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감각의 형태

지음 정지은

브랜드 은행나무 | 발행일 2023년 3월 31일 | ISBN 9791167372826

사양 변형판 120x190 · 172쪽 | 가격 9,900원

시리즈 배반 인문학 17 | 분야 인문

책소개

“말을 가진다는 것은 세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자아와 타인, 세계를 감각하는 ‘말’의 기원과 본질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력

챗GPT 등 인간과 대화하는 인공지능이 나타나면서 대화나 글쓰기를 비롯한 인간의 언어활동을 대체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이미 사진과 동영상의 발명, 유튜브의 등장 등 언어보다 직관적인 표현 수단이 나타날 때마다 말은 조금씩 쇠퇴하는 듯 보였고, 최근 몇 년 동안은 ‘명징하게 직조’하거나 ‘심심한 사과’, ‘사흘’ 등 문해력 논란이 이어져 왔다. 이제 말은 인공지능에 의탁하거나 다른 표현 수단으로 대체하거나 의미만 전달하면 되는 수단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그러나 인간에게 말은 정말 단순한 도구에 불과할까? 우리가 숨 쉬듯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즉 우리 삶의 근간을 이루는 말은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고 어떤 가치가 있는 걸까? 배반인문학 열일곱 번째 책 《말, 감각의 형태》는 말의 기원에 대한 탐구에서 출발해 말에 관한 철학들을 검토하여,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말이 지닌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재구성하는 책이다.
저자는 프랑스 철학자 루소가 《언어의 기원》에 서술한 최초의 말에 대한 추측으로부터 처음으로 인간의 말이 터져나오는 순간을 상상한다. 최초의 말에는 두려움이든 기쁨이든 인간의 감정이 담겨 있었을 것이며, 이렇게 터져나온 음성언어는 문자언어를 낳고, 문자언어는 논리와 문법을 파생시켰다. 이러한 언어는 소쉬르에 의해 표현하는 대상(기표)와 언어기호(기의)로 나뉘고, 아기가 처음 말을 배우는 순간을 분석하는 프로이트와 라캉에 의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근간을 떠받치는 하나의 기호로 분석된다. 메를로퐁티는 말을 하나의 몸짓으로 분석하며 기호를 넘어선 말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한다. 말에 관한 철학적 분석과 더불어 저자는 실어증에 걸린 사람, 말을 나눌 타자가 부재한 무인도, 예술적 표현·은유로서의 말 등 말의 본질과 의미가 드러나는 순간을 포착한다.

 

감정과 함께 터져나온 최초의 말
-언어는 무엇을, 왜 표현하는가?

최초로 언어를 발화한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는 한, 말의 기원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장 자크 루소는 이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언어의 기원》을 집필해 최초의 말에 대해 탐구한다. 루소는 왜 찾을 수 없는 답에 관한 책을 쓴 걸까? 언어의 기원, 언어가 탄생하는 순간을 탐구하는 것은 곧 언어의 본질을 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소는 언어를 인간의 오감 중 가장 중요한 두 감각인 청각과 시각에 대응하는 음성언어와 몸짓언어로 나누어 언어의 기원을 설명한다.
시각에 기초한 몸짓언어는 욕구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언어다. 밥을 먹고 싶을 때 먹는 시늉을, 잠을 자고 싶을 때는 잠자는 시늉을 하면 된다. 즉 원하는 바를 그대로 몸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몸짓언어는 주로 생존에 관한 욕구를 표현한다. 과거 인간은 욕구를 표현하는 몸짓언어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루소는 몸짓언어는 정신적·심적 욕구인 정념을 표현하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인간은 슬픔과 두려움, 기쁨, 사랑 등의 정념을 표현하기 위해 음성언어를 발달시켰다고 말한다. 나아가 상업 교류가 발달하면서 음성언어를 기록할 수단이 필요해졌고, 이를 위해서 문자언어가 등장했다고 말한다. 즉, 루소는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정념의 표현’에 있다고 보았고, 이를 언어의 기원으로 설명한 것이다.
루소는 음성언어와 정념의 표현이야말로 인간의 생명력을 표현하는 언어의 본질적인 측면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문자언어로 전개되는 논리학의 발달이나 문법을 체계화하여 인위적으로 언어를 구조화하는 시도가 언어의 생명력을 시들게 한다고 보았다.

 

언어를 얻고 자신을 잃어버리다
-언어를 통해 기표의 세계로 들어가는 인간과 존재의 죽음

루소는 인류가 처음으로 말을 연 순간에 주목하지만, 프로이트와 라캉은 우리가 첫말을 떼는 순간, 즉 아기가 언어를 배우는 순간에 주목한다. 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주어진 언어의 세계로 들어선다. 그러나 아기는 언어를 모르고, 그런 아기에게 끊임없이 말을 거는 것은 (상징적) 어머니다. 아이는 어머니를 보며 자신이 모르는 세계(언어의 세계)가 있음을 짐작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이때 (상징적)아버지가 나타나 알 수 없는 말을 어머니와 나누는 모습을 보며, 아기는 언어의 세계가 무엇인지 이해해나간다. 나와 어머니라는 2자 관계에서 아버지를 포함한 3자 관계, 나아가 사회의 존재를 알아간다. 그렇게 아기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자녀인 나’라고 사회 속에 존재하는 자신을 말하고 인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아기가 배우는 언어의 세계, 언어 규칙은 실제 세계와는 직접적 연관이 없는 기호다. 언어학자 소쉬르가 말했듯, 실제의 나무(기의)와 나무를 가리키는 언어기호 ‘나무’(기표)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라캉은 언어의 세계가 곧 이러한 기표의 세계이며, 인간은 기표의 세계인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주체로 거듭난다고 말한다. 따라서 언어기호, 기표를 이해하면서 언어의 세계로 진입한 아기는 실제의 자신을 대신하는 기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아기의 존재는 기표로 대체되면서 상징적 죽음을 맞이한다.
기표를 중시하는 라캉과 달리 정념을 표현하는 음성언어를 중요하게 바라본 루소처럼, 소쉬르 역시 ‘우리는 언어기호인 문자보다 음성언어를 먼저 배웠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라고 말하며, 음성언어의 표기인 언어기호를 음성언어보다 중시하는 현상을 비판한다. 루소, 라캉, 소쉬르 모두 말에는 단순히 기호로 표현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암시한다.

 

말은 세계를 향한 하나의 몸짓이다
-고유하면서 보편적인 몸짓으로서의 말

몸의 철학자로 불리는 메를로퐁티는 말 또한 발음기관을 통해 소리를 내는 하나의 몸짓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몸짓은 늘 세계를 향하고 있는데, 예컨대 컵을 드는 손의 움직임은 컵을, 퇴근하는 발걸음은 집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말도 발화되는 순간 주체가 표현하려는 의미를 향하고 있으며, 이는 단순히 기의(개념)와 기표(단어)로 분해되지 않는 몸짓이다. 의미와 몸짓의 관계는 예술에서 표현하려는 의미와 표현의 관계에 빗대어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화가가 그린 그림(표현)에서 표현하려는 의미를 찾으려 하며, 표현과 표현하려는 의미 사이에 간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말 역시 표현하려는 의미와 표현(언어기호)로 이해할 수 있으며, 둘은 무관한 대상이 아니다. 예를 들어 아기는 ‘창문’, ‘빗자루’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언어기호를 습득하며 언어기호를 대상이 지닌 속성처럼, 혹은 대상과 등치하여 이해한다. 즉 모국어 화자에게 모국어의 언어기호는 지칭하는 대상과 분리되지 않으며, 기표와 기의가 임의적으로 연결되었을지라도 말은 언어기호를 사용하는 주체의 몸짓으로서 기호 이상의 의미를 함의하는 것이다.
이처럼 말은 주체가 세계를 인지하고 이해하는 방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말을 익히고 사용하는 것은 내 몸이 감각하는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이며, 언어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자 언어라는 주체의(동시에 공통의) 몸짓을 배우는 것이다. 따라서 말을 갖게 될 때, 우리는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나만의 세계를 갖는 것이다.

목차

들어가며

1장 언어에 대한 성찰들
필요의 말, 정념의 말, 논리의 말   
아기에게 말은 어떻게 도래할까?   
파롤과 랑그   

2장 살아 있는 말과 세계
말하는 말과 말해진 말  
말을 잃어버린 여자아이  
무인도에 도착한 로빈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3장 감각과 말
살 또는 감각의 언어들
감각, 예술, 사랑, 해독해야 하는 기호
은유, 이해하는 마음과 공감의 장

나가며  
참고문헌

작가 소개

정지은 지음

연세대학교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에서 수학한 뒤, 프랑스 부르고뉴대학교에서 철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홍익대학교 교양과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박사 학위의 주제였던 메를로퐁티의 현상학과 존재론 외에도 정신분석학, 예술철학으로 연구 영역을 넓히고 있다. 번역서로는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유한성 이후》 《철학자 오이디푸스》 《알튀세르와 정신분석》 《몸: 하나이고 여럿인 세계에 관하여》가 있고,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이성과 반이성의 계보학》 등 여러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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