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

김이설

브랜드 은행나무 | 발행일 2023년 10월 31일 | ISBN 9791167373649

사양 변형판 128x188 · 156쪽 | 가격 12,000원

분야 국내소설

책소개

* 은행나무 노벨라가 은행나무 시리즈 N°’으로 새롭게 시작합니다.

2014년 론칭해 2016년까지 총 13권을 출간하고 잠시 멈춰 있던 은행나무 노벨라 시리즈가 새로운 명명과 지금 이 시대를 대표하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으로 다시 출간됩니다. 배명훈 최진영 정세랑 안보윤 황현진 윤이형 문지혁 등 3~4백매 분량의 중편소설 시리즈로 한국문학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던 ‘은행나무 노벨라’. 그 의미를 동력 삼아 현재 한국문학 장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젊은 작가들의 장편소설선 ‘시리즈 N°’으로 바통을 건네받아 이어갑니다. 이번 신작 3종(박문영, 장진영, 황모과)을 비롯해 구간 리커버(최진영 윤이형 황현진, 이하 순차적으로 리커버)를 동시에 출간하며 서이제 장희원 한정현 정용준 정지돈 등 각자의 개성과 상상력이 담긴 작품들을 선보일 계획입니다. 문학에서 발견하는 그 위태롭고 무한한 좌표들로 한국문학의 새로운 지도를 완성해갈 시도를 독자 여러분께서도 함께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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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
언제 우리가 그 여자를 눈여겨본 적이 있었던가?

한낱 먼지와 같은 존재의 우수, 가장 따갑고 아린 상처를 말하다

김이설 소설 《선화》
은행나무 시리즈 N° 리커버 출간

「선화」는 외형적으로 드러난 흉터로 인해 가족과 불통하게 된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담담한 문체와 사실적인 이미지들로 조형해내고 있는 소설로, 지울 수 없는 흉터를 안고 삶을 견뎌내고 있는 핍진한 일상이 전부인 여자 선화의 삶을 통해 외형적 상처와 흉터가 우리 삶의 내면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진지하게 조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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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란 그렇게 분명한 표식으로 그 흔적을 남기는 법

이 소설은 ‘선화’의 일상을 조심스럽게 밟아가면서 시작된다. 그녀의 하루하루가 보여지고 그녀의 건조한 일상이 소개되며 그 일상에서 벌어지는 아주 작은 틈에 과거가 포개진다. 선화에 대해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면서 소설 페이지는 한 장 한 장 넘어간다. 책의 마지막 장을 다 넘겼을 즈음 우리에게 흐릿했던 선화의 모습이 조금은 뚜렷해질 것이다. 일단, ‘선화’를 소개해야겠다.

선화의, 오른쪽 얼굴엔 꽤 넓고 짙은 얼룩이 있다. 그래서 바깥에 나설 때에는 언제나 모자를 쓴다. 걸을 때에도 항상 고개를 숙여 땅만 쳐다본다.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지 않더라도 상관없이 그녀의 시선은 늘 아래다.

선화는 꽃을 만진다. 꽃집을 운영한다. 그래서 열 손가락은 늘 젖어 있어 수시로 껍질이 벗겨지고 진물이 끊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 가장 아름다운 꽃, 들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선화는 흉터로 인해 여자로서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산다. 화장품이나 옷을 사러 가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고, 호감 가는 이성에게 고백해본 적이 없으며, 행복이라든지 결혼, 혹은 희망이나 미래 같은 단어를 상상해본 적이 없다. 그녀는 여자로서 누리거나 즐길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한 지 오래다. 누가 포기하라고 혹은 단념시키지 않았는데도 선화는 어려서부터 그 얼룩 때문에 보통 여자의 삶을, 욕망을 꿈꿀 수 없었다.

내 얼굴을 내 손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오른손으로 내 오른쪽 얼굴을 칠 때마다 내가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제발 이 자리에서 사라지게 해달라고 빌었다. 짝, 짝, 짝, 짝, 소리가 반복될수록 짝, 짝, 짝, 짝, 감각은 무뎌지고 짝, 짝,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멀리 언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느샌가 엄마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흔드는 것 같았지만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절망스러웠다. 그렇게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_본문에서

그녀의 가족은 어떻게 생각하면 최악이고 또 달리 보면 주변에 흔히 존재하는 가족이기도 하다. 행운보다는 불행 쪽에 한 발 먼저 디딘 채 살아가는 이들. 불행이 오고 또 불행이 온다. 불행의 중첩이 자연법칙인 듯 삶을 살아내는 이들에게는 삶에서의 뜻밖의 행운도 없고 동정도 없다. 오직 적나라한 삶에 대한 직시와 생존의 문제만 있을 뿐.

아버지는 평생, 나에게, 내 얼굴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다. 괜찮다는 거짓말도, 참고 살 수밖에 없다는 진실도, 하다못해 그딴 건 중요한 게 아니라는 허풍조차 떨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되었다. 당신이 만들어놓은 자식이므로 적어도 한 번쯤은 미안하다고 말해줬어야 했다. _본문에서

선화에게, 사랑은 어느 날, 꽃집에 한 남자가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처음엔 꽃잎만을 사간 남자 영흠. 그 남자는 꽃잎을 사간 뒤로 매일매일 선화의 꽃집에서 꽃을 사간다. 어느 날은 다발을 또 어느 날은 몇 송이의 꽃들을 사간다. 그런 남자에게 선화는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또 그 남자의 목덜미에 있는 상처를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오랜만에 남자의 내밀한 삶이 궁금해진 선화는 영흠의 상처의 내력이 궁금하고 또 그의 삶이 궁금해진다. 그 사람의 마음보다 상처에 더 눈길이 가는 선화. 상처를 가진 것들은 상처를 겪은 것들을 한눈에 알아보는 법. 목덜미의 상처가 다 아물었는지 혹은 어떤 모양의 흉터로 남았는지 그러면서 그 피부의 촉감은 어떤지와 같은. 흉터의 내력을 알고 싶고 또 이해하고 싶은 욕망.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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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어떤 일이 닥쳐도 이겨낼 만한 내성이 생겼다는 것

선화에게, 희망은 상처가 저절로 아물었으면 그냥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괜히 상처를 치료한답시고 후벼파 흉터를 크게 만들지는 말자는 것. 이건 그녀가 스스로 터득한 지독한 삶을 견뎌내는 치료법이었다. 누구나 상처가 있다. 상처는 딱지가 내려앉아 흉터가 된다. 흉터는 상처의 기억을 반추하지만 삶 전체를 흔들 수는 없는 것이다. 선화의 오른쪽 얼굴에 뿌리내린 나뭇가지 같은 상처는 그녀의 지독했던 시절의 시간들을 호출한다. 하지만 이제 선화는 다짐한다. 남은 인생도 이대로 살겠다고. 이제까지가 힘겨웠을 뿐이라고 말한다.

누구든 상처가 있다. 상처에서 흐르던 피가 굳고 딱지가 내려앉고, 딱지가 떨어진 자리에 솟은 새살이 바로 상처를 반추하게 하는 흉터였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흉터를 유심히 관찰하곤 했다. 어쩌다 그랬을까 상상하기도 하고, 아물기까지 얼마나 걸릴 지 혼자 추측해보기도 했다. 때로 커다란 흉터나, 흉하게 일그러진 흉터를 보면 나도 모르게 안도가 되기도 했다. 세상에 나만 흉터가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_본문에서

목차

진물 … 007
화염상모반 … 037
후회 … 070
자국 … 093
절화 … 110
새살 … 133

작가의 말 … 144

작가 소개

김이설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열세 살〉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오늘처럼 고요히》 《잃어버린 이름에게》 《누구도 울지 않는 밤》, 경장편소설 《나쁜 피》 《환영》 《선화》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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