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기억
* 은행나무 ‘노벨라’가 은행나무 ‘시리즈 N°’으로 새롭게 시작합니다.
2014년 론칭해 2016년까지 총 13권을 출간하고 잠시 멈춰 있던 은행나무 노벨라 시리즈가 새로운 명명과 지금 이 시대를 대표하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으로 다시 출간됩니다. 배명훈 최진영 정세랑 안보윤 황현진 윤이형 문지혁 등 3~4백매 분량의 중편소설 시리즈로 한국문학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던 ‘은행나무 노벨라’. 그 의미를 동력 삼아 현재 한국문학 장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젊은 작가들의 장편소설선 ‘시리즈 N°’으로 바통을 건네받아 이어갑니다. 이번 신작 3종(박문영, 장진영, 황모과)을 비롯해 구간 리커버(최진영 윤이형 황현진, 이하 순차적으로 리커버)를 동시에 출간하며 서이제 장희원 한정현 정용준 정지돈 등 각자의 개성과 상상력이 담긴 작품들을 선보일 계획입니다. 문학에서 발견하는 그 위태롭고 무한한 좌표들로 한국문학의 새로운 지도를 완성해갈 시도를 독자 여러분께서도 함께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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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하나를 기억하기 위해 세계를 잊다…’
윤이형 소설 《개인적 기억》
시리즈 N° 리커버 출간
윤이형의 《개인적 기억》은 과잉기억증후군에 걸린 남자를 주인공으로, 자아와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는 개인적 기억의 의미와 가치를 묻는 소설이다. 작가는 어머니 장례식 후 보르헤스의 소설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필사하는 것으로 촉발된 주인공의 ‘기억 여정’을 통해 기억과 망각의 섬세하면서도 치열한 싸움의 과정을 고스란히 형상화해낸다.
그동안 발표하는 작품마다 평단과 독자들로부터 ‘미래적이고 낯설고 혁신적이다’라는 평가를 받아온 작가는, 이번 소설 《개인적 기억》에서도 현실과 가상, 현재와 미래의 이분법적 구분을 뛰어넘는 통합적 상상력과 의식의 흐름을 보여주는 기존 소설과의 상호텍스트성, 특유의 사유적 문장들로 독자를 새로운 소설의 세계로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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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하지 않을 것들의 애틋함,
슬픔의 태도에 관한 은유
책을 읽어야겠어. 나 자신의 목소리가 다시 내게 속삭였다. 저길 다시 책들로 가득 채워. 하나씩 하나씩 꺼내 펼치고, 첫 페이지부터 읽는 거야. 천천히. 뭘 위해서? (…) 아마도 보통 사람들이 직관이라 부를 만한 것으로 나는 알았다. 내가 그 소설을 한 자 한 자 모니터 위에 받아 적어야 하며, 그 일을 끝낸 뒤에야 어떤 다른 책을, 아마도 세상의 다른 모든 책들을 읽을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이것이 숨겨져 있던 진짜 관문이며, 그것을 통과한 다음에야 내가 남은 삶을 살아낼 수 있으리라는 것을. _본문 15~16쪽
소설은 2058년 어느 날,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상심에 잠긴 ‘나’(지율)의 결심에서 시작한다. 그는 과거에 과잉기억증후군으로 고통받았지만 현재는 기억을 통제하는 훈련과 약을 통해 평범한 기억력을 갖게 된 사람이다. 책을 펼치면 단어에 관련된 모든 기억이 떠오르는 탓에 난독증을 앓았던 지율은 문득 ‘책을 읽는’ 행위가 지금 자신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리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집에는 책이 한 권도 없었으므로 그는 유일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한 권의 책 보르헤스의 소설집 《픽션들》 중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떠올리고 기억에 의존해 한 자 한 자 컴퓨터 화면에 받아 적기로 한다. <기억의 천재 푸네스>는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 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능력을 갖게 된 남자의 이야기로, 한 번 본 것을 결코 잊지 못하는 지율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푸네스 쪽이 훨씬 더 뛰어난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푸네스와는 달리 지율 자신은 기억에 짓눌려 삶이 없어지기 직전인 상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것. 20년 전 어느 날 기억 속 ‘그녀’(은유)가 읽어준 이 소설은 글자가 아닌 소리로서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다.
나는 키보드에 손을 얹고 새문서 파일을 열었다. 첫 문장은 쉬웠다. 예상보다는 쉬웠다. ‘나는 손에 칙칙한 빛깔의 <시계초>를 들고 있던 그를 기억한다.’ 그다음 두 문장은 어쩐지 주저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건 그것들이 괄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주의를 집중하자 그것들은 순순하게 기억에서 끌려나왔다. ‘(나는 <기억한다>라는 이 신성한 동사를 입에 올릴 자격이 없다. 지구상에서 단 한 사람만이 그러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데 그 사람은 이미 죽었다.)’ _본문 17쪽
통제할 수 없는 끌림으로 지율은 오로지 기억 속 목소리에 의존해 수일에 걸쳐 <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문장들을 적어 내려간다. 개인적인 삶에 속하는 기억이라는 이유로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문장들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조금씩 의심과 두려움으로 치환된다. 작품 속에 실제로 그러한 문장들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에 그는 책을 구해보기로 한다. 그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전화해 거의 육십 년 전에 출간되었던 민음사 판본의 보르헤스전집 2권 《픽션들》, 1994년에 1판 1쇄가 출간되고 1판 31쇄인 그 책을 수소문한다.
며칠 뒤 책을 입수한 그는 머릿속에 들어 있는 <기억의 천재 푸네스>와 한 번도 읽어본 적 없는 그 소설의 원본 텍스트를 천천히 대조한다. 몇 시간에 걸친 대조 작업을 끝마친 그의 머릿속에 열한 자리 전화번호가 떠오른다. 기억이 또 다른 기억을 소환하는 것이다. 오래전 그녀가 전화번호를 적어준 냅킨 가장자리의 무늬가 선명하게 그려지고, 그것을 만졌을 때의 촉감이 손끝에 되살아난다. 지율은어쩐지 은유가 자신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에 사로잡히며 회상에 잠기는데……
삶에 관계된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와, 삶이 너무 시시해서 의식적으로 기억하기를 거부하는 여자. 오래전 연인이었던 두 사람의 빛바랜 기억에 따스한 숨이 입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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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로 요약될 수 없는
우리 삶에 바치는 문학적 헌사
우리는 살면서 많은 순간을 마주친다. 의미 있는 순간은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어 하고, 끔찍한 순간은 빨리 잊고 싶어 한다. 기억력이 남들보다 조금 좋을 순 있지만 《개인적 기억》의 지율이나 <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푸네스처럼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다. 산다는 것은 기억을 보태는 일이고 또 망각해가는 과정이니까. 대체로 기억은 편집과 요약의 결과이고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회상이 단 한 줄의 문장으로 남기도 하는 법이다.
《개인적 기억》에서 작가는 초기억력을 가진 주인공 지율을 통해 한 줄로 요약될 수 없는 개인의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설파한다. 지율의 기억력은 너무도 왕성해서 “기억이라는 괴물과 싸우고 있다”고 표현할 정도로 현재의 삶을 괴롭힌다. 그에게 모든 순간은 선택 불가능하지만 기억할 만한 어떤 것이다. 반면 점점 기억력이 약해지는 은유에게 삶은 기억할 거리가 없는 시시한 순간의 연속이다.
《개인적 기억》은 스스로를 무력한 개인일 뿐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위한 소설이다. 작가의 말’에서 윤이형은 보잘것없는 개인, 의미 없는 개인의 기억은 없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기억은 미래이다. 무엇을 기억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달라진다. 사랑하는 한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면, 그것도 꽤 특별하고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 이제 당신은 무엇을 잊고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개인적 기억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