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한 시대에 우정과 연대의 언어를 제안하는 가장 독창적이고 쾌활한 디스토피아 소설
지구에 아로새겨진
원제 地球にちりばめられて
브랜드 은행나무 | 발행일 2022년 9월 30일 | ISBN 9791167372208
사양 변형판 130x190 · 352쪽 | 가격 15,000원
시리즈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7 | 분야 해외소설
불확실한 시대에 우정과 연대의 언어를 제안하는
가장 독창적이고 쾌활한 디스토피아 소설
★ 2022 전미도서상 번역부문 후보작
★ 2022 커커스상 최종 후보작
★ 괴테 문학상‧클라이스트상‧군조 신인 문학상‧아쿠타가와상‧
다니자키 준이치로상 수상 작가 다와다 요코 3부작의 첫 번째 소설
경계 없이 흐르는 언어의 유체성을 탐구해온 작가 다와다 요코의 신작 장편소설 《지구에 아로새겨진》이 은행나무 세계문학전집 에세(ESSE) 일곱 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유럽 유학 중 자신이 태어난 나라가 지구에서 없어져 같은 모어(母語)를 쓰는 사람을 찾아 떠나는 Hiruko의 여정을 그린 이 작품은 ‘Hiruko 3부작’ 중 첫 번째 소설이다. 더 이상 어느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언어의 바다를 표류하며 살아가야 하는 Hiruko는 ‘판스카’라는 인공언어를 직접 만들어 구사한다. 무척 독특한 신종 문법을 사용하는 판스카에 매료된 덴마크 언어학자 크누트를 비롯해,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친구들이 차례차례 Hiruko의 여정에 합류하면서, 유럽 여러 나라의 다양한 지역을 떠돌며 새로운 만남을 통해 언어와 언어 사이의 반짝임을 발견해나가는 신비로운 여행이 펼쳐진다.
《지구에 아로새겨진》에서 시작된 Hiruko와 친구들의 여행은 두 번째 작품 《별에 넌지시 비추는》과 세 번째 작품 《태양제도(太陽諸島)》로 이어질 예정이다.
액체 문법의 시대
: 딱딱한 세상 너머로 헤엄쳐나가는 물고기들
“이것은, 나와 다른 말을 쓰는
당신 곁에서 기꺼이 안개 속을 헤매이는
여행에 관한 이야기.”
_장혜령(시인)
소설은 덴마크 코펜하겐의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들려오는 경쾌한 빗소리에서 시작한다. 소파에서 굼지럭거리며 텔레비전을 보던 덴마크 언어학자 크누트는 자신이 살던 나라가 더 이상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 사람들이 등장하는 한 방송에서 Hiruko를 보게 된다. 유럽 유학 도중 ‘중국 대륙과 폴리네시아 사이에 위치한 열도’였던 고향이 바다에 잠겨 사라진 Hiruko. 더는 한곳에 정착하여 머무를 수 없는 세상에서 그녀는 북유럽 도시들을 정처 없는 바람처럼 표류하며 살아가고 있다.
여자의 얼굴이 공중에 떠 있는 여러 개의 문법을 빨아들여, 그걸 체내에서 녹이고 부드럽게 숨 쉬며 입으로 내뱉었다. 듣는 사람은 그 신기한 문장이 문법적으로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는 기능이 멎은 채, 물속을 헤엄치는 기분이 된다. 앞으로의 시대는 액체 문법과 기체 문법이 고체 문법을 대신하게 될지도 모른다. _16~17쪽
누군가의 정체성을 나라와 민족에 의해 규정하고, 언어와 삶이 또렷하고 단단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 고체 문법의 시대는 이미 끝났다. 예측할 수 없는 파도 속에서 Hiruko와 친구들은 변화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정박할 수 있는 부표나 따라갈 이정표 없이 언제까지나 헤엄쳐가야만 한다. 하지만 이는 비관적 전망이라기보다, 기존에 부여된 의미에서 달아나는 끝없는 다시 쓰기이자 여행이 된다. 소설은 불행한 발전을 좇은 인류가 자초한 지구의 어두운 미래를 배경으로 하지만 멸망이라는 사건을 장대한 비극이나 비참한 일처럼 다루지 않는다. “‘조국’이니 ‘멸망하다’ 같은 건 내 어휘에 없다.”(53쪽) 오히려 멸망은 누군가 원래 있던 장소로 더 이상 돌아갈 수 없게 되어, 한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흐르는 유동적인 상태를 나타낸다. 이는 기후 위기, 전쟁, 테러, 망명 외에도 전 세계로 연결되는 소셜 네트워크 속에서 데이터와 이미지의 바다를 영원히 떠돌며 살아가는 현시대 삶의 방식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디아스포라 상태는 기후 난민인 Hiruko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Hiruko의 여정에는 크누트뿐만 아니라 여성으로 정체화하여 성과 성 사이를 여행하는 인도 출신의 아카슈, 독일 출신의 마르크스 박물관 직원 노라, 그린란드 출신으로 맛국물을 연구하는 텐조/나누크, Hiruko와 같은 ‘스시의 나라’ 출신이며 유령 같은 분위기의 Susanoo가 각 장의 화자로서 번갈아 등장하며 합류한다. 서로의 차이에서 비롯된 경계는 단단한 장벽이기보다 함께 타고 흐를 수 있는 물결이라는 듯이, 액체 문법의 시대를 살아가는 Hiruko와 친구들은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세상의 표면을 나란히 걸어간다.
“21세기의 Hiruko는 사라진 모어를 상징하는 알파벳 이름을 안고, 새로 사귄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다. 모세와 달리, 자신과 전혀 다른 민족 구성원들과 함께. 이들은 그저 물고기처럼 가볍게 만났다가 헤어지고, 흩어졌다 다시 모인다. 서로의 관심사를 이야기하고, 취향을 나누고, 음식을 먹으며, 논쟁을 벌이다가도, 장난을 치고, 각종 탈것들을 이용해 여행을 다닌다. 그야말로 노는 중이다.” _‘옮긴이의 말’ 중에서
“지금 우리는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이동한다.
그러므로 스쳐 지나간 모든 풍경이 뒤섞인 바람과 같은 언어로 말한다.”
일본의 창세신화에서 바다에 흘려보내 버려진 여자아이 히루코는, 지구에서 일본이 사라진 뒤 흩어진 모어를 찾아 세상을 떠돌며 여행하는 Hiruko로 도착한다. 한 평론가의 말처럼 “다와다는 일본 신화의 막다른 길(dead end)을 페미니스트, 이주자 중심 세계의 시작(beginning)으로 다시 쓰고 있다.” 모어를 더 이상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게 된 막다른 길에서, Hiruko는 직접 판스카라는 인공 언어를 만든다. ‘범(汎)스칸디나비아어’라는 뜻의 판스카는 스칸디나비아 언어권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무척 독특한 신종 문법을 구사하고 있어 외국어처럼 낯설게 들리는 언어이다. 가령 Hiruko의 판스카를 처음 들은 크누트는 규범과 상식, 일상생활 속에서 굳어진 모어의 매끄러운 표면이 부서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맨 처음 Hiruko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제껏 밋밋하게 써오던 모어의 매끄러운 표면이 갈라졌고, 파편들이 Hiruko의 혀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게 보였다. _228쪽
다와다 요코에 따르면 모어는 하나의 단일한 언어로 존재하지 않으며 누군가가 나고 자라며 들었던 주위 사람들의 다양한 말투, 외국어처럼 해석할 수 없는 암호들, 스쳐 지나온 모든 풍경의 이미지를 어렴풋한 흔적으로 간직하고 있다. 마치 오래전 누군가 읽어주었던, 기원 없이 계속 다른 형태로 반복되어 나타나는 동화처럼. 이를 반영한 것이 계속 변화해나가는 Hiruko의 불완전한 즉흥 언어 판스카다.
나의 판스카는 실험실에서 만든 것이나 컴퓨터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느낌에 따라 이야기하면서 저절로 발생해 통하게 된 언어다. (……) 오래전 이민자는 하나의 나라를 목표로 떠나 죽을 때까지 그 나라에서 사는 경우가 많아서, 거기서 쓰는 언어만 외우면 되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이동한다. 그러므로 스쳐 지나간 모든 풍경이 뒤섞인 바람과 같은 언어로 말한다. _44쪽
노라는 어떤 정체성을 완전히 소유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며 실제로 인간은 어떠한 장소에 놓이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Hiruko 또한 판스카가 완성될 수 없으며,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언어가 되었고 그렇게 되어갈 뿐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운명을 타고 흐르는 해방적이고 가뿐한 수동성이 있다. 세계에 몸을 활짝 열어둔 채 이동하고 변신하는 엑소포니(exophony)의 언어는 우연히 도착한 장소에 맞추어 모습을 바꾸는 바람처럼 중력 없이 춤춘다. 그렇게 하나의 언어 안에 여러 언어들이 깃들어 있음을 느낀다. Hiruko의 판스카는 어디에도 포착되지 않고 계속 흔들리며, 오롯이 전달될 수 없어서 자유롭고, 우리를 아주 먼 세상의 가장자리까지 데려가줄 수 있는 바람의 언어다.
Hiruko는 바람에 휘날리는 커튼처럼 웃고 있었다. (…) 판스카는 우리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질적인 기운을 담고 있다. (…) 판스카를 쓰는 한, Hiruko는 어디까지나 자유롭고, 자기 마음대로 존재할 수 있다. 심지어 대화가 공처럼 튀어 올라서 고독할 겨를이 없다. _328~329쪽
지구를 떠도는 언어의 가루들
갈라진 모어의 틈새로 출발하는 여행
오래전 멸망한 고대 로마제국의 성문과 공중목욕탕이 여전히 독일 트리어에 남아 있듯이, 소설의 바탕에는 언젠가 존재했으며 사라진 것들의 파편 또한 여전히 세상 어딘가를 돌고 있으리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그래서 Hiruko에게 모어를 찾는 여행이란 없어진 모국의 부흥을 꿈꾸거나 되찾으려는 것이라기보다, 지구 구석구석에 아로새겨진 언어의 흔적들을 발견하는 일과 연결된다. 이는 “세상이라는 바다로 흘려보내져, 죽을 때까지 친구를 찾는 여정”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오슬로에 온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나는 나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어. 언어학자인 크누트는 같이 오겠다고 했지. 여기까지는 언어학적인 흥미야. 노라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서 왔어. 하지만 아카슈, 너는 왜 온 거야?”
아카슈는 창피하다는 듯한 얼굴로 가느다랗게 대답했다.
“크누트와 친구가 되려고.” _193~194쪽
끊임없이 변화하는 여정처럼 형상이 정해져 있지 않은 언어는 계속해서 흔들리고 변신하며, 어떠한 모습도 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 채로 유유히 흐른다. 아무리 걸어도 종지부가 나타나지 않는 언어를 타고, Hiruko와 친구들은 기꺼이 헤매며 누가 시작해서 누가 이어가는지 알 수 없는 여행을 계속할 것이다.
Hiruko를 만나고, 봄날 선잠 같은 인생에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종지부 뒤에는 이제껏 본 적 없는 문장이 오기 마련인데, 그것은 문장이라 부를 수 없는 무언가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무리 걸어도 종지부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종지부가 존재하지 않는 언어도 분명 있을 것이다. 끝나지 않는 여행. 주어가 없는 여행. 누가 시작해서, 누가 이어가는지 알 수 없는 여행. _208쪽
■ 추천의 글
만약 지구상에서 내가 태어난 나라가 사라지고
나의 언어만 남는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이동한다.
그러므로 스쳐 지나간 모든 풍경이 뒤섞인 바람과 같은 언어로 말한다.”
이것은, 나와 다른 말을 쓰는
당신 곁에서
기꺼이 안개 속을 헤매이는
여행에 관한 이야기.
만난 적 없지만
보이지 않는 실로 이어진 Hiruko와 크누트,
그리고 또 다른 언어 여행자들의
이상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 _장혜령(시인)
“기후 변화, 테러리즘, 적대적인 정치 구조는 위험과 불확실성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 책의 인물들은 내부에 새로운 세계의 씨앗을 지니고 있다. 창의성과 가능성, 사람들 사이의 연결을 찬양하는 쾌활한 디스토피아 소설.” _〈포어워드 리뷰스〉
“모네의 붓질 하나하나에 색은 계속 변화하지만 풍경은 하나의 전체로서 드러난다는 크누트의 말처럼, 다와다 요코의 인물들은 인상주의적이다. 유동성, 담백함, 덧없음. 희미한 실체들이 함께 모여 하나의 형태를 이루는 방식으로, 이들은 함께 소용돌이치며 아름답고 평온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_〈월 스트리트 저널〉
“다와다 요코는 우리를 해안으로 인도함과 동시에 바다로 내쫓는다. 역설적으로 양쪽 다 같은 곳에 도착한다. Hiruko, 크누트, 아카슈, 텐조, 노라 그리고 Susanoo와 함께,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그건 분명 부드럽고 낯설며 새로운 장소일 것이다.” _〈파이낸셜 타임스〉
“세상의 종말에 대한 책치고, 이 소설은 굉장히 명랑하다. 당신은 같은 언어를 말하고 있더라도 누군가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서로를 잘 알아볼 수 있다.” _〈Wired〉
“페이지를 뛰어넘어 실제로 노래하고 있는 다와다 요코의 언어.” _〈NP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