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폐된 삶을 끌어안는 한 줄기 어둠의 빛에 대하여
위안의 서
3천만원 고료 제3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묵직한 감동과 울림의 서사!”
―심사위원 김인숙, 이기호, 류보선
한국문단을 이끌 새로운 작품과 작가를 발굴하고자 논산시가 주최하고 (주)은행나무가 주관하는 제3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박영 장편소설 《위안의 서》가 출간되었다.
《위안의 서》는 죽음 앞에 상실감을 가진 두 남녀가 서로를 통해 삶의 의미를 새로이 발견해가는 이야기로, 어둠 속에서 빛을 더듬는 문학의 본질적인 물음을 곡진한 문체로 담아낸 작품이다. 출토된 유물에 숨을 불어넣는 보존과학자 남자와 치솟는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 정부에서 비밀리에 파견한 공무원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아무것도 나아질 게 없는 세상에서 청동빛의 건조한 일상을 버티는 이들의 교감과 연대가 뭉클한 감동을 자아낸다.
지난해 말(12월 20일) 마감된 제3회 황산벌청년문학상에는 모두 105편의 장편소설이 접수되었다. 1회 56편, 2회 73편으로 꾸준히 증가폭을 보이고 있는 응모작의 수가 월등히 급증한 것은 황산벌청년문학상의 심사의 공정성과 신뢰성이 그만큼 높아졌음을 방증한다. 심사위원단은 옥석을 가리기 위한 2개월간의 심사 끝에 만장일치로 박영 씨의 《위안의 서》를 이번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2015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아저씨, 안녕>이 당선되며 문단에 데뷔한 박영 씨는 그동안 생업에 종사하며 작품 발표를 일절 하지 않은 채 소설을 썼다. 그동안 아홉 편의 단편과 세 편의 장편을 썼고 그중 이번 당선작이 된 《위안의 서》는 가장 최근에 쓴 작품이다.
소설가 김인숙, 이기호, 문학평론가 류보선 등 세 명의 심사위원은 “숨 막힐 듯이 처절하지만 아름다운 소설, 죽음이 인물이자 배경이고 문체인 소설, 어디에서 이런 어둠의 상상력이 나왔는가,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감동과 울림의 서사”라고 평했다.
네 몸이 소멸해가는 걸 막고 싶어
네가 마주할 낯선 시간을 함께 견디고 싶어……
정안은 세상을 유기물과 무기물로 구분하는 보존과학자이다. 부서진 도자기 파편을 봉합하고, 시간의 흐름에 의해 퇴색된 초상화의 빛깔을 되찾아주는 일이 그의 직업이다. 멈춰 있던 유물의 시간이 다시 움직이도록 하는 정안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곧 멈출 거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다. 어릴 적 어머니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자신도 몇 년 안에 비슷한 결말을 맞이할 거라는 초조함을 느끼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발굴 현장에서 국립고궁박물관 보존과학실로 운송된 미라를 보존처리하게 된다. 미라의 몸에서 염습의들과 각종 장신구들을 떼어내어 정밀한 작업을 마친 그는 그 결과물들을 미라 특별전에 내보낸다. 박물관이 주최한 미라 특별전은 그의 이제까지의 건조한 삶을 전혀 새로운 것으로 뒤바꾸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것은 미라 특별전에 찾아온 한 여자 때문이다.
여자는 치솟는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 정부에서 비밀리에 파견한 공무원이다. 그 자신도 생의 의지가 가득하진 않지만 타인들의 죽음을 막는 일에는 책임감을 갖고 있다. 의붓아버지의 암묵적 폭력과 불안정한 삶을 꾸려온 어머니 아래에서 성장한 여자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잿빛 세상만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 그럼에도 도태되고 싶지 않다는 강박관념이 그녀를 이곳에 머무르게 하는 유일한 힘이다.
정안은 미라의 손을 감쌌던 진열장 너머 악수(幄手)를 간절히 바라보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이제껏 지켜왔던 원칙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여자는 죽음의 세계에서 건너온 것만 같고 얼굴에는 피로감과 절망감이 드리워져 있다. 정안은 그녀에게 자신이 관람객들에게 브리핑할 미라 특별전 팸플릿을 건넨다. 여자는 X선을 비추듯 자신을 꿰뚫어 보는 그에게 오랫동안 감춰온 비밀을 들킨 듯 서둘러 눈길을 피한다. 그렇게 짧은 만남이 끝나고 여자는 전시회장에서 사라진다.
얼마 뒤 미라 특별전 브리핑을 보러 나타난 여자는 저고리에 수놓아진 새가 애벌레를 쪼아 먹는 문양을 설명하며 죽음을 미화하는 정안에게 항의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날마다 죽음의 현장을 마주해야 하는 그녀가 보기에 죽음은 전혀 아름답지 않으며 냉정하고 잔인한 파국일 뿐이다.
“제가 보기에는 말이에요. 그 무늬는 바로 우리에게 죽음에 대한 적나라한 고백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남자가 죽은 여인의 몸에 입힐 자신의 의복에 새긴 게 무엇인지 아세요? 그건 바로 새가 한 치의 망설임과 연민 없이 제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벌레의 생을 끝장내듯 죽음은 우리 인간을 어느 순간 냉정하고 잔인하게 덮쳐올 뿐이라는 거예요.” _본문 93쪽
다시 사건 현장으로 돌아간 그녀는 화재 사고로 죽은 사람들의 얼굴과 신분을 확인하던 중 걷잡을 수 없이 격렬한 슬픔을 느끼며 팸플릿에 인쇄된 정안의 연락처로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제 문자에 답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많이 놀라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상해 보이시겠죠.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저 또한 누군가에게 지금 말을 하지 않고서는
(……)
더 이상 살아 있기 힘들 것 같아서요. _본문 130쪽
갑작스런 메시지에 정안은 당황해하면서도 한순간 마음속 깊이 각인된 그녀를 잃어버릴 것 같은 불안을 느끼며 여자가 보내온 주소로 찾아간다. 그리고 형체만 남은 재처럼 앙상하게 서 있는 그녀에게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함께 유물 발굴 현장으로 떠나자고 제안한다.
시간의 지층을 깨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어둑해진 밤, 달이 떠오른 발굴 현장에서 그는 그녀에게 이 구덩이에 한번 들어와보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안아 부축하며 그는 그녀의 이름(오상아)을 처음으로 묻는다. 두 사람은 구덩이 안에 나란히 앉아 환한 달빛을 올려다본다. 정안은 어떤 유물을 마주 대할 때보다도 더 경건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는 그날 서울로 올라오며 고속도로에서 멀리 동이 트는 것을 지켜보았었다. 그리고 문득 이제는 죽은 여자 미라의 몸에 왜 남성의 의복이 겹겹이 감싸여 있었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건 죽음으로부터 온몸으로 사랑하는 연인의 몸이 소멸해가는 것을 막아주고 싶었던 마음이 아니었을까. 철저히 혼자서 치러야만 하는 소멸의 지난하고도 낯선 시간을 조금이나마 함께 하고 싶었던 한 사람의 간절한 의식이 아니었을까 하는. _본문 160쪽
출토된 유물을 복원하며 죽음에 사로잡힌 남자, 매일 죽음과 마주하는 삶을 살아내고자 온 힘을 다해 애쓰는 여자의 만남은 어떤 결말을 맞이할까.
밀폐된 삶을 끌어안는 한 줄기 어둠의 빛에 대하여
“허무맹랑한 죽음과 겨루어 쓰고 싶었다…”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 정안은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좀처럼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시간과의 사투를 벌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가 마음을 닫아걸고 있었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 힘들었다. 그렇지만 그가 조금씩 나를 돌아본 것은 지난해 여름이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극심했던 날 나는 익산으로 갔다. 폐사지 발굴 작업이 한창이라는 기사를 읽고서였다. _‘작가의 말’에서
《위안의 서》를 쓰면서 박영 작가는 두려움과 외로움에 붙들린 사람들에게, 또 자신에게 따뜻한 위안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다. 죽음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공통된 전제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녹록잖은 현실을 버틸 수 있는 힘을 소설에 담아낼 수 있기를 바랐다. 이를 위해 익산 폐사지 발굴 현장에 가서 직접 유물 발굴 작업에 참여했고 자살률을 낮추려 분투하는 공무원을 만나 비밀스런 인터뷰를 했고 고궁박물관 보존처리 전문가의 자문을 받는 등 취재에도 공을 들였다. 소설의 초고를 쓰고 다듬고 완성하는 데는 삼 개월 남짓 걸렸다.
해가 강했던 날 우연히 산책을 하다가 미술관에 들렀어요. 정기용 건축가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어요. 다름 아니라 그분이 돌아가신 뒤 방에 남겨져 있던 물건들을 고스란히 옮겨온 거였습니다. 충격적이었어요. 얼마 전까지 이 사람은 이 세상에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 있었고, 너무나 열정적이었는데, 그 사람은 어디로 갔지 싶었습니다. 전시실에서 조용히 정말 격정적으로 울게 되었어요. 당황스러웠어요. 그때부터 죽어가는 것들에 눈을 떴고, 그 허무맹랑한 죽음과 겨루어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_‘작가 인터뷰’에서
어찌 보면 소설의 주인공 정안과 오상아는 다른 듯 같은 인물이다. 하나의 영혼을 나눠 가진 듯 둘 다 삶에 대해 비슷한 이미지와 에너지를 품고 있다. 한순간에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어떤 그림자에 사로잡혀 있는지 눈치채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다.
작가는 이들을 통해 상처와 불안의 힘을 역설한다. 달이 뜬 밤 발굴 현장의 구덩이에서 모나고 훼손된 존재들이 둥글게 말린 채 나누는 위안의 몸짓을 보라. 소멸하는 자들의 슬픔이자 운명인 ‘허무맹랑한 죽음’에 맞서려는 애달픈 노력, 그것과 다름없다. 이렇듯 누구든 함께 죽음에 맞서주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상황이 나아지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이 아주 덧없지는 않으리라.
▣ 추천의 말
죽음은 다가가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지점, 혹은 영역, 혹은 무엇이다. 숨 막힐 듯이 처절한데, 그 처절함으로부터 한순간도 눈을 돌릴 수가 없다. 죽음을 향해 가는 듯하지만, 종국에는 삶의 내면으로 들어와 있다. 처절해서 아름답다._김인숙(소설가)
죽음이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이야기, 죽음이 인물이자 배경이고, 문체인 소설. 어디 에서 이런 어둠의 상상력이 나왔는가. 역설적으로 그것은 이 작가가 지닌 사람에 대 한 희망과 믿음 때문이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은 채 섣불리 내미는 손이란, 그저 거짓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 소설이, 나에겐 아프지만 따뜻한 한 통의 편지처럼 다가왔다. _이기호(소설가)
《위안의 서》는 너무 본질적이어서 한동안 우리 문학이 외면해온 문제를 온몸으로 밀고 나간다. 끝끝내 묵직한 감동과 울림을 준다. 가장 진지한 것이 때로 가장 도발적일 수 있다. _류보선(문학평론가)
1장 수백 년 전의 여자
2장 나무의 시간
3장 습기
4장 거스르다
5장 몸
심사평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