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여성의 일상
남성 중심 역사의 행간에 숨은
여성의 삶과 주체성을 복원하다
오랜 시간 민간에서 소장해온 일기와 편지 등의 사료를 발굴‧번역해온 한국국학진흥원 인문융합본부가 ‘국학자료 심층연구 총서’ 제28권 『조선 여성의 일상』을 출간했다. 조선은 부계 중심으로 가족을 구성해 ‘대’를 잇는 것을 중시하고 공적 역할을 대부분 남성이 수행하는 사회였다. 때문에 조선의 역사는 주로 정치를 좌우하는 남성들 이야기를 중심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현대와 마찬가지로 조선 사람들에게도 국가의 정치나 관아의 행정처럼 공적인 문제보다는 집안의 대소사와 인간관계 같은 사적인 영역이 그 이상으로 중요했으며, 그 사적인 삶의 중심에는 바로 여성이 있었다. 『조선 여성의 일상』은 일기, 편지, 유서, 노래, 병록 등의 사적인 문헌과 소송·청원 문서, 족보 등의 공적 문헌을 바탕으로 남성 중심의 역사에 가려진 여성의 삶을 복원하려는 시도이다. 부계 중심의 가족 구조에서도 여성은 가계계승이나 혼인 등 가족 내 사안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가족들의 관계나 돌봄에서 주체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여러 연구자가 치밀한 연구 끝에 복원해낸 조선 여성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가부장제 사회의 ‘숨은 모권’을 찾아내다
-가족관계의 버팀목, 가족 대사소의 결정권자
아직까지도 종종 쓰이는 ‘출가외인’이라는 말은 조선시대 유교 문화의 잔재일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일기 자료를 보면 혼인 뒤에도 신부가 일정 기간 친정에서 사는 관행이 남아 있거나, 수시로 친정에 오고가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양반 남성이 외가 친척과 자주 왕래하며 도움을 주고받았고, 외조부를 부양한 사례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남성을 중심으로 한 공적인 친족 제도와 달리 실생활에서는 가족 내에서는 여성과 그 친족과의 관계가 중요했으며, 특히 가족간의 유대감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여성의 역할이 컸다.
나아가 집안의 연장자 여성은 남편이 집을 비웠을 때 집안의 질서와 안정을 책임지기도 했다. 장남을 비롯해 모든 자녀에게 어머니로서 확고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가계의 후계자 선정에서 실질적 결정권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가계를 계승할 수 있는 것은 남자였지만, 자신의 혈통이 대를 잇게 만들기 위해 어머니와 할머니 등이 각종 사회 제도와 법률, 사회적·정치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비록 연장자 남성과 대등한 지위를 얻고 그 정도의 권한을 가질 수는 없었지만,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 아래에서도 모권은 사라지지 않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 분명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공적 기록의 틈새에서 찾은 여성의 삶
-조선시대 여성의 생애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
대를 잇는 것을 중시한 부계 중심의 사회이니만큼, 족보는 조선의 중요한 데이터였다. 비록 남성을 중심으로 기록되었지만, ‘아내’로서라도 여성의 정보도 일부 남아 있었다. 주로 생몰년, 자녀 정보를 기록했는데, 이를 통해 유추한 기혼 여성의 평균 수명과 자녀 수로 여성의 생애를 짐작해볼 수 있다. 또한 열행(烈行)이나 정려(旌閭) 등 유교사회에서 부여받은 젠더적 역할에 관한 기록도 일부 남아 있다.
족보가 아내, 며느리로서의 여성에 관한 정보만을 담고 있다면, 보다 생생한 이야기는 조선시대의 진료 차트라 할 수 있는 ‘병록’에서 발견된다. 병록에는 환자의 성별과 연령, 개인의 선천적 기질이나 본래의 건강 상태, 병력, 월경 및 출산 정보, 환자의 증상, 처방문 이외에 의원이 특기할 만한 사항 등 개인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담겨 있다. 즉 여성 개인의 생애가 사실적으로 담겨 있는 소중한 자료인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 의학이 여성의 몸을 이해하는 방식을 살펴볼 수 있는데, 여성 질병의 첫 번째 원인을 ‘음기’라는 성질 그 자체로 보고, 그다음 원인으로는 ‘감정’을 꼽았다. 여성은 남성보다 감정이 지나치게 많아 몸의 기를 다스리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보았으며, 이로 인해 몸이 약해지고 질병에 든다고 보았다.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 시선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조선의 ‘역사’는 남성 중심의 이야기지만, 조선시대 민중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기록으로 남은 것은 공적 ‘역사’뿐이기에, 우리는 사료의 빈틈을 파고들어 여성의 삶을 그려내는 수밖에 없다. 『조선 여성의 일상』은 그 역사의 틈새를 조금 더 확장하고 미래를 도모하는 책이다. 퍼즐 조각을 맞추듯 여성의 삶을 조금씩 알아가고 연결 짓는 작업을 통해 우리 역사를 새롭게, 또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책머리에
1장 조선 후기 어느 경상도 양반 남성의 외가 왕래와 그 정서
머리말 | 노철의 가족과 처세 | 노철의 어머니와 외가 | 외조부와의 왕래와 봉양 | 외가에 대한 정서 | 맺음말
2장 불안한 현재, 익숙한 과거 :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오륜가라』 소재 가사 <오륜가라>의 창작 목적과 그 의미
머리말 : 현재적 과거 | 『오륜가라』의 서지적 특징 | <오륜가라>의 향유자 | <오륜가라>의 창작 목적과 그 의미 | 맺음말
3장 할머니의 선택 : 17세기 가계계승 분쟁 속 연장자 여성의 권력
머리말 : 조선시대 할머니, 왜 주목해야 하나? | 황여일 처 전주 이씨의 결혼과 가족 | 후계자를 둘러싼 갈등과 선택 | 첩손·차남의 반발 | 파국, 골육정의를 헤아리지 않고 법대로 | 조선시대 연장자 여성, 그리고 모권母權
4장 족보 속 여성 정보로 본 조선시대 여성의 삶 : 『안동김씨세보』를 중심 으로
머리말 | 여성 정보, 한국 족보의 특징 | 족보 데이터의 구성과 여성 정보의 특징 | 족보 데이터로 본 여성의 생사와 출산 | 맺음말
5장 병록病錄으로 본 여성의 질병과 의료 일상
병록,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조선의 ‘진료 차트’ | 병록의 개념과 특징 | 조선 사회가 여성의 몸을 읽는 방식 |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병록 현황 | 양반 여성의 질병과 의료 일상 | 조선 (여성)의료사 연구와 병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