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로빈슨 크루소’ 문명과 야만, 이성과 광기의 눈부신 고찰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
문명과 야만, 이성과 광기의 눈부신 고찰
첫 소설에 수여하는 2012 공쿠르상 수상작
장 지오노 상, 아메리고 베스푸치 상 등 8개 문학상 석권!
2012년 공쿠르 신인상을 수상한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는 ‘문명’과 ‘야만’이라는 대립되는 개념을 몸소 경험한 실존인물 ‘나르시스 펠티에’의 삶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강력한 서사와 팽팽한 긴장감으로 페이지를 쉼 없이 넘기게 하는 이 소설은 프랑스에서 첫 소설에 수여하는 공쿠르상을 비롯하여 장 지오노 상, 아메리고 베스푸치 상, 엠마뉘엘 로블레스 상, 리모쥬 문학상, 에드메드라로슈푸코 상, 오르탕스 뒤푸르 상, 모리스 두세 독자상을 수상했다.
“로빈슨 신화와 인류학 탄생의 만남” – <르몽드>
- ‘문명/야만, 이성/광기’의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통렬한 비판
이 모험을 통해 저 자신도 변화한 것이 아닐까요? 제가 관찰을 심화하면 할수록 제가 가진 평소 신념이 뿌리째 흔들립니다. 도대체 야만인이라는 것이 무얼까요? 제가 그를 가르친다니, 그와 나 둘 중 과연 누가 배우는 입장일까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를 주제로 하는,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이 불멸의 명작으로 꼽히는 고전을 가리켜 프랑스 최고 지성 작가인 미셸 투르니에는 ‘타자/야만(프라이데이)에 대한 서구/문명(로빈슨)의 우월함을 역설하는 치명적인 문제를 지닌 작품’이라고 지적하며, 《로빈슨 크루소》의 풍자 소설이자 패러디인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써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대상을 수상한 이 소설에서는 로빈슨과 방드르디(프라이데이의 불어식 발음)가 대등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앞서 언급한 두 소설에서 ‘문명’과 ‘야만’이 독립적 개념으로서 대립항을 이루고 있었다면,《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에서는 이 대립되는 개념이 기묘하게도 한 인물의 내부에 공존하고 있다. 주인공 ‘흰둥이 야만인’, 즉 나르시스 펠티에는 ‘로빈슨’인 동시에 ‘방드르디’이자, 그의 관찰자 옥타브에 따르면 ‘발버둥 치는 뱃사람’인 동시에 ‘고약한 야만인’인 셈이다.
소설은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나르시스의 과거를 다루는 장과 지리학자 옥타브 드 발롬브룅이 파리 지리학회장에게 보내는 편지가 교차하며 진행된다. 소위 ‘야만족’의 재사회화를 거치며 문명의 기억을 모두 잊은 나르시스와, 그를 맡아 거둔 지리학자 옥타브 드 발롬브룅. 둘 사이의 교류가 깊어질수록 나르시스는 문명사회에 다시 적응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고, 옥타브는 그간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문명/야만’, ‘이성/광기’, ‘진보/퇴행’ 등의 대립항이 산산이 부서져 나감을 깨닫는다. <르몽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로빈슨의 신화와 인류학의 탄생이 대면”하고 있는 이 소설은 당시 서구 사회가 ‘비문명 사회’ 에 대해 지니고 있던 선입견과 오만함을 생생하게 그려내 보이고 있다.
야만인에 대한 백인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그 많은 사례들, 언제나 한결같은 양상으로 발휘되는 문명의 흡인력이야말로 보편적 양식(良識)이 주장하는 바를 확실하게 뒷받침해 왔습니다만……, 나르시스만은 예외인 거죠.
“우리는 나르시스의 영혼을 하나의 전쟁터로 인식해야 합니다.”
– 고독과 미지의 땅에서 희망 하나로 살아남은 한 인간의 위대한 생존 실화
이 고독과 미지의 땅에서 그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죽음은 더 이상 낯설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그러니 살아야 했다. 살아야만 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이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시 섬에 표류하여 17년간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한 19세기의 프랑스 선원 나르시스 펠티에(Narcisse Pelletier)의 실화를 재구성한 소설이라는 사실. 뉴칼레도니아 행정국장으로 있던 저자는 우연히 접한 이 나르시스라는 인물에 매료되어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의 집필에 십여 년간 매달렸고, 마침내 <렉스프레스>가 ‘고전적이고 우아한 문장’이라고 평가한, 신인 작가답지 않은 중후한 문체로 자신만의 나르시스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문명과 야만의 세계를 두 번씩 넘나든 나르시스 펠티에. ‘야만’의 세계, 즉 모든 상식과 관념, 사용하는 언어조차 모두 다른 세계에서 나르시스는 소통의 단절을 맛본다. 이미 ‘사회적 죽음’을 맛본 그에게 죽음은 “낯설지도, 무섭지도” 않은 존재이기에, 더욱 치열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물리적이고 사회적인 ‘생존’이 그의 외부적 싸움이라면, 그의 내부에서는 ‘선원’과 ‘야만인’이라는 두 가지 자아가 싸움을 벌인다. “두 세계를 동시에 머릿속에 담을 수 없음으로 인한 죽음, 동시에 흰둥이와 검둥이로 존재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죽음”이 그의 내면을 놓아주질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혼의 내면이 ‘전쟁터’처럼 너덜너덜해진 나르시스는, 그럼에도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자신의 실존을 찾아 나아간다. 시련 앞에서 굴복하지 않은 한 인간의 위대한 생존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독자들에게 더 큰 울림을 가져다준다.
나르시스는 결코 절망하지 않았고, 자신의 운명을 신의 손에 맡겼습니다.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은 잊었을지언정, 그는 모든 의미에서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 디포(1660~1731)가 창조한 인물 로빈슨 크루소는 무려 28년 동안 문명으로부터 차단된 상태에서 이성과 과학으로 대표되는 18세기 계몽주의적 인간상의 전형을 구현해낸다. 그는 도구를 제작하고, 일기를 쓰고, 대차대조표를 작성한다. 수학적 엄밀성과 규칙성을 일상의 영역에 투사해 자연을 개조하고 삶을 기획하는 것은 근대문명의 핵심이다. 서양 문화권에서 <로빈슨 크루소>가 근대인의 전형을 최초로 확립한 소설로 자리매김되는 이유다.
무인도의 거친 자연과 인간의 흔적을 찾기 힘든 절대 고독 속에서 로빈슨 크루소가 성취한 업적은 한편으로는 불굴의 의지와 이성의 힘을 입증하는 것이지만, 그 바탕에 ‘야만을 길들이는 문명의 힘’이라는 세계관이 깔려 있다는 점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의 전형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식민주의는 ‘문명화된 백인이라면 미개한 원주민을 교화하고 인도할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에 의해 정당화됐다. 로빈슨 크루소가 원주민 프라이데이를 다루는 방식이 정확히 이런 가치관에 기초하고 있는데, 미셸 투르니에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이러한 ‘문명/야만’의 이분법을 해체하려 했다.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과 동일한 문제의식을 품고 있는 장편소설이다. 두 작품 모두 프랑스 작가가 썼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러나 <흰둥이 야만인에게…>는 <방드르디…>와 달리 실존 인물 나르시스 펠티에(1844~1894)의 사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소설은 두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진행되는 구조다. 오스트레일리아로 향하는 상선에 승선했다 조난당해 18년 동안 원주민들과 생활한 나르시스 펠티에의 이야기가 한 축이고, 원주민들과 생활하는 동안 문명의 기억을 모조리 망각한 펠티에를 프랑스로 데려오는 지리학자 옥타브 드 발롬브룅의 이야기가 다른 한 축이다. 나르시스의 이야기는 3인칭 시점 소설 형식으로, 옥타브의 이야기는 그가 프랑스 지리학회 회장에게 보내는 서한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작가 프랑수아 가르드. | 은행나무 제공
소설 속 시간으로 1861년 3월, 오스트레일리아에 파견된 프랑스 지리학자 옥타브는 현지 선장으로부터 ‘흰둥이 야만인’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는다. 옥타브는 이 남자가 나르시스 펠티에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나르시스에 대한 교육과 연구를 시작한다. 나르시스는 서른여섯살이지만 ‘문명인’의 관점에서 볼 때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다. 옥타브는 기본적인 어휘, 대소변을 포함한 기초 예절, 옷 입는 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18년 전 나르시스가 조난당한 후 원주민 부족을 만났을 때 생존을 위해 치러야 했던 탈문명화 과정과 정확히 반대되는 절차다.
소설은 원주민 부족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나르시스가 감행하는 모든 시도가 좌절되고, 이른바 문명사회에서의 경험이나 지식이 그의 생존을 보장해주지 못해 나르시스가 철저한 무력감을 느끼는 과정을 점진적으로 묘사한다. “나르시스는 저항할 생각도, 기력도 없다. 깊은 만의 끝자락에서 규모를 가늠키 어려운 너울이 가파르게 일어나듯, 모든 걸 삼키며 솟아오르는 망각이 그는 이제 두렵지도 않다.” 나르시스의 서사는 그가 문명사회에서 학습한 세속적 욕망이 모조리 영점으로 수렴하고 원주민 사회의 단순한 질서에서 평안을 발견하는 대목에서 끝난다. 이 과정의 설득력에 비춰보면 로빈슨 크루소의 초인적인 성취는 실현불가능한 신화처럼 보인다.
나르시스 펠티에가 백인들에게 발견됐을 당시의 모습(왼쪽 사진)과 프랑스에 온 뒤의 모습(오른쪽 사진). | ⓒ엘리 갈리마르
이 소설이 ‘문명/야만’의 이분법에 대해 취하고 있는 비판적인 입장은 소설의 다른 축인 옥타브의 서사에서 좀더 명료하게 드러난다. 야만의 세계에 대한 학문적 호기심으로 무장한 옥타브에게 나르시스는 야만의 실체를 알려줄 살아 있는 ‘현장’이자 교육을 통한 ‘훈육’ 대상이다. “처음 시작할 때 저는 그의 정신이 제 가르침을 새겨 넣을 하얀 백지에 불과하다고 믿었습니다. 저의 인장을 박아 넣을 밀랍이라고 보았지요.”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우화처럼 문명의 밝은 빛이 그를 야만의 어둠으로부터 끌어내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생의 절반은 문명사회에서, 나머지 절반은 원시사회에서 보낸 나르시스에게 재문명화 과정은 ‘계몽’이 아니라 자아의 ‘분열’로 이어진다. 옥타브는 결코 나르시스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문명의 시각으로 ‘야만’을 설명하려는 노력은 오류일 수밖에 없음을 자백한 것이다.
작가 프랑수아 가르드(54)는 프랑스 최고의 엘리트 교육기관인 프랑스 국립행정대학(ENA)을 졸업하고 현재 행정판사로 일하고 있다. 53세에 발표한 자신의 첫 작품인 이 소설로 그는 지난해 공쿠르상 신인상을 받았다.
21세기판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 문명과 야만이라는 대립되는 개념을 경험한 실존인물 나르시스 펠티에의 삶을 재구성한 작품으로 2012년 공쿠르 신인상을 수상했다. 은행나무 펴냄.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프랑수아 가르드 지음, 성귀수 옮김
은행나무·1만4000원
어릴 적 <로빈슨 크루소>는 재미있는 동화책인 줄 알았다. ‘프라이데이’라는 ‘야만인’은 극중 장식물에 불과했다. 나중에 이 책에는 심각한 ‘제국주의적 편견’이 숨어 있다고 비판하는 얘길 들었다. 문명과 야만의 선명한 대비 속에 문명의 위대함을 노래하며 야만은 정복의 대상으로 여길 뿐이라고. <흰둥이 야만인에게…>가 뼈대로 삼고 있는 실제 사례는 완전히 반대다. 1844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견습선원 나르시스 펠티에는 사고로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해변에 홀로 버려졌다. 17년이 흘러 그는 1875년 ‘흰둥이 야만인’으로 발견됐다. 피부색만 백인일 뿐, 온몸에 문신을 했고 말과 행동도 ‘야만인’의 것과 같았다.
작가는 이 사건을 소설적으로 재구성해 낸다. 펠티에는 해변에 버려져 죽음의 공포를 맛본 뒤 원주민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점점 ‘야만인’으로 변해갔다. 자연과 함께하는 새로운 기쁨을 맛보면서. 한 지리학자는 모국어를 잃어버린 흰둥이 야만인을 다시 문명의 세계로 인도하려 애썼다. 이른바 야만의 정복 과정이다. 하지만 오히려 야만이 주는 진솔한 삶의 의미에 공감하는 자신을 숨기지 못한다. 영화의 교차편집처럼 두 가지 이야기가 계속 뒤섞이는 형식은 나무랄 데 없는 소설적 효과를 낳았다. 작가는 묻는다. 무엇이 문명이고 무엇이 야만이냐고.
안창현 기자 blue@hani.co.kr
이 실화를 소설로 재구성한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는,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문명과 야만의 세계를 두 번씩 넘나든 나르시스 펠티에를 통해 인간의 이중적 자아에 관한 놀라운 탐구를 그려 공쿠르 신인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행정관으로 오랫동안 재직 중 첫 소설을 통해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은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의 저자, 프랑수아 가르드와 진행한 이메일 인터뷰를 전한다.
당신은 소설가로서는 무척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언제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나?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08년이었다. 바로 이 소설이었는데, 1년 만에 거의 절반을 쓰고 나자 더 이상 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잠시 중단했다. 그리고 몇 달 후에 초고를 다시 읽자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 되돌아 왔다. 2011년 초에 원고를 탈고했다.
공쿠르 신인상을 수상한 뒤에 생활의 변화가 있다면?
공쿠르 신인상은 내 삶을 바꾸지는 않았지만, 이 책의 성공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어쩌면 공쿠르 신인상을 받음으로써 내가 비로소 정말 작가가 되었다는 확신이 굳어진 것 같다.
어떤 계기로 \'나르시스 펠티에\'의 실화를 소설로 쓰게 되었나?
내가 이 이야기를 들은 건 거의 20년 전이었는데 듣고선 굉장히 놀랐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자신의 언어와 이름을 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이야기는 남태평양에서 벌어진 일이었는데, 나 역시 뉴칼레도니아에서 근무하며 서구 문화와 비서구 문화의 만남에 관해 고민해볼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내가 선택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이 이야기가 나를 택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펠티에의 실화와 당신 작품 속 펠티에의 이야기에 혹시 다른 점이 있다면?
실화에서는, 배가 난파되고 원주민들에게 습격을 받는다. 나르시스 펠티에는 중상을 입었고 죽음을 맞도록 해변에 버려진다. 그래서 그는 다른 선원들이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나이도 다른데, 이 책에서는 19세이지만 실제 나르시스는 14세였다. 마지막으로, 나르시스가 이 사건을 겪은 시점은 소설에 나온 시점보다 15년 정도 후이다.
당신의 소설을 보면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 떠오른다. 이 소설처럼, 당신도 19세기 서양인들이 \'야만인\'들에 대해 지닌 생각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지?
나는 과거의 행동 양식들을 비판하거나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데에는 흥미가 없다. 너무 쉽게 자기 양심을 속이게 되지 않는가. 다른 문화에 대한 서양의 시점 변화를 그려내는 것은 역사학자의 몫이다. 소설가로서 나는 \'옥타브\'라는 내 등장인물의 머릿속에 들어가 그의 생각과 의심들을 그려내고자 했다. 나는 어떠한 이론이나 견해도 지지하지 않는다. 독자마다 자신이 바라는 결론을 내리리라 생각한다.
차기작 『세 개의 관을 위하여(Pour trois couronnes)』가 갈리마르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 독자들을 위해 이 작품에 관한 간략한 소개를 부탁해도 될까.
『세 개의 관을 위하여』 역시 모험소설이다. 뉴욕에 거주 중인 프랑스 백만장자가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의 문서 중 발견된 짤막한 필사원고의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 주인공의 임무이다. 이 원고는 어딘지 밝혀지지 않은 항구에서의 짧은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조사를 통해 주인공은 원고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정체와 이 장면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또한 이 발견들이 지닌 예기치 않은 책임들까지 그는 발견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그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로 되돌아가게 된다.
구상하고 있는 다음 작품이 있나?
그렇다. 다음 작품에 관해 충분히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갖고 있으며 이미 집필을 시작했다. 그 작품은 앞서 출간된 두 작품과는 굉장히 다를 것이다. 하지만 아직 끝을 맺지 못해 그에 관해 자세히 말하기 어렵다는 점을 양해해주길 바란다.
| 정리_박수진 (교보문고 북뉴스)
기사 및 사진 제공_은행나무
18년이 지난 후 그를 발견한 이들에게 나르시는 말 그대로 흰둥이 야만인에 불과했다. 모국어인 프랑스어는커녕 언어 자체를 잊었고, 손으로 음식을 먹고, 몸에는 상처와 알 수 없는 문신이 가득했다. 지리학자 옥타브는 그를 관찰하고 연구하면서 지리학회장에게 보고서를 제출한다. 소설은 나르시스의 이야기와 보고서를 교차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문명(옥타브)과 야만(나르시스)의 세계가 함께 펼쳐지는 것이다.
옥타브의 가르침으로 나르시스는 사람다운 모습으로 변화한다. 나르시스는 아이처럼 말을 배우고, 도구를 익히고, 상황을 인식한다. 하지만 이성적인 판단을 하거나,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저 지금 문명의 세계에 놓인 현실을 부정하지 못하는 듯하다. 옥타브를 비롯한 지리학회가 바랐던 섬에서 보낸 삶은 찾을 수 없었다.
‘나르시스는 변하고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그는 우리와 가까워지는 대신, 오스트레일리아의 심오한 자연과는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규칙을 접하는 즉시 그에 적응하고 있지요. 지금 입고 있는 바지와 입에 올리는 말들, 나와 만들어가는 인간관계 모두가 그 자신을 우리에게 가까이 데려오고 있는 반면, 제가 그에게서 애당초 발견하고자 한 무엇은 자꾸만 속으로 감추고 있습니다.’ 129쪽
반면 나르시스의 시선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낯선 세계를 탐험하는 듯 기묘한 설렘을 준다. 죽음의 공포에서 원주민과 만난 그가 느꼈을 감정은 공포이면서 안도였다. 외부와의 접촉을 기대했지만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옥타브와 나르시스의 만남처럼 말이다. 섬을 이동하면서 동물과 기이한 열매를 먹는 그들은 그에게 ‘암글로’ 란 이름을 붙여준다. 그들에겐 서열이 있었고, 나르시스는 아이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나르시스는 미개한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곧 자신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라고.
‘지금까지 부족이 생활하는 것을 지켜보았지만, 찔찔 짜는 야만인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어쩜 이렇게도 공통점이 없는지……. 남녀노소 불문하고 저들과는 그 어떤 관계도 맺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홀로 고독함으로써 사색과 고뇌, 계획과 추억에 심취할지니, 차라리 혼자여서 즐거울 법도 했다.’ 169쪽
놀랍게도 실화를 재구성한 소설은 무척 흥미롭다. 한 편의 탐험 영화를 보는 듯 빠져든다. 섬에서의 나르시스 이야기는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더불어 옥타브와 함께 생활하면서 나르시스 문명의 세계로 완전하게 복귀할 수 있을까. 나르시스는 존재를 확인했고 고향에서 부모와 형제를 만났고 직업을 가졌지만 그는 사라졌다.
나르시스가 아닌 태양이라는 뜻의 ‘암글로’ 로 살아온 시간, 그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러했을 것이다. 언어나 기호가 아닌 눈빛으로 몸으로 기억하고 배우고 소통하며 하나가 된 삶으로 충분했다. 어디에 속하든 삶은 다르지 않을 터.
‘불그스레한 모닥불 불빛 속에서 아이와 젊은이는 서로 말없이 손을 잡고 있었다. 아마도 평온한 마음으로 둘은 조용히 오랜 시간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어스름 속에 나르시스의 손을 맞잡은 까무잡잡한 아이의 손.’ 304쪽
우리는 일반적으로 야만과 문명이 충동했을 때, 야만은 문명에 흡수된다고 여긴다. 나르시스에게 문명을 강요했어야 옳았을까? 야만과 문명의 두 세계에서 문명만이 선택받을 수 있다는 건 기만인지도 모른다. 그 세계를 경험하지 않은 자는 알 수 없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