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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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하고 날카롭게 벼려진,
우리 도처에 스며 있는 진정한 ‘공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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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칼》 《저주토끼》 작가 정보라 추천
“여성주의 공포소설이라는 장르가 존재한다면
이 작품이 바로 그 대표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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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새로운 감각의 출현’이라는 찬사와 함께 제1회 문학동네대학소설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종산의 첫 번째 소설집이 출간됐다. ‘공포’를 키워드로 한 일곱 편의 소설이 실린 《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은 2022년 서울국제도서전 ‘여름 첫 책’으로 선정되어 지난 도서전 기간 동안 독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신작이기도 하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은 주로 사회적 주체로서의 여성의 관계와 공간, 그리고 외부의 자극(타인)으로부터 발화된 공포를 그리고 있다. 가장 가깝고 긴밀한 관계이지만 때로는 그 누구보다 멀게 느껴지는 존재인 가족과 친구(〈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 〈언니〉 〈커튼 아래 발〉), 일생을 살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인 집과 일터에 도사리고 있는 공포(〈흔들리는 거울〉 〈청소 아주머니〉), 타인의 목소리로부터 발화한 불안(〈혼잣말〉 〈은갈치 신사〉)이 그렇다. 하지만 이것은 커다란 줄기일 뿐, 공포를 토양 삼아 깊게 뿌리내린 일곱 편의 이야기들은 인간의 심연에서 얽히고설키며 공포가 왜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복합적인 사회적 감정인지에 대해 우리 스스로 깨닫게 만든다.
아주 깊게 스며들어 언제든 불시에 찾아올 수 있는 일상의 공포가 지금에 이르러 유독 서늘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러한 일들이 결코 우리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종산은 이번 소설을 통해 삶을 둘러싼 폭력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문학적으로 서사화하고, 나아가 우리가 분명하게 목격하고 경험한 것을 스스로 의심하게 하는 사회적 메커니즘이 무엇인지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그 어느 때보다 비이성적인 불안과 혐오가 만연한 시기. 주변에 산재한 공포를 외면하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내딛을 수 있는 한걸음은 무엇일까?
“진아는 민재의 어깨를 잡아 자기 쪽으로 당겼다. 그의 얼굴이 보였을 때 진아는 흠칫 놀라 눈을 부릅떴다. 남편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 남자의 얼굴이었다. 창백한 얼굴에 이마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젊은 남자.” _〈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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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날 배신했어.
사람의 진심을 짓밟으면 어떻게 되는지
내가 똑똑히 보여줄게.”
책의 문을 여는 첫 번째 작품이자 표제작이기도 한 〈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은 버스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진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술 취한 승객이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으로 삼십대 청년의 머리를 여러 차례 내리친다.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청년은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해당 사건은 다음날 언론에 도배가 된다. 진아는 남편에게 목격자 진술 때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냉정하기만 하다. 밖에서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군인처럼 행동하는 남편. 진아는 사건 이후 죽은 청년의 얼굴이 수시로 떠오르고, 권위적인 남편이 조금씩 거슬리기 시작한다. 귀가하자마자 생활관 체크하듯 집 구석구석 청소 상태를 살피는 눈빛, 학생을 가르치는 듯한 말투, 네가 뭐 잘하는 게 있느냐며 한심해하는 태도. 진아는 어느 순간부터 죽은 남자에게서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편 〈커튼 아래 발〉은 오랜 시간 쌓인 모녀의 애증에 집중하며 한쪽으로 치우친 사랑과 증오가 어떤 파국을 가져오는지를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남편, 끔찍이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이 결국 집착이 되어 집을 떠나버린 아들. 나이가 들어 스스로 거동이 어려워진 지금, 그녀 곁에 남아 있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아주 어린 시절부터 차갑게 내쳐온 딸뿐이다. 휠체어로 다니기 어렵다며 집 안의 모든 문을 떼어버리고 커튼을 쳐둔 엄마는 수시로 벌컥벌컥 커튼을 열어젖힌다. 내내 미움을 받으면서도 엄마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딸에게 언젠가부터 커튼 아래 발이 보이기 시작한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하얀 발. 커튼을 걷어보면 어느새 홀연히 사라지고 없다. 발의 주인은 도대체 누구일까. 그때, 오빠에게서 불쑥 연락이 온다. 엄마가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오빠에게서.
〈언니〉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만나게 된 ‘희수’와 ‘모란’의 이야기이다. SNS상의 누군가를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일이 처음인 희수는 신기하리만큼 대화도 잘 통하고 취향도 맞는 모란에게 호감이 생긴다. 누가 봐도 연예인처럼 아름답고 화려한 모란에게 필연적으로 끌려 희수는 그녀를 만나보기로 하지만,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모란의 집착적인 태도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두 사람은 결국 크게 다툰 뒤 이별하게 되지만, 모란은 희수의 곁에 맴돌며 그녀가 그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한다. 희수의 주변 사람들을 협박하고, 회유하고, 이간질하면서.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희수에게 연락을 해온다. 모란에게서 이상한 인스타 디엠을 받았다고.
“희수는 집으로 들어가서 문을 이중으로 잠그고 집 안 커튼도 모두 닫았다. (……) 오늘 나뭇잎 서점 앞에서 그 애와 마주친 이야기를 해도 그 애가 날 따라다닌다는 생각이 망상이라고 할까? 희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커튼 틈 사이를 응시했다. 창문 너머에 모란이 서 있을 것 같았다.” _〈언니〉 중에서
〈흔들리는 거울〉은 집요한 스토킹을 당하다 결국 가족 모두가 살해당한 현장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화자가 등장한다. 다정하고 단란했던 가족, 그리고 그런 식구들을 감싸 안았던 포근한 집. 하지만 함께 웃고 서로 사랑했던 그곳에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가족들은 피투성이로 난도질당한다. 몇 년이 지난 후 모든 걸 이겨냈다고 생각한 순간, 밤 10시 11분만 되면 집 안에 있는 거울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울 너머엔, 죽은 가족들이 서 있다.
“나는 잔뜩 화가 난 채로 경찰서에서 나왔다.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누구 하나 죽어야만 뭐라도 할 수 있다는 거야? 웃으면서 잘해준 적이 있느냐니. 그럼 내 북토크에 와서 내가 쓴 책을 내밀면서 사인을 해달라는 독자에게 무뚝뚝하게 굴면서 책을 내던지기라도 했어야 한다는 건가?”_〈흔들리는 거울〉 중에서
〈혼잣말〉과 〈은갈치 신사〉는 누군가의 한마디로부터 시작되는 짧은 소설들이다. 〈혼잣말〉은 적막한 밤, 파리의 한 스튜디오에서 “다 너 때문이야”라는 말이 들려오면서부터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나도 모르게 읊조리던 혼잣말이 실은 혼잣말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온몸으로 퍼지는 공포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한편 〈은갈치 신사〉엔 해외여행을 가기 위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으는 학생과 거의 매일 편의점에 찾아와 우유를 사가는 남자가 등장한다. 어느 날 불쑥 “아가씨는 나랑 사는 세계가 다르니까”라고 말하는 그를 보며 그녀는 일순간 기분이 불쾌해진다. 하지만 불쾌함도 잠시, 시간이 지날수록 은갈치 신사가 했던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서늘함에 잠긴다.
“이제 아가씨도 나랑 같은 세계에 살고 있네. 그렇지?”_〈은갈치 신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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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그 어떤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진득하게 남는 삶에 대한 두려움
《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에 실린 소설들은 다양한 형태의 여성-공포 서사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일반적인 단편 분량에 비해 긴 호흡을 보여주고 있는 네 작품은 소설가 정보라의 표현을 빌려 ‘여성주의 공포소설’로 한데 묶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권위적인 남편과 결혼하며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 진아는 빈 쇼핑백에 맞아 사망한 남자에게서 자신의 삶을 투영해 바라보게 된다(〈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 지독한 스토킹에 시달리고 있지만 직접적 상해가 없어 별다른 조치를 취할 수 없다는 말은 ‘스토킹 범죄’가 얼마나 허술한 법망 아래 놓여 있는지를 다시 한번 반추하게 하고(〈흔들리는 거울〉), 자신을 보호해주리라 여겼던 남편의 자살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들에게 집착하는 엄마와 지독한 언어폭력을 감내하면서도 끝내 엄마 곁을 떠나지 못하는―엄마에겐 자신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가진―딸 사이의 애증 또한 기존의 모녀 서사에서 한 층 더 깊이 있는 사유를 하게 만든다(〈커튼 아래 발〉). 특히 퀴어 로맨스와 함께 여성 안에 숨겨진 여성혐오에 대해 그리고 있는 〈언니〉는 앞으로의 여성 서사가 얼마나 더 확장되고 증폭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이 네 작품을 포함한 총 일곱 편의 소설들을 통해 ‘공포’라는 감정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주 작은 불안의 씨앗이 어떻게 거대한 공포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추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엄마의 얼굴이 드디어 크게 흔들렸다. 나는 엄마가 상처받았으면 했다. 되도록 크게 치명상을 입어서 풀이 죽고 고분고분해졌으면 했다. 그래서 나에게 함부로 뭔가를 시키지도 않고, 도움이 필요한 때는 조심스럽게 부탁을 하고, 내가 자기를 위해 뭔가를 해주면 고마워할 줄도 알기를 바랐다.” _〈커튼 아래 발〉 중에서
“당신이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을 읽으며 잠깐이라도 섬뜩함을 느꼈다면, 그것이 당신이 살면서 느끼는 공포와 정확히 같기 때문이라면, 나는 무척 기쁠 것이다. 여기 실린 모든 이야기는 무엇보다 당신의 즐거움을 위해 쓴 것이기 때문이다.” _‘작가의 말’ 중에서
추천의 말
여성주의 공포소설이라는 장르가 존재한다면 이 작품이 바로 그 대표작일 것이다. 여자가 귀신이 되어 산 사람들(주로 남자들)을 겁주는 흔해빠진 공포 이야기가 아니다. 이종산은 여성으로서, 성소수자로서, 약자로서, 사회적으로 무가치한 존재로 취급받으며 살아간다는 것, 차별과 학대를 견딜 의무만 있고 목소리를 낼 권리는 없는 존재로 규정된 채 생존한다는 것에 대한 그 오랜 끔찍함과 슬픔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은 무서워하기보다는 공감하면서, 이해하면서, 혹은 공감하거나 이해하기 싫어서 끔찍해하며 읽게 된다. 다 읽은 뒤에는 깊이 곱씹거나 빨리 잊으려고 노력하거나 둘 중 하나다. 어느 쪽이든, 그 진득하게 남는 삶에 대한 두려움은 다른 어떤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종류일 것이다. _정보라(소설가)
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
흔들리는 거울
혼잣말
언니
커튼 아래 발
은갈치 신사
청소 아주머니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