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로스코, 내면으로부터
“마크 로스코의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다”
그림으로 인간의 본질을 전하고자 했던 캔버스 위의 철학자,
마크 로스코에 관한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해설
색면추상화의 거장 마크 로스코의 거대한 그림은 관객을 압도하는 동시에 난처하게 만든다. 강렬한 빨강과 화사한 노랑은 기쁨의 표현일까? 그가 자살하기 전에 그렸다는 검은색과 잿빛의 캔버스는 화가의 절망을 담은 것일까? 왜 화가는 사각형만 덩그러니 그려둔 걸까? 마크 로스코의 아들이자 평생 아버지의 예술 세계를 탐구해온 크리스토퍼 로스코는 색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는 모두 헛되다고 말한다. 로스코는 색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며, 캔버스 속 직사각형은 그림이 그림을 보는 ‘당신’에 관한 것임을 암시한다. 로스코의 그림은 이 세상의 ‘어떤 것’에 대한 그림이 아닌 당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그림이며, 안쪽이 반투명하게 비치는 로스코의 색면은 당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영혼의 창이다.
신간 《마크 로스코, 내면으로부터》는 30여 년간 아버지 마크 로스코의 유산을 관리하며 전시를 기획하고 그의 예술 세계와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을 강연해온 아들 크리스토퍼 로스코가 펴낸, 마크 로스코의 그림과 생애에 관한 가장 완전한 해설이다. 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읜 저자는 아버지에 대한 희미한 기억, 본능적인 이해와 애착을 갖고 수십 년 동안 그림을 통해 마크 로스코를 알아갔다.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아버지를, 마크 로스코라는 위대한 화가를 이해하기 위해 지속해온 수십 년의 탐구를 온전히 풀어낸 것이다.
대공황 시기의 삭막한 도시 풍경과 인물을 묘사하던 1920~1930년대, 신화의 소재를 활용한 1940년대 초현실주의 시기, 이후 과도기적 ‘다층형상’을 거쳐 ‘색면추상’으로 대표되는 고전주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마크 로스코의 예술 세계 전체를 톺아보며 마크 로스코가 그림으로 무엇을 전하고자 했는지 이야기한다. 동시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그려낸’ 위대한 예술가이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고 때로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던 한 명의 인간 마크 로스코를 드러내 보인다.
“예술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모험이며,
위험을 감수하려는 자만이 예술을 탐험할 수 있다.”
로스코의 그림과 함께 내면의 미지를 탐구하다
로스코는 어째서 캔버스를 색으로 가득 채웠을까? 그가 처음부터 추상화를 그린 것은 아니었다. 1920~1930년대에는 경제 대공황으로 고통받은 인물을 묘사하는 사실주의 화가였고, 1940년대 중반까지는 신화적 소재를 바탕으로 초현실주의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가 그림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것은 “비극, 황홀경, 운명”과 같은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과 감정이었고, 사실주의와 초현실주의는 이를 전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캔버스 속 형상들, 즉 풍경, 인물, 추상적 형태가 모두 자신의 목표를 방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형상’이 현실의 어떤 대상을 묘사하는 것인지 궁금할 뿐, 그가 전하고자 하는 보편적인 경험과 감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을 감상하며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길 바랐다.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과 경험이 모두의 내면에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추상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색의 관계나 형태,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단지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들, 비극, 황홀경, 운명 같은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_마크 로스코
그는 어떠한 것도 재현하지 않는 순수한 추상화만이 어떤 사람에게도 동등한 방식으로 다가갈 수 있고, 관객 역시 아무런 선입견을 지니지 않는 상태로 감상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에게 추상은 목표가 아니라 적합한 표현 도구였다. 로스코는 모든 형상을 지우고 묽은 물감을 층층이 쌓아 안쪽에서 빛을 발하는 색면을 그렸고, 이 “내면의 빛”으로 관객이 그림과 교감하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도록 만들었다. 로스코의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관객은 그림이 아닌 자신의 내면 속 미지의 세계에서 감동을 발견한 것이다. 마크 로스코의 색면추상화는 누군가 바라보기 전까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그림 앞에 선 관객과 교감하는 순간, 그림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는 추상화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관객에 의해 모든 것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림은 동반자적 관계에 의해 살아나고, 섬세한 관찰자의 시선에 의해 확장되고 활력을 얻는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죽는다.”
_마크 로스코
“로스코의 그림을 이해하는 여정은 곧 로스코를 이해하는 여정이다.
작품에 로스코라는 한 인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 뒤에 숨겨진 평범한 인간에 관하여
저자는 거대한 색면추상화 너머에서 화가 마크 로스코가 늘 관객을 엿보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관객과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주제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예술가였다. 눈길을 끄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관객을 사로잡기보다 그는 그림으로 관객과 소통하고 감동을 주는 데 관심이 많았다. “그림을 음악과 시만큼이나 감동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화가가 된 로스코는 관객들이 그림을 보고 감동해서 운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눈물을 흘리는 이들은 그림과 교감하며 그림 속에서 자기 자신을,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마크 로스코를 발견한 것이었다.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은 내가 그것을 그릴 때 경험한 것과 똑같은 종교적 체험을 하고 있다.”
_마크 로스코
로스코는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을 자신의 의도대로 감상해주길 바라며 사람들의 반응에 일희일비했다. 그는 자신의 비범함을 뽐내는 예술가이기보다 대중과 소통하며 사랑과 존경을 받고 싶은 한 인간이었다. 자신의 작품이 올바른 방식으로 전시되어 관객이 온전히 감상할 수 있길 바랐고, 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로스코가 유명해질수록 사람들은 그의 언행과 작품을 연관 지으며 그의 예술 세계를 오해했고, 로스코는 자신의 상처와 좌절감을 거친 언행으로 드러냈다.
저자는 로스코와 그의 작품을 둘러싼 오해와 편견을 걷어내기 위해 그의 삶을 되돌아본다. 로스코의 그림을 ‘절망’이나 ‘우울’의 상징으로 축소해버리는 그의 자살에 얽힌 오해, 로스코에게 예술적 자신감을 주었던 두 번째 아내 ‘멜’, 로스코에게 깊은 좌절과 전성기를 함께 가져다준 시그램 벽화 사건, 열 살에 라트비아를 떠나 유대인 이름을 버린 유대인 예술가 ‘로트코비치 마르쿠스(마크 로스코의 본명)’의 이야기는 그가 어떤 예술가였고 그의 작품을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말해준다.
마크 로스코는 모든 인간은 평범하며, 평범한 인간이야말로 평범함을 뛰어넘는 엄청난 것을, 불완전한 자신의 존재를 뛰어넘는 위대한 예술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을 담아내려는 로스코 역시 지극히 인간적인 사림이었고, 이는 로스코에게 위대한 예술가가 되기 위한 조건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마크 로스코를 사랑하는 이유는, 우리처럼 평범한 인간으로서 시대를 뛰어넘는 위대한 예술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감사의 글
프롤로그
마크 로스코와 내면세계
이것은 냉장고가 아니다
형식의 조용한 지배
크기의 폭정
《예술가의 리얼리티》 마크 로스코의 수정 구슬
STACKED
로스코 예배당 침묵 속 우리의 목소리
시그램 벽화 서사시와 신화
무제
마크 로스코와 음악
로스코들의 유머
<검은색과 회색> 연작
종이 작품 상자 밖에서
반 고흐의 귀
다우가우필스를 거쳐 드빈스크로 돌아오다
황홀한 멜
마크 로스코와 크리스토퍼 로스코
미주
색인
그림 목록 및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