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헤밍웨이 케빈 파워스의 충격적 자전소설
노란 새
“저 친구가 죽고 내가 죽지 않아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거칠고 생생한 시적 언어로 그려낸 전쟁의 야만성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몰린 인간의 트라우마
“21세기의 헤밍웨이”라는 찬사 아래 미국 문단의 신성으로 떠오른
이라크전 참전 작가의 충격적인 자전 소설
★ 2012년 가디언 퍼스트북 수상작
★ 2012년 전미도서상 · 플라어티-더넌 첫소설상 최종후보작
★ <뉴욕타임스 북리뷰> 선정 미국 최고의 책 Top 10
★ <데일리비스트>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 선정 최고의 책 Top 10
★ <에스콰이어> <LA타임스> <퍼블리셔스위클리> <커커스리뷰> 등 선정 최고의 책
★ 미국 아마존 소설 부문 2위 · 전 세계 22개국 번역 출간
조너선 사프란 포어, 제이디 스미스 등 쟁쟁한 신예 작가들을 배출해낸 문학상 가디언 퍼스트북의 시상식은 작년 미국 출판계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2012년 최대의 화제작이자 문제작이라 할 수 있는 케빈 파워스의 장편소설 《노란 새》가 최종 후보에 오른 강력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이 상을 거머쥐었기 때문이다. 《노란 새》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2012년 북엑스포 아메리카에서 리틀브라운의 베테랑 에이전트이자 아셰트 북그룹 대표인 마이클 피치에게 이 소설이 발탁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의 《창백한 왕(Pale King)》,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사후 출간 회고록 《위험한 여름(The Dangerous Summer)》 같은 대작의 책임편집을 맡았던 피치는 이 소설이 “살아남고자 고군분투하는 젊은 군인의 초상, 그리고 그런 젊은이들에게 전쟁이 미친 영향을 너무나 깊이 있게, 슬프도록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고 평가했으며, 그 문체의 아름다움과 간결성을 헤밍웨이의 문체에 견주어 회자하며 판권을 계약했다. 리틀브라운과의 대형 계약 외에도 이라크전 참전군인 출신 작가가 자신의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이라는 사실 역시 이 소설에 대한 관심에 불을 지피는 데에 한몫했다.
출간 전 원고 상태에서 이미 전 세계 22개국에 판권이 체결된 이 소설은 언론의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출간되었고, 특히 미국 독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문학 전문지 <뉴욕타임스 북리뷰>의 간판 칼럼니스트이자 유명 작가들에게 거침없는 혹평을 하기로 유명한 퓰리처상 수상 평론가 미치코 카쿠타니가 이 소설에 9.5점이라는 이례적인 평점을 주면서 한층 더 높은 관심을 받게 되었다. 《노란 새》는 미국 출판계 최고 권위의 상인 전미도서상과 플라어티-더넌 첫소설상 최종후보에 올라 그간의 기대가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했고, <뉴욕타임스 북리뷰> <데일리비스트> <에스콰이어> <LA타임스> <퍼블리셔스위클리> 등 수많은 언론에서 2012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이라크전에 관한 최초의 위대한 문학”
-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21세기의 전쟁 문학
나는 전쟁이 인류를 하나로 통합하는 행위로, 지구 상의 그 어떤 행위보다도 사람들을 한데 묶어주는 것이라고 주입교육을 받았다. 헛소리. 전쟁은 무엇보다도 인류를 유아론자로 만든다. 네가 어떻게 오늘 나의 목숨을 구해줄 것인가? 죽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네가 죽으면 내가 죽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질 테니.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게 비결이다. 우리는 무수한 번호 속 한 명의 군인, 무수한 먼지 속의 번호 하나에 불과했다. – 본문 중에서
케빈 파워스의 소설은 동시대의 일반적인 소설과는 분명히 다른 지점에 서 있다. 이는 오늘날 대부분의 소설이 개인의 사적 경험에 기반한 ‘소(小)세계’를 다루는 것과 달리, ‘전쟁’이라는 거대한 공적 경험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전쟁의 루머》의 작가 필립 카푸토에 따르면, “《일리아드》이후로부터 전쟁은 언제나 문학의 주요한 주제”였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늘 있어온 전쟁은 인류의 기억에 가장 큰 상흔을 남기는 사건이었기에 위대한 문학 작품의 형태로 그 족적을 남겼다. 지난 20세기에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개선문》이 각각 세계 1차, 2차 대전을 다루며 전쟁 문학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했다면, 현재는 21세기의 전쟁 문학, 특히 ‘이라크전’을 다룬 문학이 탄생해야 하는 시점인 것이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한 뒤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한다는 명분하에 ‘이라크의 자유’라는 작전명으로 전쟁을 개시했다. 2003년에 발발한 이라크전은 2011년 오바마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이라크전의 종전을 선언하며 끝이 났다. 이 사이 세 차례의 전쟁이 있었고 작가 파워스는 그중 두 번째,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이어진 전쟁 중 이라크 탈 아파르와 모술 지역에서 복무하며 이라크전의 참상을 경험했다.
미국에 있어 이라크전은 ‘위대한 미국’의 ‘위대한 전쟁’이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이라크전의 종전 이후 참전 용사의 회고록, 그들이 겪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 관한 보고서 등 다양한 자료가 하나둘씩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모두가 기다리던 21세기의 전쟁 문학, ‘위대한 전쟁’에 관한 불편한 진실을 ‘감히’ 고백할 만한 소설은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2012년이 되어서야 케빈 파워스라는 신성(新星)이 《노란 새》를 들고 나타났다. 이 소설은 이라크전에서 희생되는 수많은 생명을 애도한 뒤 신문의 연예란으로 쉽사리 눈을 돌리는 사람들에게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직면하게 한다. “직접 경험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방식으로 현대의 전쟁을 묘사한다”는 평을 받은 작가 파워스는 자신이 경험했던 전쟁의 야만성과 참혹함, 그리고 생존을 위해 인간성이 말살되는 모습을 (본래 시인으로 등단했던 만큼)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담담하면서도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소설에 관해 서머싯 몸 수상작가 크리스 클리브는 “불편한 진실을 고백하며 픽션의 힘을 재확인시켜주는 훌륭한 문학적 성취”라고 평가했으며,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이라크전에 관한 최초의 위대한 문학 작품”이라는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약한 동시에 고군분투하는 인간성을 조망하다”
- 전쟁으로 산산 조각난 기억, 공유하는 상처의 경험
나는 모두에게 사격을 중단하라고, “도대체 우리는 어떤 인간이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다 순간 마치 구원받은 것처럼, 기이한 감각 하나가 날 사로잡았다. 난 남자가 아닌 소년일 뿐이고, 저 남자가 겁에 질렸을지도 모르지만 나 역시 겁나긴 마찬가진데 그런 데까지 마음을 써줘야 하나? 나는 내가 그 남자를 향해 총을 쏘고 있으며 그 남자가 죽은 걸 확신할 때까지 총질을 멈추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어마어마한 충격에 휩싸였다가, 그 남자를 죽인 게 나 혼자가 아닌 우리 모두라는 걸 알고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 본문 중에서
소설은 가상의 이라크 도시 ‘알 타파르’(작가가 복무한 이라크 도시 ‘탈 아파르’의 언어유희)에서 복무하는 두 소년병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작가 파워스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주인공 바틀 이병은 머피라는 또래 소년과 함께 복무하게 되고, 전장으로 떠나기 직전 머피의 어머니에게 그를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약속을 한다.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인 두 소년은 더 중요한 무언가를 이뤄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전장에 오지만 현실은 그들의 바람과는 반대로 흘러간다. 아무 거리낌 없이 자행되는 무자비한 살상, 전쟁의 소모품에 불과한 무력한 개인의 연이은 죽음. “계속 일탈하는” 것 이외에는 버틸 방법이 없는 전장에서 머피는 기이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한 데에 죄책감을 느낀 바틀은 자신의 기억을 헤집으며 머피가 죽은 원인을 알아내려 한다.
이 소설은 2004년의 이라크, 2003년의 미국, 2005년의 독일 등 시간과 공간을 순서 없이 넘나들며 진행되는 비선형적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이 같은 구조는 ‘전쟁’이라는 이 소설의 주제와도 맞아떨어진다. 소설 속에서 바틀이 전쟁의 기억을 가리켜 “거꾸로 맞추는 퍼즐”에 비유하는 것처럼, 전쟁은 단순히 뼈와 살을 부술 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을 산산이 조각내 수천 개의 파편으로 만든다. 주인공 바틀의 기억 역시 전쟁으로 파편화되었으며 이 기억의 편린들로 이뤄진 비선형적 구조는 머피의 죽음에 관한 미스터리를 강화할 뿐 아니라 독자들을 끔찍한 비밀의 한가운데로 적극 이끄는 장치로서 작용한다. 독자는 바틀의 조각난 기억을 맞추며 머피의 죽음을 스스로 추적하는 가운데 자신 역시 어느 정도는 책임이 있음을, 이 하나의 죽음뿐 아니라 우리가 방관하는 수많은 죽음에 책임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전쟁은 모두가 공유하는 상처의 경험이나, 그 경험의 디테일은 개인마다 다르다. 이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라는 ‘사적 경험’을 ‘공적 경험’으로 치환함으로써, 거대 담론에 치중하는 소설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을 피할 수 있었다. 첫 장편소설 《노란 새》에서 우리가 외면해온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길 호소한 파워스는 미국 문단의 미래를 이끌어 갈 차세대 기대주로 꼽히고 있다.
이라크전을 다룬 소설 ‘노란새’(은행나무 펴냄)도 예외는 아니다. 작가 케빈 파워스는 3년간 집필한 소설에 전장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지난해 전미 도서상 최종 후보에 오르는 등 도서전 내내 화제를 몰고 다녔다.
책 제목인 노란새는 전통 미군 군가에 나오는 부리가 노랗게 물든 새다. 빵 한 조각에 이끌려 부질없이 목숨을 잃었다. 소설은 전쟁터를 누비는 어린 군인들도 노란새와 다를 바 없다고 이야기한다. 촌구석에서 벗어나려 입대한 주인공 바틀과 머프는 18세 소년이다. 대학을 나온 중위나 베테랑 하사도 고작해야 이들보다 서너 살 더 먹었을 따름이다. 두려움과 암페타민의 약효 덕분에 간신히 잠을 깬 바틀과 머프는 벌건 눈으로 단지 살아남기 위해 무자비한 살상을 자행한다.
인간다움을 유지하려 몸부림치던 머프는 자포자기하다 이라크인들에게 납치돼 잔혹한 죽음을 맞이한다. 파병 전 머프의 어머니에게 머프를 반드시 살려 데려가겠다고 약속한 바틀은 상관의 명령에 따라 머프의 시신을 강에 내다 버린다. 죽음을 은폐하기 위해서다. 귀국한 바틀은 자신을 전쟁 영웅으로 추앙하는 주변의 시선에 끝없는 혼란을 겪는다. 자신은 살인자이자 비겁한 겁쟁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한 일이라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 게 고작이었다.
작가는 2004년 17세의 나이로 이라크 모술과 탈아파르에서 포병으로 복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집필했다. “전쟁터는 어떻더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집단의 타성에 젖어 민간인을 학살한 주인공처럼 어른거리는 과거 때문에 끝없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의 소설 속에 전우애나 전쟁 영웅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어린 청년들과 이를 뒷짐 지고 구경만 하는 군 당국이 등장한다. 소설은 전쟁의 야만성을 거칠고 생생한 시적 언어로 담아 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영문학과 시를 전공한 작가는 “헤밍웨이의 계보를 잇는, 전쟁 문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을 작품”(퓰리처상 수상 평론가인 미치코 가쿠타니)이란 호평을 받았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이라크전에 참전한 두 미국 소년병이 전쟁으로 겪는 살상의 무자비함과 살아남고자 하는 개인이 마주하는 무력함을 그린다.
함께 살아 돌아오기로 했으나 친구 머피가 죽어버린다. 친구의 죽음 속에 감춰진 비밀을 찾는 바틀의 노력을 통해 전쟁이 누구의 책임인지, 전쟁이 인간에게 어떤 상흔을 남기는지 질문한다.
작가는 2004년 17세의 나이로 이라크 모술과 탈 아파르 지역에서 포병으로 복무했다.
은행나무. 288쪽. 1만3천원.
2004년의 이라크, 2003년의 미국, 2005년의 독일 등을 순서 없이 넘나들며 펼쳐지는 이 소설은 파편화된 주인공의 기억을 통해 전쟁이 단순히 육체만을 다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 역시 산산이 조각내버린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쟁의 야만성과 잔혹함, 생존을 위해 인간성이 말살되는 모습을 직접 경험했던 작가는 현대 전쟁의 모습을 거칠고 생생한 시적 언어로 묘사했다.
케빈 파워스 지음/원은주 옮김/은행나무/288쪽/1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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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석 문학평론가
<줄거리> 가상의 이라크 도시 \'알 타파르\'. 바틀 이병은 머피라는 또래 소년과 함께 복무한다. 전장으로 떠나기 직전, 바틀은 머피의 어머니에게 머피를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한다.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인 두 소년은 더 중요한 무언가를 이뤄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전장에 오지만 현실은 그들의 바람과는 반대로 흘러간다. 아무 거리낌 없이 자행되는 무자비한 살상, 전쟁의 소모품에 불과한 무력한 개인의 연이은 죽음. \"계속 일탈하는\" 것 이외에는 버틸 방법이 없는 전장에서 머피는 기이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한 데에 죄책감을 느낀 바틀은 자신의 기억을 헤집으며 머피가 죽은 원인을 알아내려 한다.
<노란 새(The Yellow Birds)>(케빈 파워스 지음, 원은주 옮김, 은행나무 펴냄)의 내용이 어떠한지 다루는 대신 이렇게 물어보면 어떨까. 이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혹은 이 소설이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조금 돌아가자. 먼저, 이 소설을 \'쓰고 있는 나\'를 상상해보자. 소설 속 화자인 \'나\'(바틀)도 아니고, 이 책의 실제 저자 케빈 파워스도 아닌 누군가를. 목차만 봐도 알겠지만, <노란 새>처럼 소설 속 시간이 뒤섞이는 형식에서는 전체 서사를 알고 있는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다. 보통 소설 속 화자도, 실제저자도 아닌 이 누군가를 \'내포저자\'라고 부른다. 아래에서는 편의상 내포저자를 \'나\'로, 소설 속 화자를 \'바틀\'로 구별하겠다.
소설 속 시간에서 최후의 시점인 2009년 4월(11장) 이후에 이 소설은 \'나\'에 의해 쓰인다. 그보다 최소 4년 전인 2005년 8월(7장)에 \'바틀\'은 어머니에게 이런 질문을 받는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조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가? 너 무슨 짓을 한 거니?\" 그때, \'바틀\'의 반응은 이랬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씨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그건 질문도 아니라고, 난 생각했다. 그게 무슨 질문이란 말인가? 답이 없는 질문에 어떻게 답한다 말인가? 그때 일어난 일들을, 단순한 사실들을, 일어난 사건들을 시간순으로 나열하는 것은 일종의 배신이 될 것 같았다. 균형을 잡아 줄지어 세워 놓은 순간들의 도미노, 그걸 모호하고 불확실한 원인이라는 힘으로 밀어 넘어뜨리면, 오직 추락만이 모든 물체의 운명이라는 걸 보여줄 뿐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모든 일은 일어났다. 모든 것은 추락했다.\" (190쪽)
▲ <노란 새>(케빈 파워스 지음, 원은주 옮김, 은행나무 펴냄). ⓒ은행나무
2005년 8월, \"다 좆까, 그게 내 삶의 새로운 모토다\"라고 말했던 \'바틀\'이 2009년 4월 이후에는 이 소설을 쓰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얘기는 질문도 아니고, 답이 없는 질문에 어떻게 답한단 말이냐던 \'바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던 \'바틀\'이었는데, \'나\'는 어떤 이유에선지 이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란 새>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세상이 던지는 공허한 질문에 \'나\'가 도달한 일종의 대답이 아닐까. \'나\'는 이 대답이 2005년의 \'바틀\'이 우려했던 \"배신\"이 되지 않기를, 또 이 대답을 보는 우리에게 \"충분\"하기를 바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독자인 우리는 11장을 좀 더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서사가 진행되면서 10장에 이르기까지 몇 번 흔적을 드러냈던 내포저자로서의 \'나\'는 11장에서는 비교적 선명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여기까지 독자가 읽은 것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틀\'을 빌어 \'나\'가 내놓은 대답이었다. 그 대답은 \'서사\'의 형태로 전달된다. 그런데 이제 독자는 \'나\'를 통해서 이런 얘기를 듣는다. \"내가…설명하려 노력하면서 사용한 모든 단어는 내가 본 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하찮은 것 같다.\"
독자가 지금껏 읽은 이 소설이 \'나\'가 전쟁을 겪으며 \"본 것\"과는 다르다는 얘기. 너무나도 하찮다는 말 때문에 오해하기 쉽겠지만, 이 말은 소설의 내용과 \'나\'가 말하지 못한 무엇(이를테면, \'말로 전달할 수 없는 전쟁\') 사이에 위계를 두려는 태도가 아니다. 또한 \'실제 거기 있었던 것\'과 말로 전달한 것 사이의 간극에 대한 절망도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바틀\'은 좀 더 체념하거나 냉소하며 세상에서 멀리 물러나 있는 게 어울린다. 이때 2005년의 \'바틀\'과 같은 상태였던 \'나\'가 2009년에 이 소설을 쓰게 되는 변화는 설명하기 곤란하다. 독자가 이 서술을 통해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가 읽은 게 \'나\'가 어떻게든 말할 수 있는 전쟁 체험이라는 점이다. 더 분명하게는, 그 체험을 \'서사로 만들 수 있는 것\'뿐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독자가 감정이입하며 이해해가던 \'바틀\'은 전쟁 체험에서 서사화가 가능한 범위의 \'나\'에 불과하다.
소설의 막바지에서 \'나\'는 실감 나게 재현한 소설 속 \'현실\'을 전쟁 그 자체로 여기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독자에게 직접 하고 있는 셈이다. 타자와 공유하기 위해서 기억을 이야기하지만, 그 서사가 독자에게 기억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는 것에는 저항하고 있다. 이런 이중적인 태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는 과제를 독자에게 남겨둔 채.
<노란 새>를 이렇게 바라보게 되면, 소설의 서사를 순서대로 따라가던 독자는 자신의 공감 정도를 어떻게 자리매김할지 약간 흔들릴 것이다. 그 흔들림은 소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만들어지던 공감의 성격을 바꾼다. 아마도 공감의 성격 변화는 이 소설에 깊이 빠져들던 독자에게서 더 클 것이다.
2005년 무렵 \'나\'는 전쟁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나의 패턴으로 짜 맞출 수 없었다. 그 어떤 패턴도 말이 되지 않았다. 이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고, 그래서 무언가를 얘기해야 한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가 이해하는 자신의 삶은 \"아무도 찾지 않는 작은 박물관의 큐레이터\" 같았다.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내 인생은 줄어들고 작아졌다.
\'나\'는 감옥에 있는 동안 전쟁과 관련한 특정 사건이 떠오르면 감방 벽에 낙서를 해두는 습관이 생긴다. 그리고 자신이 겪은 전쟁을 하나의 패턴으로 조립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결국 그 낙서들을 어떤 종류의 패턴으로도 조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무리 그 낙서들이 늘어나도 거기에 패턴이 존재하진 않았다. 기억은 도래하고 범람하고 잠식한다. 그렇게 \"모든 것은 와해된다.\" 자신이 속한 \"현재는 완전히 잊고\" 마는 삶만이 주어진다. \'나\'에게 전쟁 체험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바로 그것이 전쟁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가 내린 대답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독자인 우리는 전쟁의 기억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되물어야 한다. \'나\'에게 \"그 낙서들은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고 \"그것들을 연결 짓는 건 잘못\"이라면, 우리가 조립을, 서사를, 이해를 바라는 것은 그저 타자인 우리의 욕망은 아닐까. 마치 이따금 감방에 들른 간수(타자)가 그 낙서들을 패턴이라고 보았듯이.
물론, \'나\'는 이제 \"왜 그들이 이것을 패턴이라 보았는지\" 타자의 욕망을 이해한다. 어쩌면 그 점을 \"이해\"했기 때문에 이 소설을 쓸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이해와는 상관없이 \'나\'와 독자 사이의 간극은 여전하다. 이 어쩔 수 없는 간극 앞에서 독자는 어찌할까. 할 수 있는 것은 간수들처럼 \"낙서에 의미가 있다는 걸 이해하는 것\"이고, 우리가 알게 된 것은 \'나\'가 비로소 말로 할 수 있게 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고, 아직 말로 할 수 없는 \'나\'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더 나누어 갖기 위해 조심스레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러다 운이 좋으면, 소설에서는 결코 말해지지 않은 \'나\'의 \"인생을 이루는 길고 기록되지 않은 순간들이 내내 상영되고 있는 줄도 몰랐던 영화처럼 하나씩 스쳐 지나\"가는 상상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나\'에게, 그리고 독자인 우리에게, <노란 새>는 머프의 어머니가 감옥에 있는 \'바틀\'을 면회 왔을 때 건네준 \"지도\"와 같다. 이 지도는 시간이 미치는 작은 영향들과 한 장소의 의미를 설명하기엔 너무 순식간에 지나간 기억들로 형성된 환상을 가리킨다. 이 지도는 조금씩 사실과 먼 그림이 되고, 점점 더 기억을 형편없이 2차원으로 번역한 꼴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지도는 모든 다른 지도와 마찬가지로 곧 쓸모없어질 것이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
짧게 정리하자. <노란 새>는 재현되기를 거부하는 체험을 어떻게든 이야기함으로써, 오히려 거기에는 언어로는 아직 재현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여전히 현재형인 \'나\'의 트라우마는 그제야 독자에게 이어질 가능성이 생긴다. 이 가능성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는 선뜻 말하기 어렵다. 카자 실버만(Kaja Silverman)의 말처럼, \"만약 기억한다는 것이 자신의 몸으로는 겪어보지 못한 \'상처\'를 자신이 마음속에 담아두는 것과 같은 일이라면, 상처 입은 다른 사람의 기억을 기억하는 것은 그들의 상처에 의해 상처 입는 일이 될 것\"일 테니.
덧붙여서)
<노란 새>의 어떤 \'정직성\'도 주목할 만하다. 고통을 전시하면 독자들은 훨씬 생생히 전쟁을 느낄 수 있겠지만, 그 전쟁은 \'나\'의 전쟁이 아니라 누군가의 판타지를 충족하는 것에 불과하다. 사람의 팔다리가 어떻게 잘려나가고 시체폭탄이 어떤 모양새이고 하는 것들을 더 자세히, 더 생생히, 더 적나라하게 얼마든지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바틀\'의 위치와 한계 안에서만 서술하는 긴장과 절제를 놓치지 않는다.
말로는 이야기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말할 수 있다는 태도로 서술하려고 한다면, 그때 소설은 스스로를 배반하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폭력적으로 틈입해 들어오는 전쟁의 기억에서, 자신만이 풀어낼 수 있는 서사를 포기하지 않고 지켜내는 방식으로, 상처 이후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해내는 시도를 한다.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공진호 옮김, 문학동네 펴냄)의 인물 \'바틀비\'에게 바치는 오마주인 게 분명한 \'바틀\'에서부터, 전쟁소설에서 습관적으로 기대는 상투적인 설정들에서 멀어지려는 태도를 비롯해 흥미로운 부분이 여럿이다.
그런데 이런 정직성에 관한 판단은 조금 매끄럽지 못한 한국어 문장 탓에 흐려지곤 했다. 이게 소설의 약점인지 번역 탓인지 자신할 수 없었다. 오역은 아니더라도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문장들을 변명 삼고, 다음 기회를 기다릴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