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를 예감하지만 그것이 언제, 누군가에 의해,
어떤 식으로 일어날지 예상할 수 없다.”_장강명(소설가)
황정민·윤아 주연 JTBC <허쉬> 원작 소설가 정진영 신작 장편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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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은밀한 권력 시스템과 그 폭력성을 다룬 소설 《침묵주의보》를 통해 한국 사회의 비리를 폭로하고, 동조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평범한 사람들의 심리에 천착했던 작가 정진영. 2018년 또 다른 대형 사회파 소설가의 등장을 알렸던 그가 기자 출신다운 날카롭고 명징한 시선으로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를 낱낱이 파헤치는 신작 장편소설 《젠가》로 돌아왔다.
《젠가》는 기업과 언론 간의 긴밀한 유착 관계, 공공연한 접대 문화와 위계를 이용한 상사의 성추행, 문제가 발생하면 일단 덮는 데 혈안이 된 사회 시스템 등 우리 사회 곳곳에 포진되어 있는, 하지만 은밀하게 숨겨져 있어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지뢰 같은 비리들을 영리하게 고발하는 소설이다. 배경은 가상의 중도시 고진. 도시의 규모에 비해 큰돈이 오가는 곳. 이곳에 위치한, 전선 업계에서는 나름의 탄탄대로를 걸어온 내일전선은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 미래전선의 계열사이다. 하지만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언론사 기자들마저 쩔쩔매게 하는 권력과 자본을 가지고 있고, 업계 최고의 연봉을 자랑하는 이곳도 실은 그리 화려하지만은 않다. 대놓고 남성 직원들을 우대하는 사내 분위기, “고진에서 태어나 고진에서 학업을 마친 사람이 조직에 충성할 확률이 높다”는 다소 뜨악한 이유로 ‘고진 순혈주의’를 은밀히 수행하고 있는 임원들. 하지만 부당함의 온상인 그들의 순결한 제국에도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 정진영은 치밀한 취재로 정교하게 쌓아올린 ‘젠가’ 위에 입체적이고 현실적인 인물들을 배치해 한 편의 살아 있는 부조리극을 완성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거대 조직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연대하고 일상을 지킬 힘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나아가 한 회사에서 시작된 부조리가 결국 한국 사회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정밀하게 고발하며 ‘부조리의 부조리’를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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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보이지 않는 권력의 피라미드
그 위로 드리워진 선명한 위선의 그림자
고진시에 본사를 두고 있는 ‘내일전선’은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 ‘미래전선’의 계열사이다. 내일전선은 일명 ‘고진 순혈주의자’인 고종석 대표이사가 사장으로 취임한 뒤 사내 주요 보직을 모두 고진시 출신으로 물갈이한다. 고진고, 고진대를 나온 사람들은 그들 사이에서 ‘성골’로 분류됐고, 로열패밀리란 이유로 등에 날개라도 단 듯 초고속 승진을 보장받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울 소재 명문대 타이틀이 오히려 승진에 걸림돌이 되어버리는 상황. 이러한 불합리한 관행 탓에 내부에선 말이 많지만, 절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회사 감사팀마저 그들에게 좌지우지되는 곳이 바로 이곳, 내일전선이기 때문이다.
고종석은 중간관리직 시절부터 비슷한 역량을 갖춘 직원들이 있다면 철저히 고진 출신 직원을 우대해 사내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고종석이 신입사원 면접에 참여했던 어느 해에는 고진 출신이 아닌 지원자가 단 한 명도 합격하지 못하는 전설 같은 일도 벌어졌다. (……) 고종석이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갈 때마다 그를 따르던 직원들도 함께 승승장구하며 결속력을 다졌다._본문에서
내일전선의 차기 경영지원부문장으로 가장 강력하게 떠오르고 있는 사람은 경영지원팀의 ‘성골’ 윤현종 부장. 하지만 그의 부하직원 이형규가 신입 직원을 성추행한 사실이 드러나자 인사평가에 큰 타격을 입는다. 후보로 함께 거론되고 있는 ‘진골’ 김호열 부장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다. 그는 부하직원 서희철 과장이 오발주 건으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 휘말릴 상황에 놓이자 그에게 사비로라도 배상금을 메꿔놓으라고 종용한다. 하지만 김호열의 요구가 부당하다고 느낀 서희철은 사내 노동조합 게시판에 익명으로 고발성 글을 올리고, 이에 난처해진 김호열은 자신의 돈으로 우선 배상금을 낸 뒤 서희철의 뒤를 치기 위해 경영지원팀 이형규 차장에게 그의 횡령 혐의에 대한 뒷조사를 지시한다. 한편, 신입사원 성추행 건으로 자택대기발령 징계를 받은 이형규는 회사로 복귀하기 위해 김호열 부장의 찝찝한 제안에 응한다.
그는 자신이 한때 꿈꿨던 미래를 되새겨봤다. (……) 그 자리에서 몇 년 더 일하면 로열패밀리를 따라 자연스럽게 임원을 달고, 운이 좋으면 사장까지 해먹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형규는 이 모든 미래가 불과 단 며칠 만에 사라지고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자신의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_본문에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욕망. 상대를 밟아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어리석은 사명이 그들로 하여금 추악한 현실 속 또 다른 지옥의 문을 열게 만든다. 서로에게 집어삼켜지는 사람들. 그러나 파국은 그보다 더 맹렬한 형세로 그들을 향해 직진해 온다. 그러던 어느 날, 내일전선과 악연이 있는 고진시 일간지 〈고진매일〉의 기자 김진원을 통해 누구도 예상치 못한 대형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상황이 급박해진 내일전선은 광고비 명분으로 신문사 윗선을 협박해 기자들의 입을 막으려 하고, 사람들은 그 와중에도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전전긍긍하며 상황을 전복시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버리는 놈 따로 있지만, 치우는 놈도 따로 있어서 굴러가는 게 세상이잖아요. 안 그래요, 어르신?”_본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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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조직 안에서
우리는 연대하고 일상을 지킬 힘을 얻을 수 있는가
욕망이 만들어낸 도시 고진. 기성세대이자 내일전선에 뿌리내리고자 하는 로열패밀리들의 마음엔 더 높은 곳에 오르고자 하는 욕망이 도사리고, 끝내 서울에 정착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밀려 내려온 청년들은 경력을 쌓아 다시 서울로 올라가겠다는 목표를 동력 삼아 부단히도 몸부림친다. 남고자 하는 자와 떠나고자 하는 자들의 마음은 계급의 피라미드 위에서 스파크를 일으키며 상충한다. 부조리는 도처에 있고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부당하고 위선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고발하기보다는 귀를 닫고 눈을 감는 것을 선택한다. 견고하게 쌓아올린 젠가도 하단부 블록이 하나씩 빠지기 시작하면 위태롭게 흔들리는 법. 온전치 못한 부품을 달고 돌아가는 톱니바퀴가 어긋나는 순간, 조직의 붕괴 또한 운명적으로 따라붙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가오는 종착역이 파국임을 알면서도 쉽게 하차하지 못하고, 결국 불가항력적 침묵을 선택한다. 그 침묵의 도시에서 더욱 공고하고 견고한, ‘기업’이라는 하나의 제국이 완성되는 것 아닐까.
소설가 장강명은 《젠가》를 두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제 갈 길을 묵직하게, 동시에 속도감 있게 달”리는 소설이라고 말하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고 “한 회사, 한 도시, 결국에는 한국 사회를 뒤덮은 부조리를 정밀하게 고발한다”라고 평했다. ‘고진 순혈주의’를 표방하며 지연과 학연으로 세워진 자신만의 성을 지키려는 고종석 사장, 신입사원 이나라를 성추행한 뒤 “키스한 것은 맞지만 강제는 아니라”며 재기를 노리는 나오는 이형규 차장, 전 연인 이형규에 대한 복수심에 그가 이나라에게 강제 키스하는 장면을 촬영한 뒤 사내 채팅방에 올려버린 강영초 대리, 그런 강영초의 행동을 용기 있다 치켜세우면서도 승진을 가장해 좌천시켜버리는 인사팀, 횡령 정황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서희철 과장……. 정진영은 이렇듯 인간의 욕망에서 발아한 온갖 부조리들을 ‘고진시’라는 가상의 도시에 부려놓고 ‘현대판 골품제’ 위에 오른 을(乙)들의 밀도 높은 직장 활극을 완성했다.
진앙 7
균열 25
피아 51
단서 75
반격 114
재반격 149
비등점 183
파국 222
윤회 241
작가의 말 260
참고문헌 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