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망을 찾아 나선 지금, 우리 시대 리더가 반드시 읽어야 할 정치 고전!
드골, 희망의 기억
프랑스의 위대한 지도자 샤를 드골의 회고록
“나는 비통 속에서도 희망의 등불을 보았다”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망을 찾아 나선 지금,
우리 시대 리더가 반드시 읽어야 할 정치 고전!
미래 정세를 꿰뚫는 정확한 판단력과
국가와 국민을 위한 탁월한 리더십으로
프랑스를 두 번이나 구한 지도자, 샤를 드골의 회고록 완역판
프랑스 역사상 제일 존경받는 지도자로 꼽히는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의 마지막 저서이자 대통령 시절의 회고록인 《드골, 희망의 기억》이 완역 출간되었다. 대통령을 지냈지만 그의 재산은 은퇴 후 집 한 채뿐이었고 장례식을 국장이 아닌 가족장으로 치를 것을 유언으로 남기기도 했다. 이런 그를 프랑스 국민들은 지금까지도 ‘청렴결백하고 공명정대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지도자의 모범으로 꼽는다.
드골은 ‘프랑스를 두 번 구한 사람’으로 불리며 프랑스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국가를 일으켜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유 프랑스’라는 기치 아래 레지스탕스를 이끌었으며 1944년 파리가 해방되자마자 입성해서 프랑스 임시 정부의 수반이 되었다가 은퇴, 알제리 독립 문제로 나라가 붕괴 위기에 처하자 제5공화국의 초대대통령으로 다시 나서며 1959년에서 1969년까지 프랑스를 통치하며 서유럽 강대국으로 끌어올렸다. 이 책은 드골이 1969년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콜롱베의 사택에 은거하며 자신의 대통령 시절을 직접 회고하여 쓰기 시작했고 이듬해에 출간한 책이다.
“18년 전 프랑스를 파탄에서 구출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프랑스가 제시하는 계약을 이행하려는 것이다. 나는 프랑스 국민이 나에게 주는 이례적인 신임을 저버릴 수 없다. 이렇게 해서 나는 다시 드골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 본문 49∼50쪽
전쟁 영웅이자 정치가인 샤를 드골은 문필가로서도 이름 높다. 독일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군대 개혁을 주장하는 내용 등, 장교 시절부터 책을 출간하기 시작하여 군 장교들을 대상으로 강연하기도 했다. 평생 13권의 책을 출간하고 직접 연설문을 쓰는 등 정치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많은 저작을 남겼다. 《드골, 희망의 기억(원제:MÉMOIRES D’ESPOIR)》은 《전쟁 회고록》 3권과 함께 그의 가장 대표적인 저서로 꼽히며, 출간되었을 당시 큰 성공을 거둬 화제가 되었다. 처음에는 총 3권으로 계획되었으나 1970년 드골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1권 출간에 그쳐 그의 마지막 책이 되고 말았다. 드골의 이 책은 유명한 갈리마르 출판사의 브랜드인 ‘플레이야드 총서’의 리스트에 들어 있다. 한국에서는 1980년에 당시 대학교 불문과 강사였던 역자가 전집 중의 한 권으로 소개했던 것을 총장직에서 퇴임한 후 오랜 시간 문장을 되짚어 다듬고, 누락된 부분을 바로 잡아 첫 단행본으로 다시 출간하게 되었다.
드골의 목소리로 직접 듣는 1959∼1969년의 프랑스
이 책은 총 7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부 ‘재기(再起)’는 드골이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임명되었을 때의 일을 서술하고 있다. 알제리 독립 전쟁 때문에 당시 프랑스는 내분 위기에 처했는데 제4공화국 정부에는 이 문제를 해결할 인물이 없다고 여겨졌고, 사람들은 드골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드골은 국민의 부름을 받아 엘리제궁에 입성했다. 제2부 ‘해외 영토’에서는 드골이 세계의 흐름이 바뀌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직접 식민제국의 종결을 선포하여 프랑스령 식민지들과의 관계를 종속이 아니라 연합국, 동맹 등으로 바꾸어 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그러나 수많은 식민지 중에서 알제리(Algérie)만큼은 프랑스 지배 기간(132년)이 길었던 관계로 여러 문제를 낳았는데, 전쟁 영웅인 드골이 득세하면 알제리 폭도를 제압해줄 것이라 여겼던 우파들의 기대와 달리 드골은 민족 자결주의에 따라 알제리 독립을 주장한다. 이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제3부 ‘알제리’다.
제4부의 제목은 ‘경제’로 실업과 학비 문제로 추동된 68혁명의 영향으로 퇴진하게 된 드골은 경제 발전을 등한시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는데, 사실 드골은 당시로써는 과감했던 ‘뤼에프 계획(Rueff Plan)’을 실현시켜서 국가 부채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등 건실한 재정 정비에 힘썼다. 드골 이전의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긴 했지만 사실상 서양 강대국 사이에서 헤게모니를 주도하지는 못했는데, 드골이 독일 통일 문제에 적극 나서고, 서유럽 6개국이 모인 EEC(유럽경제공동체)의 영국 가입을 반대하는 등 강한 목소리를 내어 프랑스의 외교적 입지가 강해졌다. 이렇게 제5부 ‘유럽’에서는 드골이 유럽 국가들과의 외교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갔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제6부 ‘세계’는 프랑스, 미국, 소련, 독일, 영국 등 각국의 수반들을 만나거나 회담을 열었던 일들에 대해 적고 있다.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드라마틱한 부분으로, 미국과 소련의 헤게모니 싸움으로 위기에 처한 베를린, 4자 회담을 앞두고 미국의 U2 정찰기가 소련 영공에서 발견되어 그동안 대화에 우호적이었던 소련이 강경대응으로 나와서 회담을 망쳐버린 일, 프랑스를 찾아온 미국의 젊은 대통령 존 케네디에게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손을 떼라고(베트남 전쟁을 의미) 충고한 일 등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프랑스의 전쟁 영웅에서 정치 영웅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자유 프랑스’를 이끌 당시 자신의 상사였었던 페탱 원수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는 등 구사일생 끝에, 독일의 꼭두각시였던 페탱의 제3공화국을 몰아내고 프랑스를 승전국으로 만드는 기적에 가까운 일을 해낸 드골. 그는 전쟁 영웅이었지만 제4공화국이 꾸려지자 국민이 더 이상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콜롱베에 있는 사택에 은거하게 된다. 그러나 드골의 추종자들은 계속 그를 따르기를 바랐고, ‘프랑스국민연합’이라는 정당이 만들어져 약 6년간 드골은 이 정당을 이끌게 된다. 이후 완전한 은퇴에 들어갔을 때, 프랑스는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알제리 민족주의자들의 저항이 거세지고 있었으나 이미 알제리에 경제적 기반을 두고 있던 여러 프랑스인들은 ‘알제리 독립’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었다. 알제리 주둔 프랑스 군대는 무력으로 알제리를 진압하려고 했으며 프랑스 본국에 알제리 사태를 해결하지 않으면 군이 나설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알제리 사태를 잠재울 만한 사람으로 ‘해결사 드골’이 떠올랐고 그는 다시 한 번 정계에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드골은 달랐다. 그는 정세를 읽을 줄 알았고 ‘민족 자결주의’에 의거해서 알제리를 독립시키는 것이 오히려 프랑스에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을 품고 있었다. 드골은 알제리 민족주의자들과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고 독립을 지원해주기로 약속하면서도 프랑스가 발견한 사하라 석유는 양보하지 않는 등 자국의 이익을 적절히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인의 알제리’를 주장하는 자들은 드골을 공공연히 반대했고, 샬, 주오 제독 등 프랑스군 지도자들이 나서서 쿠데타를 시도했다. 결국 알제리 독립으로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드골은 1961년에 퐁쉬르센에서 프랑스 극우 군인 집단인 OAS의 테러에서 겨우 살아남았고 1962년에는 프티클라마르에서 총격 테러를 당하는 등 여러 번의 암살 위험에 놓이기도 했다.
“나는 이 불운과 싸우는 데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국민이 나를 지지한다는 사실이 나의 갑옷이었으며, 가치 있는 길을 꿋꿋이 걸어간다는 사실이 나의 칼과 같은 것이었다.”
- 본문 175쪽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한 대통령
드골은 대중매체를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았다. 그는 연설에 매우 유능했으며 전쟁 중에는 라디오를 적극 이용했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텔레비전을 이용했는데 그는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차이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과 대화하듯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안경도 쓰지 않고 원고 노트도 보지 않았다. 드골은 정기적으로 ‘기자 회견’을 열었는데 이 회견에는 정부 고위 각료들이 대부분 참가했고 기자들이 객석에 앉았다. 기조연설과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일련의 과정이 프랑스 각 가정의 텔레비전으로 방송되었다. 그의 정확하고 고풍스러운 프랑스어로 이뤄진 연설은 프랑스 국민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또한 드골은 권력욕, 탐욕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은퇴 후에는 이 회고록을 집필했으며, 재산이 사택 외엔 거의 없어 재정적으로 풍족하지 못했다. 그는 오직 프랑스에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권력의 정상에 섰다. 독재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냐는 뒤베르제의 질문에 불같이 화를 내며 독재자가 되기에는 자신의 나이가 많다고 일갈했다. 대통령에서 물러난 지 1년 만에 생을 마감했으니 그는 나머지 삶을 오로지 프랑스에 바쳤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유언장에는 장례식은 콜롱베에서 치러질 것이며 무덤은 딸이 묻힌 곳, 묘비명은 “샤를 드골 1890-0000”이라고만 쓰라고 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오로지 가족과 콜롱베 시의원, 프랑스육군만 참석시키고 정치적 인사의 참석은 거절했다. 절대 국장으로 치르지 말 것이며 조용하고 간소하게 식이 진행되기를 원했다.
우리가 드골을 회고하는 것은 그의 애국심, 충성심 그리고 국가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지략 때문일 것이다. 그는 한니발처럼 끈질겼고 나폴레옹보다 멀리 보았다. 그는 철저하게 국민에게 봉사하겠다는 위민정신(爲民精神)을 지닌 인물이었다. 모든 정치적 결정과 행위에 사리사욕이라는 것이 전혀 개입될 일이 없었다. 그를 가리켜 ‘l’homme intègre(청렴결백하고 공명정대한 사람)’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했으며 프랑스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분투했다. 그는 위대하지 않은 프랑스는 프랑스가 아니라는 신념에 따라 강대국들과 끊임없이 다퉜다.
- 역자 후기 중에서
강대국 사이에서도 외교적 입지를 굳건히 하고 나라를 바른길로 현명하게 이끌었던 드골은 지금 이 시대에도 반드시 필요한 지도자의 모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의회에 불만을 품었지만, 의회를 해산시키지 않았고 우파의 지지를 받았지만, 좌파를 멸시하지 않았다. 언제나 국민과 국가를 위한 길만을 생각했으며 그 길이 옳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의지를 꺾지 않았다. 이것이 세계의 수많은 대통령 가운데서도 드골의 목소리에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다.
제1부 재기 _ 7
제2부 해외 영토 _ 59
제3부 알제리 _ 131
제4부 경제 _ 203
제5부 유럽 _ 251
제6부 세계 _ 307
제7부 국가 원수 _ 415
역자 후기 _ 456
사를 드골 연보 _ 459
찾아보기 _ 4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