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읽는가?—흔한 질문에 답함
사람들은 책을 읽는다. 두려울 때, 답답할 때, 답을 찾고 싶을 때, 혹은 심심할 때.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어렵고, 길고, 생각을 해야 하고, 혹은 재미있지 않아서.
<마이크로 인문학>은 이 둘 모두에게 ‘인문학 읽기’를 권한다. 인문학은 결코 학교나 두꺼운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배부른 소리하고 있는 관념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인문학은 지금 학교에 가는 만원버스를 타고 있는 당신의 짜증에, 어제 친구와 싸울 때 내가 그 말을 왜 했지 무수히 생각하며 바닥을 치는 당신의 후회에, 하루에도 문득문득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인지 묻게 되는 당신의 우울에, 산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 있다면 그건 누가 알려 주는 건지 도대체 알 수 없는 당신에게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삶-활용법’인 까닭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예전의 한 연설에서 “말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 말라(Don’t tell me words don’t matter)”고 했다. 마틴 루터 킹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말일 뿐이었다고, “만인은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다”, 이 역시 말일 뿐이지 않느냐고, 그러나 그것들이 만들어 낸 걸 보라 했다. 인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때로는 공허하고 때로는 사치스럽다. 번지르르한 말잔치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살지 말라”고, “보다 좋은 삶을 살라”고 말하는 인문학에 사람들은 대꾸한다.—“누군 몰라서 그러냐!” 사람들은 삶과 글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인문학이나 공부 같은 건 생활의 여유부터 찾고 난 연후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건 그냥 말이지 않느냐고, 학자들이나 하는 말, 인문학적인 클리셰가 아니냐고 말한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이 든 예들처럼, “나에게는 꿈이 있다”는 말 한마디가 바꿔놓은 것들, 이뤄놓은 것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장삿속에 상품처럼 팔려나가 닳고 닳아버린 ‘좋은 삶’에 대한 조언과 생각들을 다시 한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책은 죽었고, 인문학은 위기라는 볼멘소리와 투정을 지겹게 듣다가 마침내 우리는 이제, 인문학이 자기계발의 일환으로 쌍수 들어 환영받는 시절을 보내고 있다. 왜 인문학인가? 우리는 왜 읽는가? 그 흔한 질문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말고 곰곰이 따져볼 일이다. 읽음으로써, 인문학을 통해서 우리의 삶은 과연 나아질 수 있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대한 물음에 답을 찾아갈 수 있을까? 이렇게 사적인 고민도 철학이 될 수 있을까? <마이크로 인문학>은 답한다. 그것이야말로 철학이라고, 그것이야말로 자기 삶을 고양시키는 처세술이라고, 그것이야말로 인문학의 본질이라고.
변하기 위해 읽는 인문학—아주 개인적인 인문학
푸코는 말했다. “나는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바꾸고, 이전과 같이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책을 씁니다.”
그리고 책을 읽는 우리의 자세는 이에 공명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바꾸고, 이전과 같이 생각하지 않기 위해 책을 읽습니다.”
이미 많은 책들에 멋있는 말들이 가득하다. 우리의 일상에 경종을 울리고 다른 삶을 살 것을 권하는 잠언들도 많다. 그러나 그 수많은 책들을 읽고서 우리가 변하지 않는 건 도무지 좁혀지지 않는 삶과 인문학의 거리감 때문이다. 우리의 평범하기 짝이 없고, 사소함이 거의 전부인 일상에 가져오기에 철학담론은 어쩐지 너무 거대하고 사치스러워 보인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마이크로 인문학>이 특별해진다. 이것은 의뭉스러운 철학적 수사를 걷어낸 리얼한 인문학이다.
동료 한 사람이 불쑥 내뱉었다.“김 선생님이 뭐 아는 거 있어요?”……상황이 종료되고, 회의는 계속 진행되었다. 그러나 사실 상황이 종료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자꾸만 “김 선생이 뭐 아는 게 있어요?”라는 말이 귓전을 울리는 것이었다.
……만약 그날 있었던 일이 연극이었다면, 회의가 끝나는 순간에 무대는 막을 내리고 배우들이 연기했던 자리에는 싸늘한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일회적으로 끝난 사건이 아직도 진행형이라는 듯 계속해서 마음속으로 재상연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상연은 원본과 똑같은 것이 아니라 각색된 것이었다. 회의에서 나의 역할이 1/n에 지나지 않았다면 이 재상연의 극장에서는 1이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내가 모든 것이 되고, 배우였던 내가 감독의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 의식의 소음』, 본문 61~62쪽
<마이크로 인문학>의 첫 책 『생각, 의식의 소음』을 쓴 김종갑 몸문화연구소 소장은 “전기가 선을 따라 흐르듯이 생각은 연상의 체계를 따라서 움직인다”며 감정의 비탈에 올려놓으면 생각은 굴러 내리면서 더 많은 나쁜 생각들과 연합해서 더욱 몸집이 커지고 그런 부정적인 생각은 복수의 무능력에 대한 자기변명이 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우리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생각의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노예가 된다 말하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충분히 접할 법한 일화를 통해서 ‘생각’을 재사유한다. <마이크로 인문학>이 아주 개인적인 인문학이 될 수 있다면, 그건 바로 이런 솔직함이 있기 때문이고, <마이크로 인문학>을 통해서 변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면, 그건 바로 ‘우리 모두’가 겪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나는 할아버지의 시체를 끝내 보지 못했다. 어른들은 어린 내가 주검을 마주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어린 내가 죽음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서운 느낌이라기보다는 어제까지 방에 계시던 할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상실감이었다. 할아버지와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더 이상 매일 문안인사를 드릴 수 없다는 것도, 영원한 작별인사를 하지 못한 것도 어리둥절한 일이었다.
—『죽음, 지속의 사라짐』, 본문 14쪽
<마이크로 인문학>의 두 번째 책 『죽음, 지속의 사라짐』에서는 우리가 모두 겪을 수밖에 없는 ‘죽음’을 다룬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 때문에 가장 보편적인 사건이지만 개인에게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사건”이라며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불행으로 죽음을 의식하여 허무주의적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면서 실존적 삶의 차원으로 죽음을 경험할 것인지에 따라 삶과 죽음의 의미는 달라진다.” 최선의 삶의 방식을 아는 것, 인식과 공부와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다.
인문학 뉴페이스, 몸문화연구소와 +α
몸문화연구소. 2007년 설립된 이 특이한 이름의 연구소가 추구하는 바는 다름아닌 ‘학문의 세속화’. 시민강좌와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책 출간을 통해서 독자와 활발히 소통하는 연구소의 활동궤적이 설명되는 슬로건이다. 애초에 공부/인문학과 몸과 결합시킨 그 시작이 김종갑 소장의 개인적인 몸의 문제에서 시작되었던 터라 이 연구소에서 주장하는 바는 한결같이 ‘삶’에 붙어 있다. 구름 위에 떠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살면서 부딪히는 세속적인 질문들, 그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것이 이 연구소의 소명이다.
스피노자는 우리의 안녕을 방해하는 장애로 가득찬 결정론적 세계에서 인간이 행복에 이르는 길을 증명하기 위해 『에티카』를 썼다. 몸문화연구소 연구원들을 비롯한 <마이크로 인문학>의 필자들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행복이 지상최고의 가치고, 타성을 벗어나 새로운 철학/사유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이 연구의 목표다. 학문하는 사람으로서의 업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실제 삶에서 학문이 유용하게 쓰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결합했고, 처음 선보이는 이 네 권을 시작으로 법학·고전·정신분석·문학 등등을 아우르는 다양한 접근들이 시도될 것이다. ‘마이크로’, 바야흐로 인문학 버전 3.0의 시작이다.
*마이크로 시리즈는 계속됩니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질문들
은행나무 마이크로 인문학
01 생각: 의식의 소음(김종갑) | 02 죽음: 지속의 사라짐(최은주) | 03 선택: 선택의 재발견(김운하)
04 효율성: 문명의 편견(이근세) | 05 증상: 문명의 고통(김석) | 06 장소: 삶의 동반자(정지은)
07 사랑: 사랑의 발명(임지연) | 08 인정: 관용을 넘어서(서윤호) | 09 진보: 발전의 잔인함(박삼헌)
10 숭고: 미학의 무덤(이성민) | 11 웃음: 감춤과 드러냄 사이(서유석) | 12 기억: 망각과 왜곡(서길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