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펼쳐지는 눈물겨운 사랑이야기를 그린 <사월>에 이은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 일상의 행복 뒤에 웅크리고 있는 비극을 조명하면서 매몰찬 운명에 몸부림치는 인간의 노력조차도 또 하나의 하나의 운명이라는 것을 이야기한 서정소설이다. 비켜갈 수 없었던 슬픔… 슬픈 운명이 맺어준 사랑이야기!
▶사랑은 안녕한가? — 급변하는 시대, 변모하는 사랑관 장편소설 『사월』로 “정통문학의 위세에 눌려 발육부진 상태에 놓여 있던 대중문학에 대한 시장의 수요를 채워주는 신선한 텍스트”(중앙일보, 2001년 5월 19일 자)라는 평가와 함께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작가 이진영. 그의 새 장편소설 [슬픔은 비로 내리고]가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전작이 "고단했던 한국 현대사가 효과적인 배경으로 녹아 있는 스릴러"였다면, 이 소설은 영상세대를 겨냥한 서정소설로 새롭고 다채로운 시도가 시선을 모은다.
사랑의 형태가 변하고 있다. 어떠한 형태의 사랑이든 자신이 할 수는 없지만 타인이 하는 것은 용인해 주겠다는 것이 요즘 보편적인 정서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영상매체는 변모하는 사랑의 형태를 발빠르게 따라잡고 있다. 얼마 전에는 중년 유부남과 하이틴의 사랑 얘기를 다룬 드라마가 인기를 끌더니, 최근에는 재혼한 부부의 아들딸이 서로 사랑하는 드라마가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서로 사랑하지만 신분의 차이 때문에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해야 하는 때가 있었다. 사회적인 편견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동반 자살한 뉴스가 심심치 않게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기도 했었다. 요즘 소설에서 이런 고답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룬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사랑에 목숨걸던 시대는 분명 가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현대인들의 사랑은 지독히 자기 중심적이며 분방하다. 그러나 이진영 장편소설 [슬픔은 비로 내리고]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사랑은 여전히 목숨을 걸고 이뤄야 하는 유일무이한 가치로 존재한다. 세상이 아무리 변모해도, 사람들의 사랑관이 아무리 바뀌어도 사랑이라는 본질적인 의미는 영구불변의 것이라는 게 이 소설을 쓴 작가의 생각이다.
사랑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가장 극적으로 담아내는 그릇이다. 이 소설에서도 사랑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연인들의 모습에서 사랑의 드라마틱한 측면이 잘 드러난다.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시간적 배경은 남녀 주인공이 과거에는 어떤 모습으로 살았고, 현재에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장치로 활용된다. 과거와 현재는 시간 진행에 따라 순차적으로 배열되어 있지 않다. 과거와 현재가 무질서하게 얽혀 있는 것은 인물들의 갈등 구조와 심리 변화를 용이하게 드러내기 위한 방식으로 보인다.
이 소설은 남녀 주인공이 사랑을 이루기 위해 벌이는 무수한 노력과 고난의 기록이기도 하다. 남녀 주인공에게는 각기 사랑의 상처가 있다. 친구와의 우정 때문에 사랑을 포기해야만 했던 민규, 남편과 사별한 아픔을 간직한 채 아이를 홀로 키우고 있는 여자 연수, 두 사람은 과거가 만들어 놓은 상처 때문에 사랑을 이루기까지 수없이 많은 설왕설래를 거듭한다.
민규가 스스로 과거의 상처를 적극적으로 극복해 나가는 반면 연수는 과거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 안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한다. 민규는 과거가 현재의 삶에 족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지만 연수의 가슴에는 과거가 만들어 놓은 커다란 옹이 하나가 자리잡고 있다.
▶비켜갈 수 없었던 슬픔… 운명으로 깊어간 사랑
연애 이야기는 소설이라는 장르가 생긴 이래 작가들이 가장 많이 선호하는 소재가 되고 있다. 그만큼 연애에는 인간의 정서와 의표를 찌르는 희로애락의 감정들이 모두 뒤섞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무딘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도 사랑 앞에서는 초연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칼릴 지브란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했다.
연애소설의 포인트는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정도로 위력을 가진 사랑의 정체를 얼마나 다양한 각도에서 밀도 있게 그려내는가에 달려 있다. 그간 최루성 주제로 눈물을 유도하는 방식이나 터무니없는 사랑지상주의가 연애소설의 성공 방정식처럼 인식돼 왔던 게 사실이다. 이런 소설들은 대부분 비슷한 접근 방식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주인공들의 빼어난 외모,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매력,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헌신성, 불치병으로 주인공이 죽는 비극적 결말 등이 바로 그것. 상상력의 공간을 열어 보인다기보다는 센티멘털리즘이나 로맨티시즘에 기대는 상투적인 수법이었다. 이 소설은 그러한 공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남녀 주인공에 포커스를 집중하기보다는 다양한 상황 설정과 장면 전환으로 소설적 긴장미를 유지해나간다.
이 소설은 사람의 인연이란 우연 아닌 필연으로 연결되어 있고, 가혹한 운명에 몸부림쳐야만 했던 노력조차도 또 하나의 운명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예기치 않게 다가온 불행, 좌절, 만남, 갈등, 이별, 재회로 이어지는 스토리는 빈 틈 없이 촘촘하게 짜여져 있다. "작가의 말"에는 사랑을 대하는 작가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슬픔은 운명이 놓은 사랑의 징검다리라는 생각과 함께 작가는 슬프지만 새로운 희망을 향해 열려 있는 소설을 세상에 내놓았다. 비온 뒤에 땅이 굳듯 슬픔을 모두 이겨내고 이룬 민규와 연수의 사랑은 어느 한적한 시골의 마을 어귀에 있는 은행나무처럼 뿌리가 깊고 단단할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이라면, 나는 결코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철을 탄 민규는 문득 한 여인을 주시한다. 분명 만난 적이 있지만, 언제 무슨 일로 만났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자기도 모르게 여인을 따라 내린 민규는 뒤를 쫓아간다. 그녀가 간 곳은 신사역 부근의 동네 우체국. 그제야 민규는 까마득히 잊고 있던 기억 하나를 떠올린다.
강원도에 간 혜원이 갑자기 송금을 부탁해왔다. 송금을 마치고 택시를 기다리던 민규는 연습장에 외투를 벗어두고 온 기억이 난다. 바지 주머니에는 동전 한 닢 남아 있지 않다. 다시 우체국으로 들어간 민규는 여직원에게 차비를 빌린다.
연수는 결혼 18개월 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딸 우희와 이모와 함께 살고 있는 우체국 여직원이다. 우체국 일, 취미(서예) 그리고 가정 일 외에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고 살고 있다.
다시 우체국을 찾은 민규는 연수에게 장미꽃 한 송이와 봉투를 불쑥 내밀고 사라진다. 연수는 봉투에 든 만 원권 한 장과 음악회 초대권, 그리고 감사의 글이 적힌 메모지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낸다. 연수는 설레는 가슴으로 음악회를 기다린다. 안드레아 보첼리의 팝페라 음악회다. 그러나 음악회에는 가지 못한다. 그날 소풍을 간 우희가 돌아올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 소식조차 없어서였다. 서울대공원으로 달려가 우여곡절 끝에 우희를 찾아낸 연수는 비로소 한숨을 돌린다.
민규는 연수가 음악회에 나오지 않은 사정이 궁금해 다시 우체국을 찾는다. 그러나 그녀가 동료 직원들과 함께 퇴근하는 바람에 선뜻 앞으로 나서지 못한다. 얼마 후 연수가 동료 여직원과 함께 들어간 곳은 묵향 가득한 서예원이다. 민규는 붓글씨를 쓰는 연수의 매력에 시선을 빼앗긴다.
그는 서예에 심취해 있는 여동생 미란의 도움을 받아 지필묵을 준비하고 연수가 다니는 서예원에 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서로의 일정이 어긋나 연수와 쉽게 대면하지 못한다. 며칠 후 대면이 이루어지지만 연수는 민규의 등장을 예사롭지 않게 여기고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다시 만난 연수와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눈다. 연수는 결혼한 적이 있고 현재 딸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며 거리를 두려 한다. 민규는 과거 때문에 연수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굳히고 계속 접근을 시도한다. 결국 연수는 조금씩 민규를 향해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12월 31일 제야에 만나기로 약속하는데…….
저자 소개
이진영
충남 부여 출생으로 대학 졸업 후 CF와 영화 만드는 일을 했다.
숨막히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펼쳐지는 눈물겨운 사랑 이야기 『사월』(전2권)을 발표하여 단숨에 주목받는 작가로 부상했다.
저자의 살아온 이력도 별난 편이다. 그는 국제 수사업무를 다루던 수사관 출신.
91년까지 공항 등에서 근무하다 퇴직 후 CF와 영화(장동건, 김희선 주연「패자부활전」) 제작과 외화 수입업에 손대왔다. 영화사 황기성 사단의 부사장을 지냈으며, “영화계도 이야기꾼이 필요하다” 는 판단 아래 소설을 쓰게 되다.
이미 전작 『사월』의 영화화가 결정되었으며, [슬픔은 비로 내리고]도 영화 작업을 추진중이다.
"작가가 당연히 여자인줄 알았습니다만, 작가파일을 검색해 보니 놀랍게도 남자분이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이쁜 글을 쓸 수 있는지…."(인터넷 서점 예스24 독자서평 "kimki57") "책 앞장에 작가 홈페이지(http://www.freechal.com/sadkorea)주소가 있길래 들어와 봤어요. 책을 보며 오랜만에 실컷 울어본 듯 합니다."(독자 "moonset84" 메일)
연애 멜로소설 "슬픔은 비로 내리고"는 시대착오적이다. 요즘 세상에 "사랑이야말로 여전히 목숨을 걸고 이뤄야 할 가치"로 설정한 게 그렇고, 서정적 문체의 구사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이 소설에는 성애 장면 묘사는 물론 키스 신이 단 한번도 등장치 않는다. 그만큼 담백하다. 그럼에도 독자들이 이 책을 반긴다는 것은 그만큼 이 시대가 서정에 목말라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의 출간 소식과 함께 도매상과 대형서점에 선주문이 2만부 가까이 들어왔다는 점도 이례적이다."슬픔은 비로 내리고"가 지난해 현대사를 바탕에 깐 추리 스릴러 "4월"의 작가가 쓴 새 작품이라는 것을 보고 오는 반응들이다. 이 점은 작가 이진영 수요층이 생기는 조짐이기도 하고,"가시고기"나, 대만에 수출까지 했던 "국화꽃 향기"같은 대중소설들은 그만큼 저변이 넓다는 얘기와도 통한다.
어쨌거나 "슬픔은 비로 내리고"는 일차적으로 시장 수요를 염두에 둔 "기획 상품"으로 만들어졌다. 문학 장르에 대한 대중의 외면현상이 두드러지는 상황 속에서 문단 밖의 사람이 자원봉사역을 자청한 셈이다. "패자부활전"을 연출했던 영화감독 출신이 "영화계에도 이야기꾼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에 착수한 첫 작품에서 보인 역량도 만만치않은데, 이번에는 멜로로 방향전환을 하는 신축성도 보였다.
스토리는 이렇다."민규"는 음악 매니지먼트 회사를 운영하는 젊은이. 우연치않게 그가 사별한 남편과의 옛 기억만을 안고 사는 "연수"와 만난다. 우체국에 근무하는 연수에게 민규는 "과거라는 이름의 "옹이"에 얽혀 살아서는 안된다"며 새로운 삶을 권유한다. 알고 보면 민규 역시 대학 친구와의 우정 때문에 사랑을 포기해야 했던 아픔을 갖고 있다. 민규 친구의 죽음, 뒤이은 연수의 딸의 어이없는 사고와 함께 두 주인공은 또 하나의 "옹이"를 공유하게 된다.
이때 절제된 묘사 속의 모성애 대목에서 독자들은 눈물을 쏟을 법하지만, 결국 둘 사이의 결합이라는 해피앤딩으로 이어진다. 대중소설의 아킬레스 건인 심리묘사의 부족, 다층적 구성의 부재 때문에 "다소 싱겁다"고 여길 수도 있으나, 보기 드물게 깨끗한 서술과 건강함은 분명 매력이고 "건강한 대중소설"의 등장을 알린다.
2002년 2월 16일 토요일
조우석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