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편집장 이충걸의 에디터스 레터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리의 특별함
나의 무기는 날뛰는 호기심,
오감으로부터 오는 기분 좋은 감각,
이충걸의 가장 ‘지큐적’인 에세이
한 달에 한 번, 18년 동안 빠짐없이 그가 기록한 문장과 마침표
이충걸. 그는 오랜 시간 《GQ》의 편집장이었다. 《GQ》의 맨 처음 꼭지 ‘에디터스 레터’는 그의 한 달 치 몫. 한 달 동안의 부조리한 과거와 절박한 현재, 간교한 미래를 말해왔다. 그의 생각을 전달하기에 지면은 적어 보였다. 누군가는 그의 글을 읽기 위해 잡지를 산다고도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에게서 에디터 일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한때 사람들은 그를 떠올리면 무심코 ‘GQ’를 동시에 생각했다. 시간은 흘렀다. 100권, 200권, 300권이 출간되어도 그는 늘 잡지의 첫머리를 장식했다. 어떤 때는 문화의 예언자로서 혹은 비평가로서 해석하고 분석했다. 또 어떤 때는 선동가로서 사회 정치 예술 등을 대놓고 깠다. 담론으로 죽음 행복 고통 슬픔 사랑에 관해 대중들을 위무하고 위로하는 글을 썼다. 말하자면 그는 쓰면서 존재했다. 더 쓰거나 덜 쓸 뿐이었다. 18년 동안 그렇게 그는 《GQ》에디터 혹은 편집장이란 이름으로 살았다. ‘잡지 외에 모든 것을 수장시킨’ 삶을 산 사람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은 《GQ》 전 편집장 이충걸이 18년 동안 잡지 첫머리를 쓴 글을 모아 엮은 산문집이다. 눈을 뜨고 잠들기 전 눈을 감을 때까지, 잡지를 만들면서 눈에 잡히는 모든 것에 그의 감각적인 필터가 가 닿았다. 장르의 구분 없이 패션, 건축, 문학, 사회, 미술, 음악, 사람 등 전 방위적인 부분을 예민하게 매만지며 때로는 냉철하게 또 때로는 따듯한 시선으로 담아냈다. 또한 이충걸의 삶과 사랑, 또 패션에디터로서의 일과 예술적 감각적 시각, 한 인간으로서 내면의 움직임을 단 한 권으로 응축해 독자들에게 내보낸다.
미래의 환상 속에서 현재에 집중하는 지혜를 배웁니다
두려운 건 나보다 센 것들이 아니라 내 안의 연약함이다. 쾌락은 순간의 노예. 허무는 과거의 시종. 너무 늦어버려 더 이상 이끌어야 할 삶이 없을 때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지친 한쪽 발을 다른 쪽 앞에 놓는 것, 그것만이 전부일 뿐. ―본문 271쪽 중에서
여든 살이 된다 해도 나이 들어 깨달은 것들은 차라리 몰랐으면 하는 그다. 어떤 지혜는 지금의 네 자신보다 더 나은 나를 상상해주지만, 그는 조심히 충고한다. 내 안의 연약함에 대해. 이 차가운 확신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의 글 중에서 가장 자주 눈에 띄는 단어는 미래와 현재다. 과거는 중요한 테제가 아니다. 삶이 고통 없이 흘러가거나 의미조차 찾지 않는 우리들의 현재. 그는 질문한다. 세계가 왜 존재하며 왜 이 모양 이 꼴로 굴러가는지 의문을 품으라고. 그 의문은 중요한 삶의 동력이자 불투명한 미래를 걸어가는 데에 필요한 플래시가 된다고 말이다.
모든 문제는 아닌 척해도 다 자기가 불러들인 일
위축된 자신감으로 살진 않을래. 그냥 별이 빛나는 어둠 속에서 나를 숨긴 채 천체에 대해 자각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거야. 나보다 잘났단 이유로 그들을 미워하지 않을 거야.
―본문 112쪽 중에서
누구도 삶이 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또 삼각함수처럼 풀기 난해한 문제도 아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만의 해법으로, 방법으로 삶을 산다. 때로는 깊게 침잠하면서 또 때론 삶의 얕은 수면 위에 부유하는 소금쟁이처럼. 우리는 흔히 ‘마음을 바꾸세요’ ‘용기를 내세요’ 같은 말들을 습관처럼 하고 무심코 들으며 살아왔다. 이충걸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인이 되기를 말한다. 시선의 주권을 남에게 빼앗기는 일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타인의 관점보다는 자신의 기준이 무엇인지 아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내게 의미 있고 상징화된 것들, 내 삶을 꾸리는 무늬들에 더 집중하라고 말이다.
상식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은 가끔 환상이 되었다
대부분의 우리는 증명해야 할 것이 많은 삶을 산다. 만족하고 만족시켜야 한다는 강박으로 분투한다. 삶은 우화가 아니고 중독은 근거가 아니므로. 하지만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타인의 희망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본문 337쪽 중에서
방대한 뉴스, 문화의 조건들, 사회·정치적 이슈가 빠르게 휘몰아치고 빠르게 빠져나간다.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의 속도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빠르다. 우리는 오감이 피로하다. 욕망을 피하느라 지치고 모든 걸 빠른 속도로 판단하느라 나가떨어졌다. 이충걸은 그렇다고 이 속력에 반하는 브레이크를 넣자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단지, 어느 하루. 모든 자극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잠시 주변의 소리를 끄고 침묵해보자는 것. “느릿느릿 호흡하다 보면 심장이 웃는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권하고 주문한다. 그리고 가만히 찾아오는 질문에 답할 준비를 하라고 말한다. “당신에게 나는 좋은 친구일까? 나는 아름다움을 배웠을까?” 같은 질문들.
말해주세요,
너는 날달걀에서 쏙 빠져나온 노른자처럼 선명하고 윤기 난다고
결국에 그가 매번, 자주 말해왔던 건 우리들에게서 사소하게 빛나는 윤기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복잡한 세상과 얽혀 있는 더 복잡한 관계 속에서 사소하게 빛나는 우리들의 작은 아름다움 같은 것들. 어렵고 난해한 문화의 퍼즐 속에서 보통으로 보이는 작은 미학에 관한 조각들을 맞춰보는 것. 고층 건물들 속 납작 엎드린 작은 집들 사이로 난 모세혈관처럼 뻗은 골목 같은 것들. 그는 단지 그것을 탐색하고 발견해 글로 썼다. 18년. 그의 시선에 잡힌 것들은 그 오랜 시간 동안 한국에서 사소하게 윤기 났던 순간들의 기록이라 할 만하다. ‘편집장’이란 이름으로 그에게 붙들린 것들의 온전한 집이 하나 마련되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리들의 특별함의 목록이 마련된 셈이다.
INTRO – 5
1장 과잉
2장 반란
3장 피상성
4장 남자
5장 행인들
6장 외양
7장 혼자
8장 어제
OUTRO – 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