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니카의 눈물
“일상의 시간을 잡아 늘이는 여행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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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수상 작가
권지예 10년 만의 소설집 출간
1997년 단편소설 〈꿈꾸는 마리오네뜨〉로 문예지 《라쁠륨》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뒤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을 연달아 석권한 권지예가 10년 만에 소설집 《베로니카의 눈물》을 출간했다(은행나무刊). 한 편의 중편소설과 다섯 편의 단편소설로 묶인 이 소설집은 ‘이국’과 ‘낯선 장소’라는 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인물과 인물 사이에 느껴지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와 관계의 뒤틀림 등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단조롭고 무료한 삶을 벗어나 이국의 공간에 함께 던져진 미완(未完)의 사람들. 여행은 사람을 좀 더 가깝고 애틋하게 만들어주지만, 오히려 가까워진 그 물리적 거리로 인해 서로가 더욱 낯선 존재로 변모하기도 하고 때론 그 대상이 나 자신이 되어 스스로 고수해왔던 가면 속 민낯을 직면하기도 한다. 권지예의 소설에서 여행은 독자와 이야기를 더욱 밀착시키는 매개체가 된다. 작가는 우리가 외면해왔던 수많은 삶의 이면이 여행이란 특수한 상황 속에서 더 강력하게 발현될 수 있도록 신열하고 솔직한 이야기를 아낌없이 풀어놓는다. 충분한 이해를 공유하고 있다고 믿어왔던 상대가 은연중에 내비치는 낯선 모습들이 소설 속 삽화처럼 유려하게 흐른다.
“겨울을 재촉하는 을씨년스러운 늦가을 비가 추적이고 미세먼지가 하늘을 연일 뒤덮는 날이 이어지자 나는 쿠바로 날아가기로 했어요.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고, 무엇보다 혼란과 슬픔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올 계기가 필요했어요. 나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_본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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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 파리, 플로리다, 발칸반도……
이국에서 벌어지는 멜랑콜리한 삶의 이면
〈베로니카의 눈물〉을 포함한 여섯 편의 소설은 쿠바 아바나, 프랑스 파리, 미국 플로리다 등 다양한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품 속 인물들은 대부분 이방인으로서 해외를 여행 중이거나 단기 체류 중인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야기의 전개와 함께 서서히 드러나는 관계의 진면이다. 그들은 모두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향유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사유를 하는 순간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는 것이다.
표제작인 〈베로니카의 눈물〉은 글을 쓰기 위해 이역만리 한국에서 쿠바까지 날아 온 모니카와 집의 관리인 베로니카가 유대감을 쌓아가는 이야기이다. 처음엔 잘 맞지 않는 듯했지만 낙후된 환경에서 현지인 베로니카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모니카와 그런 모니카를 딸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대하는 베로니카의 모습은 연신 웃음과 따뜻함을 주고 급기야 둘의 관계는 ‘쿠바 엄마와 딸’로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이 하나 터지며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표면적으로는 아무 일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곳에 있는 한 나는 그녀와 공생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할수록 그런 결론이 났다. 그녀가 일을 하러 오면 나는 전과 같이 서비스에 대한 내 기준의 팁을 주었다. 갑자기 안 주면 그녀가 내 치졸한 마음을 눈치챌 거 같았다.” _본문에서
다른 소설들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에겐 상처뿐이었던 낭만의 도시 파리를 사진작업 차 다시 찾은 재이는 아름다운 추억과 비참한 기억이 어려 있는 미라보 다리 위에서 전남편을 다시 만나기로 하고(〈낭만적 삶은 박물관에나〉), 남편이 유품으로 남긴 작은 상자의 비밀을 알기 위해 쿠바로 향한 수현은 뜻밖의―사실은 믿고 싶지 않아 외면하고 있었던―진실을 마주하며 도리어 다시금 생의 의지를 다잡게 된다(〈파라다이스의 빔을 만나는 시간〉). 또한 부유하게 사는 친구 부부의 세미나에 대리 출석하기 위해 딸과 함께 플로리다에 온 현주는 시종일관 예민하게 구는 딸이 사실 성폭행 피해자였고 미투 고백을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으며(〈플로리다 프로젝트〉), 은혼식을 맞아 남편과 함께 패키지여행을 떠난 복순은 남편과 각자의 영역을 인정하고 참견하지 않는 안정된 부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내내 붙어 있을 수밖에 없는 여행의 특성상 애써 덮어두고 있었던 그간의 묵은 감정과 기억이 끝내 호출되고야 만다(〈카이로스의 머리카락〉). 마지막으로 실린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마〉는 유일하게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남자와 여자는 여행을 하거나 해외에서 체류하고 있지 않지만 각자의 이유로 집을 떠나 고시원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회의 이방인으로서 존재하는 인물들이다.
“재이는 아파트를 나와 강변도로를 걸어 미라보 다리로 향했다. 가을이 깊어가는지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플라타너스 낙엽이 꼭 썩은 손처럼 보였다. 우울하게 안개비가 내리는 전형적인 파리 날씨다. 재이는 진봉에게 이렇게 물어볼 작정이다. 아직도 로맨티시스트야?” _본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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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당신 사이의 장막이 걷히는 순간,
우리는 어떤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될까
문학평론가 소영현은 작품 해설을 통해 “일상의 윤곽은 일상을 벗어나면서 좀 더 뚜렷해진다. 여행을 통해 오히려 일상의 숨겨진 이면을 좀 더 날카롭게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베로니카의 눈물》에 실린 여섯 편의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일상의 이면’이다. 내가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은 사실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고 착각했던 것이고,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 또한 그저 내 방식대로 받아들이고 해석하여 스스로 그 합의에 도달한 것뿐이다. 이렇듯 《베로니카의 눈물》은 지나치게 일상적이라 오히려 보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게 하며, 그것은 주로 낯선 공간에 여행이란 명목으로 던져진 사람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소설이라는 수면 위로 떠오른 그들의 진심을 통해 아스라이 드러난다. 권지예의 소설은, 소영현의 표현을 빌려 “이국의 경험을 활용하면서 우리의 삶이 구성되는 방식을 묻고” “일상의 시간을 잡아 늘이는 여행의 시간을 통해 그 내부로 깊이 파고들어 문득 우리의 삶이 구성되는 방식을 낯설게” 하는, “여성으로서의 그녀들의 삶이 해체되고 재조직되는 시간, 즉 부재의 시간과의 조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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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말
“권지예의 소설은 이국의 경험을 활용하면서 우리의 삶이 구성되는 방식을 묻고 일상의 시간을 잡아 늘이는 여행의 시간을 통해 그 내부로 깊이 파고들어 문득 우리의 삶이 구성되는 방식을 낯설게 자각하게 한다. (……) 소설에서 여행은 여성으로서의 그녀들의 삶이 해체되고 재조직되는 시간, 즉 부재의 시간과의 조우이다.” _소영현(문학평론가)
“이 소설을 읽고 난 뒤 나는 갑자기 비행기표를 끊어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의 소설에는 독자의 가슴을 잡아끄는 강렬한 힘이 있다.” _하정우(영화배우·작가)
베로니카의 눈물 · 7
낭만적 삶은 박물관에나 ·109
파라다이스 빔을 만나는 시간 ·143
플로리다 프로젝트 ·187
카이로스의 머리카락 ·231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마 ·275
해설 ·314
작가의 말 ·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