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철학을 종횡무진하며 직조해낸 현대의 우화
무게감 있는 서사를 관통하는 젊은 문장
소설가 정유정으로부터 “독자를 끌고 가서 기어코 끝을 보게 만드는 이야기의 완력”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으며 2015 한경신춘문예 장편소설 부문으로 등단한 홍준성의 두 번째 장편소설 《카르마 폴리스》가 출간되었다. 전작 《열등의 계보》에서는 어느 이름 모를 가문의 4대(代)에 걸친 연대기를 따라가며 한국 사회를 조명했던 홍준성은, 이번에는 가상의 도시 ‘비뫼시’를 통해 인간 역사와 정신사 전반을 재구성해냈다. ‘대홍수’라는 참혹한 재난 상황에서 고아원 일련번호였던 ‘42’로 불리게 된 소년을 둘러싼 세계가 어떻게 무너지고 재편되는지를 그려내는 이 소설은 인간 보편의 역사를 우화적으로 조명한다. 젊은 작가답지 않은 탄탄한 구성과 에너지 가득한 문장은 거대 서사를 거침없이 밀고 나가며 독자를 매료시킨다. 한편 철학과 역사, 종교와 예술을 넘나드는 작가의 방대한 지식 세계를 엿보는 것은 이 소설의 또 다른 매력이다. 고전과 철학을 모티프로 하여 재해석하고 변용한 문장 사이를 거닐며 독자들은 색다른 지적 쾌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구독 플랫폼 ‘밀리의서재’ 선연재 기간 동안 독자들의 열광적인 사랑을 받기도 한 《카르마 폴리스》는 현재 2021 런던 도서전에 앞서 진행 중인 국제 온라인 저작권 교류 행사에서 젊은 작가의 작품으로는 이례적으로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도미노는 먼 옛날부터 계속해서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곳은 가상의 도시 ‘비뫼시’이다. 가시여왕이 다스리는 이 도시의 역사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인간의 역사를 축소해둔, 일종의 ‘자연사 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소설은 한 마리 박쥐가 날아오르는 것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박쥐는 고서점 구석에서 책벌레를 먹으며 목숨을 연명하다가, 고서점의 폐점과 함께 세상으로 끌려나오게 되고 바로 그날 송골매에게 죽임을 당한다. 박쥐의 시체를 발견한 약재상은 박쥐를 약용으로 팔고, 그것을 고아 먹은 유리부인은 박쥐를 닮은 아이 ‘42’를 잉태하게 된다.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이 장면들은 작품이 진행되어감에 따라 마치 도미노가 넘어지듯 이야기의 연쇄를 통해 더 큰 이야기로 맞물려간다.
으레 비극이란 것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그 단추는 당사자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부터 끼워지고 있었다. 아니, 그 시작을 말하는 것조차 우스꽝스럽다 하겠다. 왜냐하면 도미노는 먼 옛날부터 계속해서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 56쪽
그렇게 탄생한 42는 ‘대홍수’로부터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생존자이다. 대홍수는 가시여왕이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벌인 대규모 토목사업으로 만들어진 댐이 무너진 일로, 42라는 이름은 살아남은 그에게 붙은 고아 일련번호였다. 그는 보육원에 맡겨졌다가, 박쥐를 닮은 얼굴 탓에 왕궁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고유한 이름 대신 숫자를 이름으로 가지게 된 아이의 삶은 어떻게 전개될까?
괴이하기 짝이 없는 수순들을 밟아가며 태어나고 또한 여태껏 살아남은 42번은, 그 첫 도미노의 관성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기구한 운명이 예정됐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꽤 독특한 아이로 자라났다. ―본문 114~115쪽
영국의 얼터너티브록 그룹 라디오헤드(Radiohead)의 노래 제목이기도 한 소설의 제목 ‘카르마 폴리스’에서 예감할 수 있듯이, 이 소설은 단순히 한 인물의 이야기를 다룬다기보다는, 42를 둘러싼 세계의 모든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다. 소설은 곳곳에서 동서고금의 보편적 역사를 상기하게 하고, 그 속에서 인간의 삶이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며 서로에게 도미노처럼 작용하는 지를 집요하게 파헤친다. 이야기의 힘을 믿고 끝까지 끌고 나가는 작가가 드문 이 시기에, 거대 서사의 매력을 알아보는 눈 밝은 독자들에게 선물 같은 작품이 될 것이다.
데카르트, 벤야민, 셰익스피어, 까뮈, 베케트……
독자들의 지적 한계를 시험하는 매력적인 상징들
이 소설은 명백히 현대에 대한 우화이다. 42는 세계대전 이후 휴머니티의 폐허에 태어난 현대인을 떠올리게 한다. 슬럼가와 왕궁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비참한 삶의 모습들은 고전 소설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지만, 현대의 도시 구획 역시 빈자와 부자를 보이지 않는 선으로 나누고 있음을 깨달을 때 이 소설은 더 이상 허구로서만 기능하지 않게 된다. 궁정 안의 암투와 가시여왕의 치세는 왕정 시대의 유럽을 떠올리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현대 미국에 이르기까지의 정치가 어떻게 집단을 구획하고 획책해왔는지를 상기시킨다.
작가는 이 소설을 ‘상호텍스트성’을 통해 만들어진 소설이라고 명명한다. 상호텍스트성이란 인용과 변용, 오마주를 통해 이전과 이후의 무수한 텍스트와 교차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키는 작업을 통칭한다. 그의 선언답게, 《카르마 폴리스》에는 고전과 철학, 예술과 역사를 오가는 무수한 텍스트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고전과 철학에 관심이 많은 명민한 독자라면 ‘비뫼시’라는 세계를 구현하는 매력적인 모티프들과 오마주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독서의 재미가 탄탄한 이야기의 힘에서 오는 것이라면, 두 번째 독서의 재미는 매력적이고 지적인 모티프와 오마주를 사이를 거닐며 발생되는 새로운 의미를 음미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지적이고 매혹적인 독서의 경험이 독자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는 기회가 되길 기대해본다.
▣ 책 속에서
비뫼시 중심부에 솟아 있는 신성한 언덕과 그 주변은 예로부터 왕가와 명망 높은 귀족들의 거주 지역이었다. 가장 높은 봉우리엔 육중한 원기둥들이 늘어선 기다란 회랑(回廊)과 하늘 높이 쌓아올린 일곱 개의 첨탑으로 이뤄진 궁전, 예로부터 전해지길 그 지하엔 거대한 미궁이 똬리를 틀고 있고, 그 밑바닥에 천년의 호박(琥珀) 속에 갇힌 마법사왕이 있으며, 기적이 사라지기 전부터 도시를 떠받치고 있는 성수(聖樹)가 뿌리내리고 있고, 또한 유령들로 둘러싸인 지하감옥에 철가면을 쓴 쌍둥이 왕자가 유폐되어 있다는 등의 온갖 전설로 가득한 바로 그 신비로운 궁전이 세워져 있었다.
―본문 56쪽
이내 홍수가 그 모든 것들을 수장시켜버렸다. 공기 중에 흩날릴 만한 먼지 한 톨조차 허용하지 않은 채로, 빈틈없이 말이다. 이후 생존자들은 이날의 대참사를 ‘대홍수’라고 불렀다.
―본문 70쪽
그렇게 모두가 단념하고서 그날 라디오 뉴스에 나갈 ‘가장 비통한 소식’ 따위의 멘트를 상상하고 있던 그 순간에, 몇 박자 늦게 새 생명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는 마치 폐부로 밀려드는 낯선 공기를 거부하려는 듯한 절규처럼 들렸고, 집도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잔뜩 움츠렸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옆에 있던 수간호사도 다리에 힘이 풀려 얼마간 주저앉아 있어야만 했다. 참고로 그 태아는 대부분 익사하거나 짓뭉개진 시체들투성이였던 현장에서 의료진들이 처음으로 구해낸 생명이었다.
―본문 75~76쪽
이야기는 끊임없이 흘러가고, 흩어졌던 것들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다시 끼워 맞춰지기 마련이다. 태만한 행정의 결과물로서 몬세라토 수도원에서 운영하던 고아원으로 보내진 42번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쇠우리로 된 요람 안에서 강행될 수난기였다.
―본문 107쪽
▣ 차례
1장 9
2장 44
3장 82
4장 117
악곡 없는 간주곡 156
5장 205
6장 243
7장 282
8장 320
9장 348
에필로그 380
미주 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