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 상회의 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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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서로를 보듬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일
“서로의 관계를 바라본다. 각자의 처지와 시간은 다 다르지만,
그 안에서 공통된 질료와 마음을 응시한다.”_이기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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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경란의 첫 장편소설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이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소설은 몰래 길고양이를 키우다 고시원에서 쫓겨난 민용이 연후와 저커, 이안과 함께 재개발을 앞두고 있는 강남 오로라 아파트에 입주, 월세를 4분의 1로 ‘N빵’ 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강남 한복판. 화려하고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나만 빼고 다 성공한 것 같고, 나만 빼고 다 잘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럴 때마다 초라함을 느끼는 네 사람이지만 그럴수록 그들은 서로에게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어준다. 피곤하고 지친 하루 끝에도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이런 게 한집에 산다는 것일까? 이렇게 살면 우리를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아닐까?
소설가 이기호의 말처럼, “그들에게 주어진 당위는 언제나 ‘노오력’이고, 일정한 ‘진폭’의 움직임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대신 서로를 격려하고 관계를 다지며 함께 나아가기를 택한다. ‘오로라 아파트’가 집 없는 그들에게 지붕이 되어주었다면, 한잔 기울이며 속내를 털어놓는 ‘오로라 상회’는 그들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열게 하는 터닝포인트가 된다.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은 청년세대와 기성세대가 한집에 살게 되며 발생하는 갈등과 화해를 현실적으로 그려내어 날 선 지금의 현대사회에서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끝내 우리가 서로의 손을 놓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당구장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다 같이 들어간 날 저커는 울었다. 그날 밤 식구들은 따뜻한 밥상을 차려놓고 둘을 기다렸다. 아니 저커를 기다렸다. 이안과 민용은 마치 엄마 아빠처럼 상에 붙어 앉아 저커가 밥을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저커는 울먹이며 국을 떠먹고, 밥을 뜨고, 고기를 씹다가, 질질 짜다가, 팔목으로 눈물을 닦으며 엉엉 울고 말았다. (……) “이참에 조금 쉬어. 그것도 괜찮아. 인생 길다.” _본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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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에서 강남으로 직진! 월세는 N분의 1
실업자와 공시생, 알바생, 그리고 집 나온 가장과 길고양이의
‘짠’하고 ‘찐’한 좌충우돌 한집 살이
현직 백수인 민용, 졸업을 유예한 공시생 연후, 편의점과 당구장에서 투 잡을 뛰는 휴학생 저커가 다 쓰러져가는 서초동 오로라 아파트에 입주한다. 이게 다 ‘고양이냐, 고시원이냐’의 기로에서 고양이 ‘유로’를 택한 민용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길고양이를 데려다 몰래 돌보다가 고시원 총무에게 들켜 퇴실 통보를 받았기 때문. 이사할 곳을 함께 알아봐주던 연후는 과거 자신이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오로라 아파트의 시세를 우연히 알게 되고, 하우스 메이트를 구해 월세를 ‘N빵’ 하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알바를 하는 당구장에서 그들의 사정을 듣게 된 저커는 민용과 연후에게 하우스 메이트 한 사람이 더 필요하지 않느냐고 묻고, 연후는 두 팔 벌려 환영하며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다. 그렇게 민용과 연후, 저커. 그리고 고양이 유로는 어설픈 동거 생활을 시작한다.
오후의 강남역은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사람이 너무 많다. 노량진 풍경과는 전혀 다르다. 여자들은 지나치게 예쁘고 화려하고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들은 왜 이렇게 바쁠까. 다들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중일까.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사람은 또 왜 이렇게 많은 걸까. (……) 이 거리에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은 없다. 목적지가 없는 사람은 둘밖에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평균 속도에 못 미치는 둘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앞지른다. _본문에서
민용은 어느 날 다 쓰러져가는 아파트 상가에 외로이 불빛을 밝히고 있는 ‘오로라 상회’에 들어가본다. 그곳은 공간만큼이나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주인이 있다. 말도 짧고 어딘가 모르게 매너리즘에 빠진 듯한 얼굴이지만, 민용이 맥주 한잔하며 고민을 털어놓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듯하면서도 결정적 한 방을 날려주어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민용은 그곳에서 이안을 만났고, 셋은 오후가 되면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오로라 상회에서 맥주를 마신다.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편했다. 서로에게 지나친 관심을 갖지도 않고, 쓸데없이 많은 것을 묻지도 않는 사이. 그렇게 민용은 조금씩 오로라 상회에 스며들고, 민용과 제법 가까워진 이안도 ‘하우스 메이트’로 합류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관계란 언제나 가까워질수록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 그들 사이엔 서서히 서운함과 피로감이 쌓인다. 강남 출신이라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환경에서 자란 연후는 돈 한 푼 쓰는 일에 전전긍긍하고 매사 철저하게 계산을 하려고 하는 저커를 이해하지 못한다. 설상가상 공부를 게을리 하는 듯한 연후의 태도에 일갈한 이안의 조언은 잔소리가 되어 연후에게 꽂히고, ‘꼰대’ 소리에 큰소리가 오가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민용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실업급여 수령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연락 오는 회사는 없고, 고양이 유로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고 있다. 마냥 좋을 줄만 알았던 하우스 쉐어. 과연 세대 간, 계층 간의 갈등과 이질감은 극복 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네 사람은 각자의 꿈과 희망을 찾아 이룰 수 있을까.
너무 무람없이 대하는 게 아니었는데. 녀석이 공부를 하든 말든 시험에 붙든 말든 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닿지 않는 사람끼리는 갈등이 없는 법 아닌가.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면 평화가 깨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_본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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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끝에 있는 것이 무엇일지라도
우리가 ‘함께’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소설가 이기호는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을 두고 “거부와 당위의 세계 앞에서 민용과 연후와 저커와 이안은 분노하지 않는다”며 “거창한 윤리나 정치, 시스템”이 아닌 “서로의 관계를 바라”보는 소설이라고 말했다.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바로 관계성이다. 그 관계성은 한집에 살게 된 서로를 둘러싼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사회와 그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으로서의 관계를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상 ‘노오력’ 이외에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하는 냉정한 현실 속에서, 거절과 거부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눈앞에 굳건히 버티고 서 있는 벽에 자주 의기소침해진다. 과연 내가 저 벽을 부술 수 있을까, 저 벽을 넘을 수 있을까. 그들은 단 한순간도 장담하지 못한다. 오히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벽이 얼마나 견고하게 세워진 거대한 ‘성벽’인지 깨닫는다. 하지만 그들은 소극적일지언정 끝까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본인 주변을 둘러싼 관계들에 집중한다. 내가 믿는 사람들, 내가 믿고 싶은 사람들, 내가 의지하고 싶은 사람들, 내게 의지가 되어주는 사람들. 잔잔하지만 담백한 그들의 연대에서 우러나는 다정한 위로를 독자에게 밀어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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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말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철거를 앞둔 강남의 아파트에 세 들어 살고 있지만 철저히 그 세계로부터 추방당한 존재들이다. 추방은 당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당위는 언제나 ‘노오력’이고, 일정한 ‘진폭’의 움직임뿐이다. 그래서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는 ‘무덤에서 감상하는 불꽃놀이’ 같다. 이경란의 장편소설이 기존의 이야기 문법과 다르게 작동하는 순간은 바로 그때부터이다. 그 거부와 당위의 세계 앞에서 민용과 연후와 저커와 이안은 분노하지 않는다. 거창한 윤리나 정치, 시스템을 들먹이며 화해불가능성을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대신 서로의 관계를 바라본다. 각자의 처지와 시간은 다 다르지만, 그 안에서 공통된 질료와 마음을 응시한다. 그리고 그 질료와 마음으로 그들은 함께 움직인다. ‘돌봄’은 다 큰 젊은이에게도 필요하다는 것, 더 많이 가진 자가, 더 높은 자가 하는 것이 아닌, 움직이는 자의 몫이라는 것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 _이기호(소설가)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