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후, 향촌 사회 복원에 앞장선 대구의 선비 손처눌.
30여 년 동안 기록해온 그의 일기를 통해
위기의 시대 속 지식인의 역할과 삶을 살펴보다
오랜 시간 민간에서 소장해온 일기와 편지 등의 사료를 발굴‧번역해온 한국국학진흥원 연구 사업팀이 한 해 동안 연구한 결과를 단행본으로 묶어 출간하는 ‘국학자료 심층연구 총서’ 제20권 『모당일기』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철학, 사학, 문학 등 관련 전문가를 초빙하여 꾸린 공동연구팀이 17세기 대구 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 모당 손처눌이 30년 동안 쓴 일기를 연구하여 집필한 결과물이다.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겪으며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국토 곳곳이 불타버렸다. 지역사회를 유지하던 물적 기반과 공동체가 무너져 민중들의 삶이 황폐해졌다. 이때 일본군의 진격로이자 병참기지로 활용되어 큰 피해를 입은 대구에서는 전란의 피해를 극복하기 위해 사림(士林)들이 나섰고, 모당 손처눌은 그 중심에 있었다. 그는 관직을 역임하지 않고 지역사회에 헌신한 재야의 지식인이었다. 그는 연경서원을 재건하고 향교의 업무를 도맡으며 강학 활동에 힘썼고 일상에서도 유학자의 모범을 보인, 지역의 여론을 대표하는 명망 있는 사대부였다. 이 책은 이러한 손처눌의 일기를 통해 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의 일상생활과 지역 사림을 결집시키고 교육 사업에 매진한 사대부의 행적을 탐구하여 위기의 시대를 살아간 뜻 있는 지식인의 면모와 당대 사림들의 생활상을 밝히고 있다.
사림의 결속과 공교육의 강화로
지역 공동체를 재건하기 위해 힘쓰다
손처눌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했고, 전쟁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대구 지역의 여론을 선도하는 사림이 되었다. 당시 손처눌을 비롯한 대구 사림은 향교와 연경서원의 재건, 강학 활동 등의 교육 사업으로 지역사회 공동체를 복구하려 했다. 사회가 혼란할수록 예와 법도가 흔들리기 마련이었고, 이를 바로잡는 것이 공동체의 결속에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손처눌은 서사원을 비롯한 뜻이 맞는 사림들과 함께 대구향교 재건에 앞장섰다. 관직이 없었던 그는 당대 지방관들과 협력하여 전란으로 붕괴된 대구향교를 임시로 이전하여 강학 활동을 펼쳤다. 이후 당대의 유명한 문신이자 학자 한강 정구는 손처눌과 서사원과의 인연으로 대구에 내려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고, 이는 대구 사림들의 주목을 받았다. 나아가 손처눌은 향약의 수립과 발전에 기여하며 대구 전 지역의 사림을 결집하려 했다.
손처눌과 서사원은 강회를 중심으로 강학 활동을 의례화하여 대구 전 지역의 흥학에 힘썼다. 대구의 문풍을 전반적으로 진작하면서 새로운 인재를 적극 발굴하려 했다. 이들은 과거 시험에 통과하는 것에 목을 매는, 출세를 위한 공부보다는 성리학의 위기지학(爲己之學), 본래의 선한 마음을 밝혀 성인에 도달하는 수양을 중시하는 공부에 집중하였다. 또한 학문을 중시하는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자치 규약을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강학 활동은 향교라는 공적인 교육 공간에 국한되지 않고 서원과 서재 등 민간의 사적인 공간으로 확장되었다. 다양한 공간에서의 강학 활동을 통해 위기지학의 이념이 널리 퍼져나갈 수 있었고, 임진왜란 이후 혼란한 대구 지역을 바로잡을 수 있는 학문적‧공동체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유교 문화를 숭상하는 유학자이자 시를 짓는 문인의 삶,
의례 활동과 한시 짓기
《모당일기》에는 손처눌의 일상생활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그가 꾸준하게 의례 활동을 챙겼으며 일상적으로 시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중 의례 활동이란 대부분 절기‧시기‧기일 등에 맞춰 지내는 시사·기제사· 생신제·절사·묘사·향사 등의 제례를 뜻한다. 손처눌은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입각하여 제례를 지냈으며, 외가와 처가의 기제사도 지내는 등 넓은 범위의 친족을 챙겼다. 《모당일기》에는 손처눌의 의례 활동이 날짜별로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어, 손처눌 개인을 넘어 당대 사대부의 의례 활동이 지닌 특성, 주기성, 변화 과정 등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손처눌은 일상적으로 한시를 짓는 문인이기도 했다. 손처눌은 생전에 많은 문집을 남기지는 않았는데, 그나마 그의 후손 손양겸이 손처눌의 초고를 바탕으로 만든 《모당집》이 유명하다. 그러나 《모당일기》를 살펴보면 그가 남긴 초고보다 훨씬 많은 수의 한시를 지었음을 알 수 있으며,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서 영감을 얻는지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손처눌은 경물에 대한 감정, 사회적 사건에 대한 견해, 유람과 만남의 여흥, 이별의 아쉬움, 사례와 화답, 망자에 대한 애도 등을 표현하기 위해 시를 지었다. 그의 한시 짓기는 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학문적 성취를 공유하는 행위였다.
이처럼 손처눌은 혼란한 시기에도 가족과 선조에 대한 예를 올리고 자신을 수양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는 유학자이자 문인인 손처눌의 성품을 보여주는 기록이자 당대 유학자들의 생활상을 복원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모당 손처눌은 지역사회의 유력한 지식인으로서 임진왜란이라는 위기의 시대와 마주했다. 그는 위기에 맞서 온몸으로 싸운 것은 물론, 황폐화된 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으며 담담한 태도로 예법과 수양에 소홀하지 않았다. 그의 올곧은 행보를 엿볼 수 있는 이 책에서 우리는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도 나와 공동체 모두를 위하는 지식인으로서 삶의 방식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책머리에
1장 임진왜란 종식 후 대구 지역사회의 재건과 사림 • 김형수
임진왜란의 경험과 사림들의 지역사회 재건 방향 | 임진왜란과 대구의병의 활동 | 임진왜란 이후 대구의 흥학운동과 한강학파 | 대구 사림의 결속 시도와 향약의 실시, 향안의 재작성 | 「부정척사문」과 대구 지역의 정치적 갈등 | 마무리
2장 17세기 초반 대구와 사대부 손처눌의 다면적 위상 • 김정운
17세기 초반의 대구와 대구 사람들 | 국가체제와 지방민 손처눌 | 사대부 공동체와 손처눌 | 가족 질서와 손처눌 | 손처눌의 다면적 위상
3장 『모당일기』를 통해 본 모당 손처눌의 한시 짓기와 그 의미 • 이미진
모당의 일상 속 한시 짓기 | 모당의 한시와 그 흔적 | 일기에 나타난 한시 짓기 주요 장면 | 모당의 한시 짓기, 무엇을 의미하나 | 글을 마치며
4장 『모당일기』에 나타난 17세기 초 대구 사림의 강학 활동과 강회 • 박종천
대구 강회와 손처눌의 『모당일기』 | 한강 정구의 강회계와 대구문회 | 대구문회의 통강 중심의 강회와 강학의 의례화 | 손처눌의 강학 활동과 『모당일기』에 나타난 강학의 실상 | 대구문회의 강학 활동이 지닌 특성과 의의
5장 17세기 유학자의 일상과 의례생활 • 김미영
주자가례와 『모당일기』 | 일상의 정형성과 의례 중심적 생활 | 의례의 실천 양상, 주자가례와 고유 습속의 혼재 | 유학자의 일상과 의례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