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벌어질 모든 우연에
덫을 설치한 겁니다.”
상상력의 빈곤을 자책하게 만드는 기묘한 설정과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놀라운 이야기
한국 최초 대거상 수상 작가 윤고은 신작 장편
국내 출간 전 영미권 수출, Scribe출판사 출간 확정!
윤고은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상상력으로 현실을, 작금의 현실 속에 자리하고 있는 부조리함에 대해 과감하고 유쾌하게 소설작업을 이어왔다. 대개 그의 글에서 현실을 감각적으로 풍자하는 마음이나, 소설로 현실을 재해석하는 방법에 대해 갸웃거리는 독자들에게 그녀는 명랑하게 혹은 친밀하게 자신의 문학을 소개했고, 소설의 언어를 무기 삼아 현실의 불편한 삶의 이해와 다채롭게 다각화된 일상을 자신만의 세계로 구축했다.
이번에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출간된 장편소설 《불타는 작품》은 작가로서의 윤고은에게 필모그래피의 분기점이 될, 스스로의 당위에 천착하고 꼭 써야만 했던 필연적인 작품이라 말할 수 있겠다. 문학잡지 《악스트》에서 연재를 마치고 1년 동안 수정과 탈고를 거쳐 출간된 《불타는 작품》은 예술가에게 있어 예술과 작품 사이의 ‘관계’에 대한 희비극적 성찰과 블랙코미디적 이야기 전개, 작품을 불태우는 파괴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작품의 가치와 작가의 위상이 올라가는 자본주의 역설에 대한 고발 등 지금 이 시대의 예술작품에 대한 진정한 의미에 대해 묻는다.
소설집 《1인용 식탁》 《알로하》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 장편소설 《무중력증후군》 《밤의 여행자들》 《해적판을 타고》 《도서관 런웨이》 등으로 자기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온 윤고은의 신작 장편소설 《불타는 작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예술 작품들의 창작과정과 불태워져야지만 최고의 작품으로 둔갑되는 그 순간들을 윤고은 특유의 깊고 섬세한 통찰로 만나보게 되었다.
이제 모든 것은 로버트, 그 개가 설명할 겁니다
소설은 한 장의 사진으로 시작된다. 그랜드캐니언에서 젊은 남녀가 있었고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여자는 웨딩드레스, 남자는 한쪽 무릎을 반쯤 굽혔다. 프러포즈 중이었다. 그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감정은 대개 같았다. 감동적이다. 멋있다. 아름답다. 하지만 아름답고 멋있기 때문에 그 사진이 널리 퍼진 건 아니었다. 사진 속 젊은 남녀가 실종상태였기 때문에 더 유명해졌다. 이제 사진은 더 이상 화사하거나 따듯한 이미지가 아니었다. 미스터리 실종사건의 증거물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매일 밤 뉴스를 장식할 수는 없었다. 하나의 레이어가 더 있었다. 그 사진을 찍은 저작권자. 사진을 찍은 건 다름 아닌 개 ‘로버트’였다.
로버트가 바로 그 사진을 찍었다. 젊은 남녀의 아름다운 첫 시작과 젊은 남녀의 생의 마지막을 사진으로 남기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중적인 감정, 즉 예술작품에서 파생되는 각기 다른 이미지를 그 사진에서 얻었다. 로버트는 바로 그 지점까지도 추측해 사진을 찍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사진 속 젊은 여자의 아버지, 거대 사업가 발트만 회장은 이제는 죽어버린, 사라져버린 딸의 마지막 사진을 남긴, 사진작가 로버트를 찾아 나섰다. 발트만 회장은 오로지 그 로버트를 위해, 미술재단을 만든다. 움직임과 멈춤이 하나의 프레임에 갇힌 그 예술작품을 위해. 파괴되어야만 단 하나의 위대한 작품이 될 수 있는 그 시스템을 위해.
일단 유명해져라, 작품을 불태워서라도
나(안이지)는 잠시 음식 배달 라이더의 삶을 산다. 잠시 ‘예술 하는’ 삶을 멈춘다. 팬데믹 시절에 나 같은 작가는 생존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 후원자들의 후원은 끊겼다. 지원도 축소되었다. ‘예술 하는’ 삶은 잠시 사라진 걸까? 집세 때문에 살던 곳에서 쫓겨나는 기분으로 살았던 그녀에게 지금 현재 소원은 ‘마당이 딸린 개’를 갖는 것이었다. 어느 날 예술가들을 향한 파격적인 제안으로 유명한 로버트 재단이 안이지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여 그녀의 작품활동을 전폭적으로 후원해주기로 했다는 것. 놀랍게도 안이지의 작품을 선택하고 가치를 인정해준 후원자가 바로 로버트라 불리는 ‘개’였다는 게 더 놀라웠다.
소원이 반쯤 이뤄진 셈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로버트 재단의 후원이 거절하기 어려울 만큼 매력적이긴 하지만 그 로버트가 ‘개’라는 사실이 영 어색하고 당황스럽다. 그럼에도 나는 그 제안을 뿌리칠 수 없어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안이지는 예술을 포기할 뻔한 상황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로버트 재단에게 감사한 마음 한편으로 정말 그 재단의 권위자가 ‘개’인 로버트가 맞을까 싶은 의구심, 정말 후원이 되긴 하는 걸까 싶은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든다.
드디어 도착한 로버트 재단. 그곳에서의 생활은 꽤 규칙적이고 절차적이다. 로버트가 원하는 시간에 저녁을 먹고, 로버트가 원하는 시간에 대화를 나누고, 로버트가 원하는 시간에 산책을 해야 한다. 은유와 상징이 아니라 정말 작품을 보는 눈을 가진 걸까? 로버트 재단이 지금까지 승승장구해온 비결은 바로 로버트가 유망한 화가와 뛰어난 작품을 선택하는 능력을 지녔다는 점. 그럼에도 막상 눈앞에 ‘개’인 로버트를 대하고 보니 자기인식을 가졌을지, 통역사가 로버트의 말을 옮겨오는 것에도 의구심만 든다. 그럼에도 나는 ‘로버트’와 후원 ‘재단’을 분리해서 생각하기로 한다. 재단의 후원 능력만을 믿기에 이른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제안 하나. 작품 중 하나를 선택해 소각해야 된다는 조건.
불태워져 사라지는 단 하나의 원본
예술가와 작품은 어떤 관계일까? 소설에서 중심축으로 설정된 ‘작품을 불태워야 한다’라는 명제는 창작자와 작품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작품을 불태우는 그 화려한 퍼포먼스는 작품의 희귀성을 최상의 자리로 위치시킨다. 훌륭한 작품으로 선택된 작품이 불타 사라지는 순간 그 작품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는데, 한때 존재했으나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관념적인 의미로 작용된다. 가시적인 물성에서 비가시적인 관념으로 몸을 바꿔두는 것. 예술의 표면적인 형상의 이미지에서 관념적인 이미지로 둔갑되는 그 순간인 셈이다. 작품을 태움으로써 물적 가치는 상승하고 그 작품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으로 화가의 값어치 또한 상승한다. 하지만 이 행위는 예술가의 존엄을 무너뜨린다. 자신의 작품이 불태워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창작자의 심정은 고려되지 않은, 오로지 작품만을 위한 퍼포먼스인 것이다. 내 작품을 불태웠다, 라는 창작자의 선택. 작품을 스스로 폐기했다는 훼손된 자존감. 또한 온전히 작품이 자본가난 후원자에게 귀속된다는 것. 그럼으로 이 불태우는 행위를 통해 창작자는 자신의 존엄과 독립성을 작품의 가치와 맞바꾸게 된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러한 지점, 태워야 하는 작품을 그려야 하는 작가의 마음과 작품을 태울 수 없게 되는 작가의 예술적 존엄이 충돌하는 걸 보여준다.
불타는 작품 * 7
작가의 말 * 343
작품 해설 / 그러나 오아시스는 있다_정여울(문학평론가) * 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