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사람들
“19세기 만화경에서 찾아낸 21세기 우리의 자화상”
‘보스턴 결혼’의 유래가 된
헨리 제임스의 중기 대표작 국내 초역
근대 영미문학의 대표 작가 헨리 제임스의 《보스턴 사람들》(1886)이 국내 처음 출간된다. 여성 참정권 운동이 일어난 19세기 보스턴을 배경으로, 세 남녀의 기이한 삼각관계를 통해 격변하는 시대의 초상을 그려낸 작품이다. 당대에는 보스턴이 품었던 진지한 열의를 희화했다고 비판을 받았으나, 이후 혼란스러운 시대를 사실적으로 관조했다는 평가와 함께 그의 중기를 대표하는 실험적 소설로 남았다. 아울러 ‘보스턴 결혼’(돌봄과 연대감, 로맨스가 가미된 두 여성 간의 관계)의 유래로도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많은 진보적 논의가 쇠퇴하는 오늘날 더욱 의미 깊게 다가오는 문제작을 이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세 남녀의 기이한 삼각관계로 그려낸
격변하는 시대의 초상
둘 사이에 잠재된 그 모든 불협화음에도 식사는 아주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막바지에 다다르자 그녀는 그에게 식사를 마치고 나가봐야 한다며 혹시 동행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친구 집에서 열리는 소소한 모임에 가는 것으로, 친구가 ‘새로운 사상에 관심을 가진’ 몇몇 사람을 퍼린더 여사에게 소개하는 자리라고 했다. (…) “토론을 듣게 되실지도 몰라요, 그런 걸 좋아하신다면. 아마 찬성하지 않으시겠지만.” 이렇게 덧붙이며 그녀는 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렇겠죠―전 만사 반대하는 사람이니까요.” 미소와 함께 자기 정강이를 만지작거리며 그가 말했다.
“당신은 인류의 진보를 바라지 않나요?” 미스 챈설러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글쎄요. 진보적인 것을 본 적이 없으니까요. 저에게 좀 보여주실 건가요?”
_3장 중에서
소설은 세 명의 남녀 주인공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미시시피 출신의 변호사로 남북전쟁 참전자이자 보수주의자인 베이질 랜섬이 먼 친척이자 여성 참정권 운동가 올리브의 초대를 받아 보스턴에 온다. 그는 이곳에서 여성의 권리에 대해 연설을 하는 버리나를 만나고 한눈에 반한다. 반한 것은 랜섬만이 아니었다. 올리브 역시 그녀가 이 운동의 첨병에 설 수 있음을 한눈에 알아본다. 버리나의 열띤 청혼자들, 그녀를 트로피처럼 내세운 부모를 피해 올리브는 버리나를 데리고 유럽으로 향할 결심을 하고 랜섬은 뉴욕으로 향한다. 시간이 흘러 올리브가 이제 대의를 위한 전진만이 남아 있다고 믿던 어느 날, 랜섬이 보스턴에 돌아온다.
20세기 모더니즘의 원형을 제시한 헨리 제임스의
실험적 시도가 담긴 중기 대표작
19세기 사실주의를 이끌었으며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원형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 헨리 제임스는 이 작품에서 정치적 혼란과 가치관의 충돌을 세밀한 심리묘사와 위트로 남아냈다. 여러 희곡을 쓰는 등 실험적인 시도를 거듭하던 중기에 쓰인 작품으로, 그의 소설 중 드물게 정치적 주제를 전면에 내세워 페미니즘과 사회 개혁에 관해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한 전작이자 대표작인 《여인의 초상》(1881)에 비해 확연히 개인의 의식에 집중하는 글쓰기로, 헨리 제임스의 사실주의에서 모더니즘으로의 이행이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보스턴의 인도적 열망을 희화한 소설”
VS “영어로 쓰인 가장 뛰어난 두 소설 중 하나”
제임스는 진보와 개혁의 성지로 꼽히는 보스턴을 배경으로, 남북전쟁의 상흔과 영광을 나눠 가진 전후 세대의 욕망, 갈등, 분투를 숨 가쁘게 담아낸다. 세상을 바꾸려는 이들은 무엇을, 왜, 어떻게 열망하고 성취하고 또 좌절하는가? 세상은 어떻게 변화하고 또 변화하지 않는가? 서사의 고비마다 요동치는 이런 심오한 질문들이 로맨스 플롯과 교차함에 따라 《보스턴 사람들》은 때로는 전환기 미국사의 아카이브가 되고 때로는 흥미진진한 구애의 멜로드라마로 읽히고 또 때로는 불꽃 튀는 페미니즘 공론장으로 변모한다. _해설 중에서
《보스턴 사람들》은 당대에는 혹평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존 인물을 연상케 하는 작중인물과 보스턴이 품었던 인도적 열망을 희화했다고 비판받은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는 19세기 말에 일었던 페미니즘과 사회 개혁의 움직임을 사실적으로 관조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그의 중기를 대표하는 실험적 소설로 남았다. 1991년 옥스퍼드판의 해설을 쓴 케임브리지 클레어칼리지 연구원 R. D. 구더는 이 책을 “도금 시대 미국 이상주의가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한 분석”이라고 설명했고, 문예평론가 F. R. 리비스(1895~1978) 역시 이 책을 오직 헨리 제임스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 극찬하며 “영어로 쓰인 가장 뛰어난 두 소설 중 하나, 다른 하나는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 이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입체적 캐릭터들로 완성한 19세기의 디오라마,
후퇴하는 시대에 전진을 열망하는 시대를 읽는다는 것
작품 속에는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올리브는 남성을 하나의 계급으로 인식하고, 계급 투쟁으로서 여성 운동에 몸담지만, 한편 선민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면모를 보인다. 랜섬은 남북전쟁 패전의 상흔을 간직한 남부 출신의 보수주의자로서, ‘시대가 너무 여성화되어가고 있다’고 성토하지만 논지의 맥락이 잡히지 않는다. 버리나는 올리브를 선망하며 그녀와 함께 일을 도모하지만,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여성의 삶에 안주하는 올리브의 언니를 동경한다. 이 밖에도 진보와 사이비 종교가 기묘하게 결합된 버리나의 부모, 연금 없는 삶에 묶인 노년의 사회운동가 등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캐릭터를 통해 시대의 변화에 뒤따르는 혼돈과 모순을 풍부하게 담아냈다.
“진보의 흔적이 바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진보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점을 저는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훨씬 앞으로 더 나아가야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해냈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되돌아보고야 저도 알 수 있네요. 내가 젊었을 때는, 사회는 아직 절반도 눈을 뜨지 않았었다는 것을요.”_38장 중에서
또한 《보스턴 사람들》은 한 시대에 관한 깊은 통찰을 넘어 현재와 공명한다. 많은 진보적 논의가 후퇴하고 있는 지금,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혐오와 반목의 깊이가 150년도 더 된 것임을 확인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다만 ‘역사는 반복된다’는 확인에 그치지 않는다. 등장인물인 미스 버즈아이가 ‘되돌아보니 이만큼 진보해왔다’라는 소회를 밝히듯, 제자리걸음을 하는 듯하는 오늘날도 진보의 결과물임을 깨닫고, 그렇기에 더 나아갈 수 있음을 긍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 담긴 연대하는 여성의 삶이 ‘보스턴 결혼’이라는 불멸의 이름을 얻은 것 또한 의미가 깊다. 19세기 만화경을 통해서 바라본 21세기 자화상과도 같은 책이다.
1부
2부
3부
해설-조선정(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옮긴이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