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로 본 사족의 의례 생활
예禮의 나라, 조선을 통치한 사족과
그들의 삶을 관통한 의례를 통해
조선의 내밀한 모습을 재구성하다!
오랜 시간 민간에서 소장해온 일기와 편지 등의 사료를 발굴‧번역해온 한국국학진흥원 인문융합본부가 ‘국학자료 심층연구 총서’ 제26권 『일기로 본 사족의 의례 생활』를 출간했다. 조선시대 의례는 사족들의 삶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이 시기 사족들은 관례, 혼례, 상례, 제례, 그리고 관직에 나아가 참여하는 국가 전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의례적 절차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해나갔다. 특히 이들이 남긴 일기 속에는 의례 생활과 관련된 다양하고도 개인적인 경험이 잘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운천호종일기』에는 임진왜란의 전쟁기, 국가의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 이루어진 선조의 외교 의례가 어떻게 시행되었는지 면밀히 나타나 있다. 또한 16세기 후반, 나라의 재앙을 쫓고 복을 기원하던 기양제의 의미를 담고 있는 『초간일기』도 눈길을 끌며, 『역중일기』, 『하와일록』 등에는 18세기 사족 집안에서 치러진 관혼상제의 예가 사례별로 잘 드러나 있다. 마지막으로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가 승문원에 발령받은 후 치러야 했던, 일종의 신고식이었던 면신례에 대한 기록도 흥미롭다. 소중한 선조들의 기록 유산을 통해 조선시대 의례 생활의 생생한 실상과 조선의 내밀한 모습을 들여다보자.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존망의 위기 속
불타버린 종묘보다 명 황제에 대한 예를 선택한 선조의 굴욕 외교
임진왜란이라는 대규모 전란기는 백성은 물론 왕실과 정부도 피난길에 오르게 된 초유의 비상시국이었다. 조선은 오례五禮를 중심으로 국가의례를 주관해온 나라이지만, 전란을 맞아 이를 그대로 구현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명군이 조선에 파병되어 있었으므로 명나라 사신에 대한 외교적 의례가 더욱 중요했다. 이 시기, 선조를 호종扈從(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는 사람)하며 사관史官이었던 김용이 선조 26년 8월부터 12월, 선조 27년 6월까지 자신이 선조를 모시며 직접 보고 들은 사실을 기록해 3책 분량의 필사본 『운천호종일기雲川扈從日記』를 남겼다.
이 일기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선조는 임진전쟁 초반에는 명나라에서 조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게 하려는 의도로 명 사신과의 접견과 연례 절차를 초라하게 준비하면서 조선의 어려움을 전달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선조 26년 평양 탈환 이후 강화교섭 시기에 접어들면서는 선조가 몸소 명군을 예우하고, 명 장수에 대해 감사의 뜻을 담은 배례인 사배와 고두례를 행하거나 명 하졸들까지 예의하려고 하였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정해진 절차가 아닌 사배를 추가로 시행한다거나 황제가 아닌 명 제독을 위해 고두례를 시행한 것은 조선이 처해 있었던 특수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존망의 갈림길에 서 있었던 선조는 국왕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예우를 동원해 명나라의 원조를 이끌어내고자 했고, 이후 선조는 환도하면서 불타 버린 조선의 종묘와 명 황제 가운데 어느 쪽에 먼저 예를 표할지 논의하는 과정에서 사적인 예보다는 중국에 대한 사은이 먼저라고 말할 정도로 외교 의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국가의 어려움은 곧 위정자 부덕의 탓…
유교적 통치의 중요 수단으로 활용된 기양제
조선시대에 수령은 국왕의 통치를 대행하는 존재였고, 수령의 주요 직무 중에는 지역의 행정이나 민사를 보는 일 외에도 각종 의례를 제주로서 집전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이 시기 국가에 긴급한 재난이나 어려움이 발생하는 것은 곧 위정자의 부덕이나 잘못 때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기양제祈禳祭(재앙을 쫓고 복을 비는 제사)는 매우 중요한 의례였다.
16세기 후반 조선 중기 문신이었던 권문해가 남긴 『초간일기草澗日記』에는 자신이 수령으로서 거행한 각종 기양제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가뭄이 지속되자 장님 무당이나 승려와 같은 비유교적 인물들을 모아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고, 제사를 지내줄 후손이 없이 억울하게 죽어 전염병을 일으킨다고 여겼던 여귀厲鬼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한 여제厲祭를 지내기도 했다. 혹은 성변星變(별의 위치나 빛에 이상이 생김)이나 지진과 같이 괴이한 기상 이변 현상이 생겼을 때에는 해괴제解怪祭를 행하거나, 물난리가 났을 때는 날이 개기를 빌면서 기청제祈晴祭를 지낸 기록도 남아 있다.
조선 시대 관혼상제에 나타난 사족의 삶
성장과 함께 체득해나간 유교식 일생 의례
『하와일록河窩日錄』은 안동 하회에 살던 류의목이라는 사족이 12세에서 18세까지(1796~1802년)10대 시절에 쓴 일기다. 조선시대 사족의 10대 시절 기록은 그 자체로 귀하기도 하거니와 어떤 교육을 받으며 조선 사족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하였는지를 잘 보여주기에 중요한 사료다. 이 기록에는 15세 때 부친상을 치르며 시묘살이를 하지 않고 신주를 집으로 모셔오는 반혼의 모습, 상례 중 유교적 결례를 범해 친족들의 도움을 받는 상황, 국상이 있을 때는 소상을 연기하거나 친족들의 상례 참여 등을 통해 복잡한 의례 절차를 배워나가며 류의목이 성장하는 모습이 소상히 묘사되어 있다. 특히 『가례』를 준용하되 일부 속례 관행을 실행한 점이 눈길을 끄는데, 이는 류의목의 관혼례에서도 잘 드러난다. 류의목은 3년 부친상을 마치고 혼례를 올리기 위한 사전 단계로 간소하게 관례를 치른다. 이때 혼례를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즉 신부 집에서 혼인을 치르고 일정 기간 그대로 친정에 머물다가 시가로 가는 방식인 신속례로 행하는데,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도 『가례』를 따르되 일부 시속時俗의 현실을 반영하는 의례를 따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시대 사족들의 제례 시행은 백불암 최흥원이 쓴 일기인 『역중일기曆中日記』에 잘 나타나 있다. 최흥원은 종가의 종자로서 기제사를 실천했지만 무조건 절대적 가치로 여긴 것은 아니고, 질병 등 일상에서 여의치 않은 상황이 발생할 때에는 가족에게 위임하기도 했다. 8, 9촌까지 넓은 일족이 참석했던 기제사는 ‘궐명厥明(날이 바뀌는 첫 새벽, 망자가 사망한 당일 새벽)’에 제상을 준비하고 ‘질명質明(날이 밝으려 할 무렵)’에 참여자들이 의복을 갖추어 입고, ‘닭이 울면’ 시작하는 식의 시간적 기준에 따랐다. 공간은 집 안 내 대청이나 안채 등은 물론, 초당, 산소 아래 촌집, 혹은 아우의 집에서 지내기도 했는데 이때는 신주를 내지 않고 지방을 써서 지냈다.
책머리에
1장
『운천호종일기』에 수록된 임진전쟁기 선조의 외교 의례 시행과 의미 • 신진혜
머리말 | 임진전쟁기 외교 의례의 양상 | 『운천호종일기』 선조 26년 8월의 의례 기록 분석 | 맺음말
2장
권문해의 『초간일기』에 기록된 16세기 후반 외방 기양제의 사례와 그 의미 • 김성희
머리말 | 권문해의 생애와 『초간일기』 | 『초간일기』 수록 기양제의 기사의 역사성 | 『초간일기』 수록 기양제의 치제 기록 분석 | 맺음말
3장
18세기 대구 옻골 최흥원 가족의 기제사 실천 양상 • 박미선
머리말 | 백불암 최홍원과 그의 가문 | 기제사 실천의 양상 | 기제사 실천의 특징 | 맺음말
4장
『하와일록』을 통해 본 안동 사족 류의목의 일생 의례 • 윤혜민
머리말 | 부친 류선조에 대한 상례 | 관례와 혼례의 실행 | 맺음말
5장
일기를 통해 본 승문원 관원의 면신례 시행 양상 – 『계암일록』과 『청대일기』를 중심으로 • 임혜련
머리말 | 문과 급제자의 승문원 분관과 면신례 | 면신례의 시작, 신급제 침희 | 승문원 권지의 회자 | 허참례 시행, 면신례의 마침 | 맺음말 : 면신례의 폐해, 그럼에도 중요한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