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클링
악스트 Axt 2025.03-04
격월간 문학잡지 『Axt』 59호의 키워드는 ‘피클링’이다.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는 단어인 ‘피클링’은 말 그대로 ‘피클 만들기’라는 뜻이다. ‘저소비 코어’를 이끌고 있는 잘파 세대가 배달 음식 소비를 줄이고자 보관 기간이 긴 절임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이 유행하며 알려진 말이다. 무언가를 켜켜이 담아 오래 보관한다는 점에서, 피클과 같은 절임 음식은 문학과 비슷한 듯하다. 채소와 과일을 절여 소독한 유리병에 담아 보관하려는 마음은, 책이라는 물성 안에 우리의 기억, 사회, 역사를 보존하려는 마음과 닮아 있을 것이다. 우리 역시 오래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을 눌러 담아 독자에게 보내는 마음으로 이번 호를 구성했다. 부디 옆에 두고 오래도록 읽을 수 있는 잡지가 되기를 바란다.
◌ interview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는 것은 감정적 경험을 거의 영구적으로 보존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시간이 흐르면 고유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 같고요.” _이서수, interview 중에서
이번 호 interview에서는 최근 연작소설집 『몸과 고백들』을 출간하며 몸과 존재에 대해 깊이 있는 탐구를 제시한 소설가 이서수와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소설집의 중심 주제인 ‘몸’을 피클링이 일어나는 장소로 보고 책을 다시 읽어 본다면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지점들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현실과 밀접하지만 실제와 다른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그의 소설이 앞으로 어딘가로 뻗어 나갈지 계속해서 기대하게 된다.
◌ chat * issue
chat에서는 소설가 김병운 민병훈 이선진과 함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1890』을 읽어 보았다. 이 책은 과거 무단으로 편집된 부분까지 복원한 『월간 리핀콧』의 판본으로, 리뷰와 비평에 대한 오스카 와일드의 반박문 등까지 한 권으로 묶여 있다. 1890년 처음 발표된 문제적 소설은 2025년에 어떻게 다시 읽힐 수 있을지 이들의 대화를 통해 알아본다.
issue에서는 세 명의 필자가 글을 실어 주어 더욱 풍성해진 코너가 완성되었다. 비건 인플루언서로 활동하고 있는 정고메는 피클과 같은 절임 음식 역시 식물성 음식이라는 지점을 부각하며 비건으로 살아가는 일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벨라 셰프와 은하선이 함께 운영하는 비건 고메샵인 서울비건 역시 지금 시대의 채식과 ‘비건’에 주목한다. 오랫동안 채식을 해 오면서 느꼈던 것들을 진솔하게 말한다. 지류 문화 보존 및 복원가 김민중은 페이퍼리스 시대에 ‘외발한지’라는 한국의 전통 종이가 어떻게 ‘내일을 위한 어제의 종이’가 될 수 있었는지를 알려 준다. 세 개의 글은 모두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란 쉽지 않은 일임을, 그러나 그 지키려는 마음을 오래 간직한다면 언젠가 사회를 바꿀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 같다.
◌ short story * key-word
key-word에서는 소설가 정수읠의 「이 시점에 문필로 일억을 벌려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를 마지막으로 ‘빙의물’을 주제로 한 릴레이 연재가 마무리된다. 희곡을 쓰던 ‘너’는 우연히 후배를 통해 웹소설 작가의 길로 향하게 된다. 계속되는 실패를 마주하던 ‘너’는 작가 ‘고정읽’을 만나면서부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한편 ‘기념일’을 주제로 한 소설가 윤성희의 「바다의 기분」은 늘 반복되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 비일상의 하루를 그린다. 무단 결근을 한 ‘나’와 학교를 일주일 내내 빠진 조카 ‘영지’의 모습은, 삼촌과 어렸던 ‘나’의 관계와 맞닿아 있다. 부모님한테는 말할 수 없는, 둘의 관계여야만 말할 수 있는 비밀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지속된다.
short story에는 올해 신춘문예 당선자 두 명의 신작 소설이 실렸다.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소설가 남의현의 「공과 놀이와 공놀이」는 ‘나’와 엄마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평범한 모녀 관계에서 약간 어긋나 있다. 그러나 ‘내’가 엄마를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두 사람은 그저 놀이를 이어 나갈 뿐이다.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소설가 이상하의 「모니고떼」의 제목이기도 한 ‘모니고떼’는 에콰도르 전통 축제 ‘아뇨 비에호’에서 사용되는 꼭두각시 인형을 말한다. 미국에서 만난 ‘윤정’이 연말에 ‘마르띤’의 고향 집으로 여행 오며 그곳에서 새해를 맞이하기까지의 모습이 그려진다. 모니고떼를 태우고 나면 그들은 더 이상 불운해지지 않을 수 있을지, 세상의 모든 ‘어쩔 수 없는 일’을 피해 갈 수 있을지 지켜보게 된다. 앞으로도 한국문학에서 각자의 고유한 자리를 만들어 갈 두 소설가의 행보를 기대해 주기를 바란다.
◌ novel
이번 호 novel에도 아쉬운 헤어짐과 반가운 만남이 함께한다. 소설가 전예진 권혜영의 연재가 마무리되고 정기현의 장편소설 연재가 새롭게 시작되는 가운데 김숨 송섬의 연재가 꿋꿋이 자리를 지킨다.
정기현의 「살구 농원 술래잡기」 1회는 ‘문종일 세무사무소’에서 일하는 ‘기정’의 일상에 범상치 않은 인물 ‘선열’이 등장하며 이야기가 이어진다. 살구 농원 속 선열의 집으로 향하게 된 기정처럼 통통 튀는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부르는 소설의 다음 화를 기꺼이 기다리게 된다.
김숨의 「초대」 5회에서는 섬사람들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개개인의 이야기는 동떨어진 듯하지만 결국 연결되어 있다. 그들의 과거와 현재가 속속들이 드러나고 뒤엉키며 어떤 결말로 나아갈지 계속 지켜봐 주기를 바란다. 송섬의 「멜볼딘 동물원」 2회는 ‘그녀’와 ‘내’가 서로에게 보내지 않을 편지를 쓰며 ‘나’의 과거를 되짚는다. ‘나’의 어린 시절부터 이혼하게 된 이유까지 상세하게 적힌 글은 수신인에게는 영영 닿지 못할 것이다.
전예진의 「매점 지하 대피자들」 최종회에서는 선우와 연락한 김수산나가 남편과 함께 고라니 매점을 찾아온다. 그러나 선우를 비롯한 사람들을 그곳에서 내보내는 것은 그녀가 아니다. 어떤 이유로 그들이 밖으로 나오게 되는지 직접 확인해 주기를 바란다. 권혜영의 「얼지 마, 죽지 마, 사랑하게 될 거야」 최종회에서는 진실에 도달한 누리와 다운이 결국 소연과 만나게 된다. 그들이 대면하면 각자의 세계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될까. 산전수전 다 겪은 그들이 드디어 ‘해피 엔딩’에 다다르기를 바라며 그저 지켜볼 뿐이다.
◌ essay * cover story * review
조향사 김태형은 essay-parfum에서 배수아의 「바우키스의 말」을 읽으며 자신이 생각하는 작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에게 작별은 “가지의 말단에 맺힌 서양배”이다. 파리에서 O와 함께 마셨던 서양배 꼬냑의 향기가 지면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cover story에는 『VOSTOK』 편집장 박지수의 글과 함께 사진작가 이예은의 사진 작업이 실렸다. 그의 사진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이자 과정은 ‘쌓기’이다. 특정한 계기로 모인 우연한 조합은 작가의 ‘쌓기’라는 행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쉽게 넘어질 듯한 사물들은 고정된 채 사진 속에 하나의 형태를 이룬다. 빨라지고 생략되는 콘텐츠의 향연 속에서 이런 정성스러운 행위의 가치에 대해 다시금 되새겨 보게 된다. review에서는 문학평론가 황예인과 소설가 함윤이가 읽은 다양한 책들을 소개한다. 소개된 다양한 국적과 장르의 책들을 읽는 것은 물리적으로 떠나지 않더라도 독자들을 또 다른 세계로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editor’s note
김서해 효용하고 아름다운 2―3
review
황예인 연산호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8―15
세쿼이아 나가마쓰 『우리는 어둠 속에서 얼마나 높이 닿을까』
interview
이서수 지금이 아니라면 영영 할 수 없는 16―27
chat
김병운·민병훈·이선진 어쩌면 다른 시대에 28―47
issue
정고메 수고로움으로 절여지는 소중한 것들 48―51
서울비건 세상이 이런데 채식하는 사람이 늘어날 리 없잖아 52―56
김민중 내일을 위한 어제의 종이 58―63
cover story
박지수 천천히 오래 쌓는 시간 속에서 64―71
―이예은의 사진 작업
essay
김태형 작별의 서양배 80―86
key-word
정수읠 이 시점에서 문필로 일억을 벌려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 90―113
윤성희 바다의 기분 114―131
review
함윤이 이은용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132―139
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학교: 야콥 폰 군텐 이야기』
short story
남의현 공과 놀이와 공놀이 140―165
이상하 모니고떼 166―193
novel
김숨 초대(5회) 194―217
전예진 매점 지하 대피자들(최종회) 218―244
권혜영 얼지 마, 죽지 마, 사랑하게 될 거야(최종회) 246―275
송섬 멜볼딘 동물원(2회) 270―299
정기현 살구 농원 술래잡기(1회) 30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