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 도시 아래 나무 있음!
지하에 묻힌 거대한 토대를 파헤치는 여성 식물학자 얀코의 이야기
‘한국의 움베르토 에코!’ 작가 홍준성 세 번째 장편소설
“한국의 움베르토 에코!” 독자들로부터 찬사를 얻은 소설가 홍준성의 세 번째 장편소설 《지하 정원》이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예스24 크레마클럽을 통해 먼저 독자를 만난 이 작품은 여성 식물학자 얀코가 비뫼시라는 가상의 도시 지하에 ‘똬리나무’라 명명된 거대한 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에 얽힌 비밀을 파헤쳐나가는 파란만장한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비뫼’라는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인간의 정신사를 복원해내고자 하는 작가 홍준성은 한국문학에서는 보기 드물게 거대서사에 도전하는 작가다. 전작 《카르마 폴리스》를 통해서 독자들로부터 “한국의 움베르토 에코”, “천명관의 《고래》와도 같은, 이야기의 거센 파도”, “어마어마한 몰입감. 환상적인 문체”, “혼돈과 허무, 역사속의 사회상을 총 집결해놓은 듯”하다는 평을 받은 바 있으며, 2021년 런던북페어에서 화제의 한국 작가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비뫼시는 소문과 이야기, 음모와 정치, 그 모든 것이 우화적으로 교직된 가상의 도시로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살고 있는 현대의 초상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비뫼시 지하에 ‘똬리나무’라는 생명 법칙을 모조리 어긴 식물의 자리를 마련한다. 여성 식물학자 얀코는 운명을 따라 문명의 기저에 놓인 거대한 토대를 파헤침으로써 비뫼시의 근간에 무엇이 놓였는지를 마주하게 되는데, 이것은 지금 우리의 도시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이성을 통해 세워졌다고 믿어온 인간 문명사의 기저에 무엇이 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촘촘하게 기획된 비뫼시의 모습은 소설적 재미까지 더한다. 작가는 정교한 기획과 묘사를 통해 비뫼시를 독자의 앞에 가져다 놓는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물론 경제적·사회적 문제 제기, 더 나아가 자연과학의 법칙을 넘나드는 활달하고 속도감 있는 문장을 읽을 때 독자는 지적인 쾌감을 느끼게 된다. 장광설과 요설로 가득한 가상의 세계에 속절없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 그러다 문득 그 속에 숨은 생에 의지를 만나는 것,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오랫동안 ‘소설’에 기대해온 바일 것이다. 《지하 정원》은 그런 점에서 소설의 역할을 충실히 담당하고 있다.
“무엇보다 먼저 식물학자로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식물인가?
똬리나무는 생물학의 기본 법칙들을 모조리 무시했다.”
소설은 노년의 얀코가 점차 흐려져가는 자신의 기억의 파편을 적은 쪽지 천여 개와 신문 자료, 정부 보고서 등 비뫼시의 역사적 사료들이 교차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1000개에 달하는 파편화된 얀코의 기억과 비뫼시의 역사 사료는 얽히고설키며 얀코의 파란만장한 일대기와 비뫼라는 세계의 전모를 보여준다.
19 인생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은 스스로의 의지가 닿지 않는 과거의 결과물이자 우연의 덧없는 퇴적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삶이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자아, 그것은 바람에 올가미를 걸어보려는 헛된 사업인데, 종국엔 바닥에 떨어진 끄나풀로만 남을 뿐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20 비뫼시(市) 보안부 제7국에서 발행한 비밀 보고서에 따르면, 이른바 ‘똬리나무’라고 이름 붙여진 괴이하고도 괴이한 식물이 발견된 곳은 지하철 공사 현장이었다. 북쪽 외곽 로벨토가(街)에서 굴착 도중 오래된 동굴과 그 안을 가득 메운 똬리나무들이 발견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50년 전, 기적이 사라진 해로부터 1092년 뒤 4월 7일이었다.
―본문 13쪽
땜장이 두코의 딸인 얀코는 왕가의 폭정에 대항해 벌어진 ‘풀무형제단의 반란’ 때 아버지를 잃고 고아원에 맡겨진다. 난쟁이 참토의 도움으로 영양실조와 유행병 사이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얀코는 프님 남작의 하인 학교에 들어가게 되고, 자신의 유약한 아들을 대신해 대학교 졸업장을 따올 대역을 찾는 세금징수인 닷제의 눈에 들어 그의 집의 하인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녀가 모방해야 할 사람은 닷제의 아들인 비나드로, 비나드 대신 대학에서 식물을 전공한 얀코는 기록을 통해 비뫼시에서 광합성이 필요 없는 나무가 발견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비뫼시의 심장부인 수도 지하에 비슷한 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더하여 오래전, 풀무형제단의 반란 때 정규군이 많은 시민 사상자를 낸 이유가 바로 그 나무, 똬리나무 때문일 수도 있다는 어렴풋한 짐작에 휩싸인다. 한편 자유로운 성정의 비나드는 얀코와 가까워진다. 그러나 행복했던 시기도 잠시. 비뫼시는 다시 한번 무정부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반란에 휩싸이고 이에 대한 강경 진압이 반복되면서 비나드가 속한 ‘늙는 데 실패한 시인들’이라는 문회가 반정부 단체로 몰리게 된다. 비나드의 대역이었던 얀코까지 위험에 처하자 비나드는 얀코를 빼돌릴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다가 죽고 만다.
814 비나드를 태운 삯마차는 약쟁이들의 골목인 펠룸 부두로 갔다. 거기에는 르릴다를 비롯한 무정부주의자 네 명이 매복하고 있었다. 참토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비나드가 도착하기 전에 금속 연마공 하나가 긴급 전보를 들고 달려왔다. 그걸 받아 본 르릴다의 얼굴색이 싸늘하게 변했고 참토는 일이 뒤틀어졌음을 직감했다. 르릴다는 막대형 수류탄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본문 354쪽
도망치듯 도시의 남방한계선에 있는 식물 연구소로 간 얀코는 거기에서 ‘똬리나무’와 비슷한 ‘검은나무’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광합성과 같은 식물의 법칙을 모두 무시한 검은나무는 인간의 생장과 상관없이 무한히 뻗어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것의 핵이 발견된 날, 갑자기 국경 너머로부터 트롤 떼가 몰려오기 시작한다. 아비규환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얀코는 수도로 돌아가 똬리나무를 직접 찾아내기로 마음먹는다.
926 공포보다는 만남이 더 간절했다. 이 정체불명의 공간을 설명해줄 누군가를 붙잡고 싶었다. 유리관 속 똬리나무는 고사가 진행되기 시작한 목본류와 매우 유사했다. 한눈에 봐도 말라비틀어진 껍질들이 일어나고 물관이 메마르면서 모든 잎이 떨어지고 적갈색의 줄기와 꼬투리만 앙상하게 남게 되는 과정. 지금 이 도시의 밑바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본문 399쪽
픽션의 세계로 끌고 들어가는 강력한 힘,
우리가 소설에 기대하는 바로 그것
마치 《레 미제라블》의 한 장면 같은 폭동 장면에서부터 지붕방의 계단참에서 얀코를 기다리는 비나드의 사색에 잠긴 모습까지, 높이 솟은 왕궁의 첨탑에서 노동 계층의 거주지인 북쪽외곽까지, 작가는 정교한 묘사를 통해 가상의 도시 ‘비뫼’의 면면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철학에서부터 경제·사회를 망라하며 내달리는 문장들은 독자를 이 낯선 도시 한복판으로 속절없이 빠져들도록 이끈다. 픽션의 세계로 끌고 들어가는 강력한 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소설에 기대하는 것이 아닐까? 그 강한 힘에 이끌려 책장을 넘기다 보면 문명사에 대한 깊은 고찰, 인간 존재를 향한 묵직한 질문 그리고 이야기의 재미를 발견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재미있다. 얀코의 회상을 따라 함께 걷다 보면 독자는 비뫼시의 면면을 파악하고 왕궁에 숨겨진 음모와 귀족들의 담합에 분노하게 된다. 부록처럼 이어지는 비뫼시의 사료들과 얀코의 기억이 맞아 들어갈 때 짜릿한 쾌감을 느끼고, 얀코가 똬리나무를 추적하기 위해 어두운 지하역으로 걸어 들어가는 데에서는 손에 땀을 쥐고 함께 어둠 속을 응시하게 될 것이다. 모든 이야기가 모여지는 비뫼시, 그곳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안쪽에서부터 썩어 들어가는 거대한 왕궁과 오랫동안 이어진 찬란한 문명의 붕괴, 비참한 삶, 생의 허무와 그 속에서 살아내는 인간의 모습, 그리고 기꺼이 그 어둠을 마주하는 개인의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잠시 잊었던 이야기의 재미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 본문에서
22. ‘똬리나무’는 정식 학명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또한 공식적으로 그런 나무는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현장에 있던 조사대원 중 하나가 ‘밑바닥에 이런 게 똬리를 틀고 있었네!’라고 말한 것이 어쩌다보니 이 괴생명체의 이름처럼 굳어진 것일 따름이다. 제7국—참고로 보안부의 공식 부서는 제6국까지이다—에선 이 나무를 서류번호 504호라고 불렀다.
23. 무엇보다 먼저 식물학자로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식물인가? 마치 물푸레나무를 연상시키는 넓은 잎사귀가 있되 그 색감은 거뭇했고, 몸통은 생강처럼 뿌리줄기로 뻗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괴이한 것은 햇볕이 없는 동굴 속에서 어떻게 이렇게 거대한 규모로 자라날 수 있었느냐는 점이었다. 똬리나무는 생물학의 기본 법칙들을 모조리 무시했다.
170. 기밀 문건들 중에선 놀랍게도 비뫼시에 대한 첩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건 적대국의 동맹국의 적대국의 동맹국의 적대국의 바로 그 동맹국의 약점을 갖고 있는 건 언젠가 유용하리란, 복잡하고도 지난하게 서로 물고 물리는 국제적인 정보 전쟁의 불가피한 결과물이었다. 1092년 주 비뫼시 대사관에선 느낌표까지 붙은 전보를 보냈었다: 도시 밑에 나무가 있음!
530. 똬리나무, 이리저리 뒤엉킨 그 뿌리들이 정말로 도시를 떠받치고 있었던 비밀스런 토대라면, 그것은 참으로 짓궂은 일이었다. 그 나무는 나를 시체 벌판 속으로 내다버린, 송두리째 빼앗고서 아무렇게나 방치했던, 차갑고 배고프며, 또한 외롭고도 외롭기만 했던 세계, 바로 그 세계를 지탱하고 있었던 것이니 말이다: 그건 정녕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을까?
736. 밤엔 그림자가 없다. 복된 일이다. 혹자는 그림자를 두고 빛의 얼룩이라 했지만, 그건 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고백에 불과하다. 빛이야말로 어둠의 얼룩인 까닭이다. 태양, 그 영원한 불꽃 앞에 진절머리가 난다. 불멸의 권태를 먹고 자란 나무들이 깊숙이 뿌리 뻗어 똬리를 틀고 세계를 동여맨다. 그러나 심장은 어둠 속에서 뛰고, 또한 그곳에서 멎는다. 나는 삶이다.
지하정원 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