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출간 기자간담회

2012년 세계문학상 수상작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출간 기자간담회가 3월 13일 있었습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를 비롯한 주요 일간지 문학 담당 기자님들이 참석하신 가운데 종로구 계동 한정식당 ‘산내리’에서 조촐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날, 평생 가난 속에서 노동일과 대필일을 하면서 어렵게 살아오면서도 끝내 문학의 끈을 놓지 않고 이번 세계문학상의 영광을 안기까지의 작가님의 험난한 생애가 주요 이슈가 되었는데요. 작가님의 작품 속에 녹아 있는 인물들은 바로 그러한 험난한 인생 여정에서 얻으신 선물이라는군요. 가슴 뭉클해지는 전민식 작가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1. 소감 한마디

2월 29일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 수상 소식 들으시고 아버님께서 “옛날로 치면 장원급제”라며 기뻐하셨다. 글쓴답시고 평생 걱정 안겨드렸는데, 아버님 돌아가시기 전에 기쁜 소식 안겨드려 다행이었다. 감사하다. 당선 소식 듣고 나서는 와이프하고 울었다. 그동안 고생했던 일이 스쳐지나가서… 이번 수상으로 “한 우물을 파면 결국 이룬다”는 평범한 진리를 믿을 수 있게 되어 기쁘다.

2. 언제부터 글쓰기에 뜻을 품었는지?

고등학교 때 친구들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곤 했는데 그때부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했다. 추계예대 재학 중부터 신춘문예, 문예지 등에 응모해 몇 차례 떨어졌고, 본격적으로 문학상에 도전한 것은 97년도부터다. 문학동네작품상, 작가세계문학상, 중앙장편문학상, 세계문학상 등 9번 떨어졌다. 덕분에 나는 축적된 작품이 많다. 문학상에 떨어질 때마다 ‘이것이 나중에는 나의 문학 자산이 된다’고 위안삼았다. 그래서 20여 년을 버텨올 수 있었던 것 같다.

3. 걸어온 길에 대한 후회?

매일 아침 의심했었다. ‘이게 과연 내 길이 맞는가?’ ‘나는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왜 안 그랬겠나.. 특히 2003년 동생이 죽었을 때 가장 심했다. 그 당시 나나 아내나 둘 다 일을 하고 있지 않아서 수입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3개월간 전화 발신 금지가 된 상태였다. 그러니까 수신은 가능하지만 발신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동생이 죽었다고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는데, 그 소식을 알릴 도리가 없었다. 집안의 농 등을 들춰서 동전 몇 개를 찾아서 겨우 공중전화로 연락을 할 수 있었다. 그때는 정말 내가 고집스럽게 이 길을 가야 하나 많이 힘들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써왔다. 매일 아침 의심은 해도 후회는 안 했다.

4. 글쓰는 후배들에게 조언 한마디

얼마 전에 모교인 추계예대에서 강연 신청이 왔었다. 추계예대가 부실대학에 선정되었는데, 후배들 격려 차원에서 신입생 대상 강연이었다. 그 학생들에게 “예술대에 온 것만으로도 1%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거다. 그 끼를 따라 가라. 한 우물을 파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 단 열심히 삽질을 해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전에 어떤 한의사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 있다. “재능이 없다 말고, 조금이라도 있는 재능을 키워서 넓혀라. 그러면 없던 재능이 따라온다.” 그 말씀이 정말 맞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재능이 점점 커져 가는 게 아닐까 싶다.

5. 문학의 꿈 이룬 후 좋은 점

사실 내 주변 지인들이 대부분 소설가이다. 그들이 영감을 찾아 여행을 가기도 하고, 문학관에서 지원받으며 글을 쓰고, 절에 가서 쓰기도 하는 모습들이 너무 부러웠었다. 나는 먹고사느라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 초상날에도 부고 탁자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대필 마감 원고를 써야 했다. 문우들이 나더러 ‘야전’ 스타일이라고 그런다. 아무리 시끄럽고 힘든 상황에서도 써낸다. 그런데 이렇게 생활하면서도 뜻 이뤄내 통쾌했다.

사실 주변에서 “너는 문턱인생으로 끝날 것이다.” “대필인생으로 끝날 것이다.”평생 유령 작가밖에 못할 것이다.”하는 얘기를 많이 들어왔다. 심지어 관상쟁이나 사주팔자 보는 사람들까지도 “그것은 너의 길이 아니다”라고 했었다. 나는 그런 얘기들을 들으면서 한번 그것을 뒤집어보고 싶었다. 운명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휘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냈다. 나는 사람들에게도 “운명을 한번 휘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6. 대필한 책의 종류와 양

거의 60여 편 정도 된다. 종류는 가리지 않았다. 연예인들 자서전, 한의학 서적, 제약 서적, 풍수 서적, 전문 서적, 논문을 대필한 적도 있다. 전문 서적을 집필할 때는 적어도 관련서적 30~40권을 독파한 후 써야만 한다. 한번은 조폭 대부의 자서전을 집필하는데 그 조건이 6개월간 그의 별장에서 칩거하는 거였다. 그렇게 칩거하면서 그 조폭 자서전을 시리즈로 낸 적도 있다. 결국 조폭 대부가 죽어서 돈도 절반밖에 못 받았다. (웃음)
한의학 소설은 kbs에서 드라마화 되기도 하고, 대필 서적 중에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들도 솔찮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대필 작가가 버는 돈은 정말 조금밖에 안 된다. 한 권당 500~800만 원 정도다. 더구나 그 책에는 내 이름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렇게 글쓴이의 자존감을 꺾고 문체를 잃게 만들기 때문에 작가는 대필을 하면 안 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생계문제도 있었지만 대필에 대해서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모르는 전혀 다른 분야를 공부할 수 있기도 하고, 몇 개월 동안 한 사람의 삶의 여정을 쫓아볼 수 있어 오히려 문학 공부에 도움이 되었다.

7. 와이프와는 언제 만났나

학교 졸업 후 박영한 소설가에게 사사받을 때 같은 인터넷 소설반이었다. 그때 만나서 결혼했다. 아내(최민경 씨)가 먼저 진주일보와 세계청소년문학상을 통해 등단했다. 아내지만 솔직히 배가 아팠다. (웃음) 지금까지 내가 글을 버리지 않고 버텨온 것은 그러한 아내의 도움이 컸다. 실은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를 아내에게 보여주었었는데, 그때가 하필 아내가 명절증후군을 겪을 때였다. 가뜩이나 심사가 어그러져 있어서 더 그랬는지 아내가 그 작품에 대해 “왜 전보다 더 못 썼어”하고 타박했었다. 다행히 세계문학상을 수상해서 아내에게 면목이 섰다. 결혼하고 나서도 생계 때문에 아기를 못 가졌었다. 아내가 등단 한 후에 아기를 가졌고, 지금 그 아이가 여섯 살이다. 아내와 여섯 살 난 아들과 함께 문학을 위해서 매일매일 기적처럼 산다.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북트레일러 스틸컷

8. 소설 속 이야기 실제 경험?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의 큰 얼개는 상상이지만, 그 세세한 이야기들은 실제 경험에서 나온 것이 많다. 또 그 등장인물들도 대부분 실제 인물들이다. 뭐, 불판닦는 아르바이트도 해봤고, 역할 대행까지는 아니지만 심부름센터에서 그 비슷한 일은 해봤다. 주인공 도랑은 실제로 내가 아는 컨설팅 업체 ‘네모’에서 추락한 인물을 모델로 한 것이다. 소설 속에 삼손이라는 캐릭터가 나오는데 그 사람도 내가 이삿짐센터 일하면서 만난 손가락 세 개를 가진 인물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는 비록 이삿짐 나르는 일을 했지만 버린 책들을 주워서 많이 봐서 그런지 정말 박학다식했다. 아까 말했던 조폭대부도 서재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 그 서재를 보면서 이렇게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렇게 거대한 조직을 끌어갈 수 있는 카리스마를 키웠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처럼 평범해 보이지만 의외의 구석들이 있는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쓰고 싶다.

9. 문학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

생활을 위한 일에 자존심을 세울 수는 없다. 대필만 해도 글 갖다 주면 내용이 맞니 틀리니, 왜 이 따위로 썼니 같은 말을 늘상 듣는다. 소설은 내가 세울 수 있는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비록 세상은 나를 몰라도, 내가 나를 알아주고 내 길을 갈 수 있었다. 그거 하나 지켜야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아 여기까지 온 듯싶다… 아예 예심도 통과 못했으면 포기했을지도 모르는데, 꼭 최종심에서 고배를 마시니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하는 오기가 생겼다. 한번은 하도 당선이 안 되서 그냥 모 출판사(꽤 큰 문학출판사)에 작품을 투고해봤다. 그리고 그곳 기획위원 분(교수)들께 출간하자며 연락을 받았고 축하한다며 술자리까지 마련해 주었었다. 그런데 그후 한 달 후에 없던 일로 하자고 연락이 왔다…
그런 싹수들이 내가 문학을 놓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나는 문학이 특별히 재능있는 사람만 하는 고귀한 직업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냥 문학 또한 살아가는 한 가지 방편일 뿐이고, 여러 가지 노동 중에 한 방식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문학이 선택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귀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면 아마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10. 소설에서 전하고 싶은 내용

tv에서 한 여자가 “나는 99%이다”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보면서 나도 99%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제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대다수 서민들의 삶의 여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서민들의 삶이 더 각박해지는데 그것을 개선시키지는 못하더라도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소설의 결말 부분이 똑 떨어지지 않고 진행형이어서 좋은 말로는 프랑스소설 같고, 나쁜 말로는 좀 심심하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 작품을 쓸 때는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보통의 인간 삶이 꼭 그렇게 드라마틱하지는 않기 때문에….물론 내 소설이 다 이렇게 잔잔한 스타일은 아니다.. 내 소설 중에도 기발하고, 반전적이고, 파격적인 작품이 있다. 아무튼 이야기 형식을 떠나 앞으로도 1%가 아닌 99%를 위한 이야기를 계속 쓰고 싶은 바람이다.

11. 이 책에서 독자에게 전하고팠던 것

모두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삶은 시작된다는 것.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 모든 우주 존재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절대 절명의 단절이란 없다는 생각을 통해 삶의 희망을 그려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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