터, 팟캐스트 진행자, 시인 등 책을 매개로 문학계에 새로운 획을 긋고 있는 시인 박참새와 그의 첫 시집 『정신머리』를 경유하여 이야기를 나눴다. 선을 긋거나 지우는 사람보다 “‘선을 긋는다는 게 뭘까?’를 먼저 묻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의 말처럼 그의 답변은 거침없는 확신과 끊임없는 질문으로 가득하다. 어쩌면 이러한 탐구 정신이 그를 이루는 선을 또렷하게 만드는 듯하다. 솔직해 보이는 한편으로는 허락되는 만큼 자신의 글 뒤에 더 오래 숨고 싶다는 그가 다음 발표할 글들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되기도 한다. 박참새가 그어나갈 다양한 선들에 귀추를 주목해주기를 바란다.
◌ issue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이번 호의 키워드인 ‘선 긋기’를 두고 ‘선’과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글을 요청했다. issue에서는 각자의 자리에서 바라본 ‘선 긋기’가 가득 담겨 있다. 환경사회학자 김지혜는 자신이 번역한 팀 잉골드의 『라인스』와 함께 선의 특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선’을 떠올릴 때 보통 점과 점 사이를 최단 거리로 가로지르는 직선을 생각하지만, 실재하는 선을 보면 모두 구불거리고 생기 있는 곡선이라는 점을 짚어낸다. 문학평론가 김건형은 문학에서의 ‘선’의 의미를 고찰했다. 이안리의 소설 「프라우 베르너의 손님들」을 통해 ‘주인-손님’, ‘나-당신’, ‘타자-타자’ 사이의 역학관계에 대해 써주었다. 프리랜서 북 디자이너로 활동 중인 디자이너 김동신은 직업 면에서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선’을 이야기한다. 일상과도 같은 ‘본문 포맷 잡기’에 대해 설명하며 그는 왜 그 작업‘만’ 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지에 대해 말한다. 이처럼 선을 긋는다는 행위는 어쩌면 단순하지만 가장 복잡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 chat
이번 호 chat에서 다루게 된 소설은 지난겨울 우리에게 당도한 천쓰홍의 『귀신들의 땅』이다. 가깝고도 먼 나라 타이완의 천씨 가족의 슬픈 역사를 좇으며 인간과 귀신, 비퀴어와 퀴어, 도시와 시골,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등 다양한 경계를 가로지르는 이 소설은 또 어떤 층위에서 이야기될 수 있을까. 이 책의 추천사를 써준 시인 황인찬, 퀴어 페미니스트 비건 지향 무당 홍칼리, 장르문학 전문 서점인 ‘사계리 서점’의 서점원 김수현과 함께 소설을 읽어보았다. 인간과 귀신을 나누는 경계는 단순히 삶과 죽음뿐일까. “말할 수 없어서, 말하지 못해서 한이 남은 자들”을 귀신의 정의로 본다면, 살아 있어도 없는 존재 취급을 받는 모든 존재가 귀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더 나아가서는 이 경계를 모두 없애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기기도 한다. 이 좌담이 우리를 가르고 있는 경계선에 대해 한 번 더 고민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 key-word * short story
key-word에는 소설가 황모과 서고운의 각각 다른 매력을 가진 소설이 실렸다. ‘빙의물’을 주제로 한 황모과의「브라이덜 하이스쿨」에서는 정숙한 여성을 길러내는 신부 양성학교인 ‘요조 브라이덜 하이스쿨’의 청소부로 빙의하게 된 주인공이 겪게 되는 일을 그려냈다. 『시녀 이야기』의 한국판인 이 이야기에서 ‘마녀’로 낙인찍힐 위기에 처한 주인공과 학생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한편 ‘기념일’을 ‘기억하는 날’로 해석한 서고운의 「위드걸스」에서는 ‘선주’와 ‘인혜’, 그리고 강아지 ‘순찌’의 이야기와 바 ‘위드걸스’에서 일어난 사건이 겹쳐지며 전개된다. “움직이는 사람은 잊지 않는다. 기억하는 사람은 살아남는다.” 소설 마지막 부분의 문장처럼 살아남기 위한 이들의 이야기가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short story에서도 두 개의 소설을 만나볼 수 있다. 소설가 김경욱의 「너는 별을 보자며」는 소설에서도 설명하듯 “아내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과 콘서트를 경유해 ‘은하 씨’를 위해 쓴 러브레터처럼 읽히기도 한다. 소설가 정기현의 「빅풋」은 사라진 ‘새미’의 흔적을 따라가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나는 점점 희미해지고 발에서만 자세하다”라고 썼던 새미는 어떤 이유에서 사라진 것인지 소설의 끝에 다다르면 알 수 있을까. 두 편의 소설에서 ‘나’와는 또 다른 시선으로 인물들을 이루는 선을 의식하며 읽어본다면 새롭게 소설을 경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 novel
집에서 소설 읽기 좋은 계절, 이번 호의 novel은 여느 때보다 풍성하게 꾸려졌다. 소설가 김숨의 신작 소설과 함께 소설가 전예진 권혜영 이서수 김나현의 소설 연재가 계속된다. 김숨은 5년 전 남쪽 섬에서 수개월을 살며 초고를 쓴 소설 「초대」의 연재를 시작한다. 섬에 살며 수십 년간 물질로 삶을 영위해온 여자들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섬의 주민들이 등장하는 소설에서 앞으로 어떤 인물들이 이야기를 이어나갈지 기대해주길 바란다. 전예진의 「매점 지하 대피자들」 3회는 매점 주인 ‘은희’가 지하 사람들의 존재를 언뜻 눈치채며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한편 선우는 ‘관리소장’이라는 남자와 주호가 만나는 것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다. 주호가 ‘고라니 호텔’을 만든 이유는 무엇이며, 거기에 모여든 사람들은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을지 점점 궁금해진다. 권혜영의「얼지 마, 죽지 마, 사랑하게 될 거야」 3회에서 누리는 조력자 ‘다운’을 만나며 한결 마음을 놓는다. 반면 소연은 외톨이인 채로 일본에 도착한다. 홀로 외국에 있을 때 우리는 종종 과거를 반추하게 되고는 한다. 첫 남자친구 ‘쿄야’를 떠올리던 소연은 현재로 돌아와 비관적 상황에 놓인 히카루를 만나러 간다. 이서수의 「여로의 사랑」 4회에서 호태의 실종으로 영한과 여로, 동생 ‘미로’가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모든 필요 인물이 모였을 때 비밀은 폭로되기 마련이다. 이 비밀은 가족을 어느 곳으로 데려다놓게 될까. 한편 김나현의 「모든 시간이 나에게 일어나」 4회에서 나을은 시우와 그가 숨기고 있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윤 감독의 시나리오에는 없었던, 한주 선생님이 아닌 ‘이하영’의 이야기가 밝혀진다. 점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이야기들은 어떻게 끝을 맞이할지 계속해서 지켜봐주길 바란다.
◌ review * cover story * essay
이번 호 review는 소설가 공현진이 읽은 두 권의 책을 소개한다. 앞으로 그가 우리에게 소개해줄 책들의 목록을 기대해봐도 좋겠다. cover story에는 『VOSTOK』 편집장 박지수의 글과 사진작가 홍기웅의 〈Rule〉 작업이 함께 실렸다. 사진 속 곧게 그어진 선들은 스포츠의 규칙들을 암시하고 있다. 선이 가장 뚜렷하게 가시화되는 공간인 경기장에 주목한 작업물들을 바라보며 ‘선 긋기’의 의미를 다시 곱씹어본다.
계속되는 essay에도 다양한 주제의 글들이 자리했다. essay-interact에서는 작가 양다솔이 곁에 있는 사물과 사람을 통해 세계와 소통하고자 한다. essay-parfum에서 조향사 김태형은 이서아의 소설 「푸른 생을 위한 경이로운 규칙들」의 제목을 살짝 비틀어 ‘미련한 생을 위한 시답잖은 규칙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인 김연덕이 연재 중인 essay-objects에서는 세계를 가깝지만 먼 금속인 ‘은’과 ‘금’으로 분류하며, 이 분류에서 탈락한 것들을 빼놓지 않는다. 은과 금의 이미지를 새롭게 감각함으로써 우리는 질리지 않고 오랫동안 그것들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editor’s note
백다흠 떨어져 있는 두 개의 점 2―5
review
공현진 박민정 『백년해로외전』 10―17
오라시오 키로가 『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
interview
박참새 시선이 더 오래 머무르는 곳에 18―33
chat
황인찬·홍칼리·김수현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는 곳 34―53
issue
김지혜 살아 있는 선을 예찬하며: 팀 잉골드의 『라인스』와 함께 54―57
김건형 손님들의 환대 58―62
김동신 어떤 일의 일상 풍경 63―67
cover story
박지수 선 긋기의 유일한 규칙 68―75
―홍기웅의 〈Rule〉
essay
양다솔 그 목걸이 어디서 샀어?·예쁘고 귀여운 것 84―89
김태형 미련한 생을 위한 시답잖은 규칙들 90―98
김연덕 구름 속에서도 태양 속에서도 지니고 다닐 100―107
key-word
황모과 브라이덜 하이스쿨 110―135
서고운 위드걸스 136―153
short story
김경욱 너는 별을 보자며 154―178
정기현 빅풋 180―203
novel
김숨 초대(1회) 204―244
전예진 매점 지하 대피자들(3회) 246―271
권혜영 얼지 마, 죽지 마, 사랑하게 될 거야(3회) 272―297
이서수 여로의 사랑(4회) 298―323
김나현 모든 시간이 나에게 일어나(4회) 324―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