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유학자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안동 사대부 집안이 자재 류의목의 일기를 통해
유학을 내면화하고 선비의 정신세계를 정립하는 과정을 살펴보다
오랜 시간 민간에서 소장해온 일기와 편지 등의 사료를 발굴‧번역해온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사업팀이 한 해 동안 연구한 결과를 단행본으로 묶어 출간하는 ‘국학자료 심층연구 총서’ 제21권 『하와일록』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철학, 사학, 문학 등 관련 전문가를 초빙하여 꾸린 공동연구팀이 안동 하회 지방에 살았던 사대부 풍산류씨 가문의 류의목이 소년 시절에 작성한 일기를 분석하여 조선 사대부 집안의 소년이 어떻게 한 사람의 어엿한 유학자이자 선비로 성장하는지를 다방면으로 연구한 결과물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남긴 일기 자료는 여럿 남아 있으나 청소년 시기에 쓰인 일기는 극히 드물어 관직에 오르거나 향촌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확립한 선비들의 기록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청소년의 성장 과정과 내면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다.
류의목은 서애 류성룡의 형인 겸암 류운룡의 후손으로, 안동 하회 지방 사대부이다. 『하와일록』은 류의목이 12세부터 18세까지 약 6년간 작성한 일기로, 일상생활의 면면부터 유학을 공부하며 읽었던 책들의 목록과 감상, 관혼상제를 치르거나 집안 대소사에 참여한 경험, 아버지를 잃은 슬픔, 지역의 동향이나 중앙정부의 정세에 관한 논평, 할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에 관한 기록과 감회까지 류의목이 성장하면서 경험한 다양한 사건과 개인적 소회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단순히 경전을 읽어 학문을 익히는 것을 넘어 유교적 의례를 치르고 지역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맡는 등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한 사람의 유학자가 탄생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성현의 글로 배우고 의례의 실천으로 익히다
아이에서 유학자로, 유학의 내면화 과정
류의목은 어린 시절 ‘팽아’라고 불렸으며 가문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총아였다. 게다가 열다섯에 아버지를 여의어 할아버지 류일춘은 손자에게 더욱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런 만큼 류의목의 일기를 보면 유독 독서에 관한 기록이 세세하게 남아 있는데, 유학 경전을 체득하는 단계인 독서-암송-글짓기의 단계를 누구보다 성실하게 수행하던 류의목에게 있어 독서는 개인의 차원에만 머물지 않았다. 류의목에게는 집안 서원이나 다름없었던 병산서원을 비롯해 옥연서당, 겸암정사, 화천서원 등에서 열리는 백일장이나 순제(巡題) 등의 글짓기 모임이나 토론을 비롯한 강회(講會)에 참여하여 견해의 폭을 넓히고 자신의 이해를 점검할 수 있었다. 토론과 글짓기나 자신의 독서 능력을 평가받은 기록 또한 다수 남아 있다.
이렇게 독서로 쌓은 지식은 유학 의례에 참여하고 지역 사회의 동향을 이해함으로써 오롯이 자신의 것이 되었다. 유학은 어떤 사상보다도 예(禮)를 중시하는데, 공자가 창시한 예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만든 행동 양식이자 문물이었다. 류의목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례를 경험하고 유가의 성인 의식인 관례와 혼례를 잇달아 치르며 한 명의 성인으로 인정받게 되는데, 이러한 예의 경험을 통해 경전으로 학습한 내용을 체득하여 ‘유학적 지(智)’를 내면화하게 된다. 이후 류의목은 과거에 급제하지는 못하나 향촌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맡은 유학자로 자리매김한다.
돌봄을 받는 ‘팽아’에서 책임을 다하는 ‘의목’으로,
상실을 경험한 아이의 생동감 넘치는 성장 기록
류의목이 일기를 쓸 당시 일기는 ‘일지’의 일종으로 가문과 지역사회의 일을 기록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류의목의 『하와일록』 역시 15세 이전까지는 사무적인 투로 집안에서 벌어지는 대소사를 기록하는 일지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15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상례를 치르게 되는데, 이때 류의목은 상례를 주관하는 상주의 역할, 즉 더 이상 어른들의 돌봄을 받는 팽아가 아닌 풍산 류씨 가문을 함께 이끌어나가야 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맡게 된다. 이후 상실의 슬픔으로 인해 몇 달 동안 일기를 중단하며 애도의 기간을 보내는데, 다시 쓰게 된 일기는 더 이상 팽아의 ‘일지’가 아닌 한 가문의 책임을 짊어진 류의목의 일기로 변화한다.
먼저 문학적인 표현이 등장하고 류의목 개인의 철학적 사색을 점차 유려하게 풀어내게 된다. 이는 당대의 성리학을 탐구하는 저술들로 이어지고, 문중의 어르신이나 다른 선비들과의 교류에서도 그들의 견해를 살피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또한 재지사족으로서 풍산 류씨 가문이 존속하기 위해 중앙정부의 동향과 향촌의 정세를 민감하게 살피며, 문벌 유지를 위해 국가사업에 참여하기도 하고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의 학맥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류의목은 상실을 경험하며 자신의 역할을 자각하고 성장해나간다.
류의목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향촌의 사족으로서 살아가다 생을 마감한 평범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범상함은 오히려 그가 남긴 기록을 통해 대다수 지방 사족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미래에 대한 꿈과 기대를 품고 공부를 이어나가다 급작스러운 상실을 경험하고 입신양명의 길에서도 좌절을 겪지만, 자신의 본분에 만족하며 할 수 있는 일들을 차근차근 찾아 나가는 류의목의 성장과정을 담은 이 책은 당대 평범한 사족의 삶을 복원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자 우리 삶에 대한 이해를 넓혀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책머리에
1장 소년 류의목은 어떻게 유학자가 되었나? : 독서와 의례를 통한 유학적 지의 내면화 과정을 중심으로 안경식•011
유학자의 탄생과 지의 내면화 | 유학에서 독서의 의미와 지의 내면화 | 류의목의 독서와 지의 내면화 | 유학에서 의례의 의미와 지의 내면화 | 류의목 일기의 교육적 가치
2장 조선 후기 한 지방 사족의 세상 읽기 : 『하와일록』에 나타난 10대의 경험과 유교사회화 과정
『하와일록』의 성격과 특징 | 류의목에 대한 후학들의 기록 | 10대 소년의 눈에 비친 조선 후기 영남사회 | 20대 이후 은거자의 삶과 학문 연구 | 가학의 계승과 구수시 | 선비의 탄생
3장 사랑채와 자제의 사회화 프로젝트 : 류의목의 『하와일록』을 중심으로
왜 사랑채에 주목하는가? | 사랑채는 어떠한 역할을 하였을까? | 사랑채를 둘러싼 자제의 사회화 과정은 어떠하였을까? | 사랑채, 유교 이념의 실천 공간
4장 죽음을 통한 젊은 유학자의 성장
들어가는 말 | 죽음이 죽지 않은 시대 : 상실을 대하는 유가 전통의 방식 | 상실의 이해 : 유가의 생사관生死觀 | 상실의 의례 : 상례와 애도 과업 | 나가는 말
5장 아이에서 어른으로의 성숙 여정, 『하와일록』
『하와일록』이라는 글의 장르를 규정짓는 두 축 : 일지인가, 일기인가 | 『하와일록』 서술 방식의 변화 양상 | 『하와일록』 서술 방식의 변화의 의미 | 마무리
6장 류의목이 경험한 1798~1799년 전염병 이야기
문명 발전의 역설, 전염병 | 1798~1799년 전염병 확산의 몇 가지 요인 | 1798~1799년 전염병의 참상 | 1798~1799년의 전염병 대처 | 1798~1799년 전염병의 재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