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로써 비로소 완전해지는 경이로운 사랑의 기적
안녕, 뜨겁게
환한 달빛 아래 난 기다린다.
내게서 떠난 이들을 되찾아줄 그 미지와의 조우를.
경쾌하고 시크한 소설의 맛,
《오란씨》 《링컨타운카 베이비》 작가 5년 만의 신작 장편
“21세기 한국소설의 한 돌연변이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한 잠재력”(문학평론가 류보선)을 지닌 신예라는 평가와 함께 문단과 독자의 주목을 받았던 소설가 배지영이 5년 만의 신작 장편 《안녕, 뜨겁게》로 돌아왔다. 작가는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을 겪고 무미건조하게 살아오던 한 여자의 인생에 어느 날 UFO, 외계인 그리고 외계 존재와의 교신을 통해 실종된 사람을 찾아주는 한 남자가 끼어들게 되면서 벌어지는 유쾌하고 가슴 뭉클한 해프닝을 그렸다. 한편 전작 《링컨타운카 베이비》나 《오란씨》를 통해 1980년대 급속 성장 이면의 불온하고 추악한 풍경들과 그 주변부에서 삶을 버텨내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기울인 작가 배지영. 여전히 톡톡 튀며 시선을 끄는 문체와 무심한 듯 툭툭 던지는 유머와 함께, 독자들은 신작 《안녕, 뜨겁게》를 통하여 이전보다 삶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성숙하고 새로워진 배지영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멈춰버린 심장의 톱니바퀴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는
사랑과 기억, 치유와 성장의 서사
월간지 〈좋은 이웃〉의 “실수로” 뽑힌 1년차 인턴 기자. 꿈도, 열정도 없이 삶의 한가운데에서 공회전만 반복해오던 스물아홉 살 ‘윤제이’는 외계인과의 교신을 통해 실종된 사람들을 찾아준다는 ‘배명호’라는 사람을 취재하려 한다. 그간 수많은 사람들을 찾아왔음에도 정작 잃어버린 자기 아내는 아직 찾지 못한 이 비운의 남자를 제이는 여기저기 탐문한 끝에 가까스로 만나게 된다.
만나자마자 “검증”을 한답시고 몸 구석구석을 훑고, ‘시그니처’ ‘텔레파시’ ‘MJ’ 같은 뜻 모를 단어들을 내뱉던 배명호는 별안간 제이의 귀를 보고 시선을 사로잡히고 만다. 제이의 귀에는 어릴 적 UFO와 마주쳤다가 얻게 된 흉터가 있었는데, 같은 상처가 배명호에게도 있었던 것. 그 흉터는 외계인이 납치 당일의 기억을 삭제하기 위해 칩을 삽입하다 생긴 흔적이었고, 이 말인즉 같은 날 동일한 외계인이 서로의 상대들을 납치했다는 걸 의미했다.
기자의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의뢰인으로 배명호에게 접근했던 제이, 그는 처음엔 이별한 남자 친구를 찾고 싶다며 둘러댄다. 그러나 이내 어릴 적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어떤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낸다. 간절하게 붙잡고 싶었으나 그만 놓치고 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배명호와 제이는 이제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추억의 조각들을 뒤져 사랑하는 이를 납치한 외계인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해내야 한다. 배명호는 ‘채널링’이라는 방법을 통해 범법을 저지른 외계인들을 사냥하는 ‘그레이 사냥꾼’과 교신할 수 있었다. ‘그레이 사냥꾼’은 배명호와 제이의 기억을 추출해 ‘기억큐브’를 만드는데, 그 기억큐브를 통해 제이의 아버지와 배명호의 아내를 납치해 간 외계인들의 이름을 알아낼 수 있다.
그런데 이 기억큐브가 제대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바로 기억을 공유하는 서로가 서로에게 일말의 거짓도 없이 진실해야만 한다는 것. 제이는 자신의 신분과 목적을 위장한 채 잠입했지만 배명호가 자신이 취재해야 할 대상임을 잊어버린 듯하다. 아버지를 간절히 되찾고 싶은 마음이 이미 너무 커져버린 제이는 배명호와 함께 결국 기억큐브를 만들기 위한 훈련에 돌입하게 되는데…….
“세상의 모든 J에게 뜨겁게 안녕을 고한다”
이별로써 비로소 완전해지는 경이로운 사랑의 기적
얼어 죽을 사랑, 내게 있어 사랑의 끝은 배신이고 비겁함이며 무책임이었다. 다신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어서 세상이 쫄딱 망해버렸으면 했다. 나도 뒈지고 너도 뒈지고 이 세상도 폭삭 망해버리기만 한다면 이 치욕도 슬픔도 사라질 것 같았다.― 131~132쪽
남자 친구와의 치욕적인 이별을 겪은 뒤 주인공 제이는 이렇게 말한다. 관계 회복을 위해 동반 겨울 산행을 하다 산 중턱에서 자신을 홀로 버려둔 채 하산해버린 제이의 남자 친구는 어쩌면 관계의 맺고 끊음에 익숙하지 않은 오늘의 세태를 표상한 것일지도 모른다.
《안녕, 뜨겁게》를 통해 작가는 오늘날 관계의 급작스러운 단절로 말미암아 형성된 마음의 병을 안고 사는 생들의 이면을 차분히 조명한다. 외계 생명체에게 아버지와 아내를 납치당한 제이와 배명호, 그들이 겪어야 했던 불가항력적인 이별은 그들의 삶을 망가뜨리고 말았다. 그들이 삶에서 마주하는 여러 국면에서 그 아픔은 이명 등의 물리적 고통으로 드러나기도, 타인에 대한 멸시나 자책감, 지나친 방어 본능 등의 심리적 차원으로 변조되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작가는 주인공 주변의 등장인물들 각각의 사연에 귀 기울여보고자 한다. 상실의 고통을 제각기의 방법으로 감내해왔던 제이의 엄마와 오빠, 그리고 잡지사 업무가 끝난 뒤 제이가 아르바이트를 하러 방문하는 파라다이스 성인 용품점 사장 ‘미스터 리’의 이야기는 자못 무겁게 읽힌다. 미스터 리는 예전 연인과 관계의 지속을 위해 끊임없이 상대의 주변을 맴도는 등 과하게 집착했다. 어느 날 이별을 원하던 연인을 억지로 붙잡다 그만 연인이 자신을 피하기 위해 차도에까지 뛰어드는 것을 본 그는 커다란 충격을 받은 채 일반적인 사람들의 발길에 잘 닿지 않는, ‘성인 용품점’이라는 자신 만의 방공호로 숨어들었다.
이렇듯 《안녕, 뜨겁게》는 제대로 이별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제대로 된 이별의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간절히 원하던 것은 바로 만남이 아니라 헤어짐이다. 그것도 아주 뜨겁게 헤어지는 것 말이다. 모든 것을 걸고 외계인에 그리고 세상에 맞서온 배명호를 통해 작가는 ‘진정한 사랑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진부하게 들리지만 결코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사랑을 찾아 지구를 넘어 우주를 헤매는 이 남자는 과연 정신병자이고 싸이코패스일까.
“지금 난 방공호에 있는 거야. 상처 받지 않으려고. 그래, 어떤 식으로든 내 곁을 떠나지 않겠지. 그렇지만 그게 다야. 사랑이란 마음이 떠날 수도 있고 변할 수도 있는 위태로운 거라 의미가 있는 거야. 상처 받을 수도, 상처 줄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거라 아름다운 거라고. 하지만 방공호 안에선 그냥 목숨만 이어가는 거야. 같이 맘 편히 햇빛을 볼 수도 없고 바람을 느낄 수도 없이.”
―271쪽
한편 작가는 세상이 우리에게 ‘옳다’고 가르친 것들에 대해 반문한다. 작가의 의문은 “쿨하게 이별하라”는, 그 지점에서부터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작품은 수많은 ‘쿨하지 못한’ 반례들을 제시하며 독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들을 안긴다. 남편을 잃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사랑을 갈구하고 찾아나서는 엄마, 카사노바 생활을 등지고 아이가 있는 여자와의 연애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체험한 제이의 오빠가 그렇다. 상실의 아픔을 넘어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마음을 열고 인연과 관계에 접근하는 그들의 모습은 독자들로 하여금 지나온 삶에 있어 무엇을 놓치며 살아왔나 반추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길고 긴 쓰라림의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침내 이별과 정면으로 마주하고자 하는 제이에게 기적 같은 순간은 때맞춰 찾아올 수 있을까. 확실한 한 가지는 제이 옆엔 그를 보듬어주고 어루만질 수 있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트라우마와 같았던 삶을 위로하는 치유와 성장의 서사를 통해 독자들은 다시 한번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 곱씹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중 가장 힘든 건 사랑이었다. 뜨겁게 사랑하고 쿨하게 이별하라고 하는데 그가 원한 것은 뜨겁게 헤어지는 것이었다. 질척대고 방황하고 매달리고 실컷 울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의 정리가 되는 그런 찌질한 이별 말이다.
그런 J는 20대 시절의 나이기도 했고, 나의 친구들이기도 했다.― 〈작가의 말〉에서
안녕, 뜨겁게 007
작가의 말 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