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월; 초선전

박서련

브랜드 은행나무 | 발행일 2024년 7월 1일 | ISBN 9791167374363

사양 변형판 135x205 · 244쪽 | 가격 16,800원

분야 국내소설

책소개

“이리하여 이야기의 필요로 발명된 여자는
살아서 이야기를 빠져나간다. 나의 초선은 살아남는다.”
한겨레문학상,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수상작가
박서련이 다시 쓰는, 욕망하는 여성 초선!

 

《체공녀 강주룡》으로 제23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전혀 다른 여성 서사를 만”나게 한다는 평을 받았던 박서련이 다시 한번 전혀 다른 여성 서사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올해 서울국제도서전 ‘여름 첫 책’에 선정되어 도서전에서 선공개된 후,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정식 출간되는 《폐월; 초선전》을 통해서다. 이번 소설의 주인공은 ‘그녀의 얼굴이 너무 아름다워 달마저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폐월)’는 《삼국지(연의)》 속 등장인물, 초선이다. 박서련은 초선을 1인칭 화자로 삼아 직접 자신의 생을 말하게 한다. 남성 영웅의 서사가 난무하는 《삼국지》에서 아름다움을 무기로 삼은 여성 초선, 과연 그녀의 입으로 재현되는 그녀의 삶은 어떠할까.
《삼국지》에서 초선은 아름다움을 통해 두 영웅,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했다는 고사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박서련은 초선에 대한 여러 이야기와 당대의 시대상을 융합해 새로운 초선,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여성 초선을 만든다. 박서련의 초선은 가난하고 흉흉한 시절 자신을 팔아먹으려는 부모로부터 도망쳐 나온 생존자이며, 오물이 가득한 길거리에서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살아본 거지이며, 거지 대장에게 배운 거짓말로 자신이 충신의 딸이라 속여 한나라의 장군인 왕윤의 수양딸이 되는 영악한 소녀다. 초선관을 쓰는 관직으로 나아가고자 해 스스로 ‘초선’으로 이름 지은 그녀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욕망하며, 욕망을 위해 자신의 지식과 위치, 미와 추를 모두 이용한다. 이런 그녀에게 아름다움은 유일한 무기가 아니다.
뮤리엘 루카이저는 그의 시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한 여자가 자기 삶의 진실을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세계는 터져버릴 것이다.” 여기, 바로 그 역할을 감당하는 책이 있다. 박서련의 《폐월; 초선전》에서는 초선의 입으로 재현되는 초선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남성 영웅 서사로 가득했던 《삼국지》를 모두 터트려버릴 강렬한 에너지를 품은 채로.

“정말 여자는 관리가 될 수 없습니까?”
“여인으로서 관모에 손댈 수 있는 자는 오직 초선뿐이란다.”
“그러면 저도 초선이 되겠습니다.”

후한 말, 열 명의 내시(십상시)들이 황실을 장악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자 각지에서 태평도라는 종교를 기반으로 한 ‘황건당’의 반란이 일어난다. 백성의 삶은 피폐해져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때 ‘나’가 태어난다. ‘나’는 아이를 잡아먹기로 결정한 부모에게서 도망쳐 어린 거지 패에 들어간다. “살고 싶다”, ‘나’는 치열하게 욕망하며 악착같이 살아남으리라 생각한다. 삶이 더 팍팍해지자 민간 구휼을 베푸는 태평도에 들어간 거지 아이들은 황실의 군대가 예주에 들이닥쳐 황건당을 공격할 때 뿔뿔이 흩어진다.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다가 한 군인에 의해 발견된 ‘나’는 거지 대장이 알려준 수법으로 군인의 환심을 얻고, 그의 양녀가 된다.

“저는 본디 낙양에서 났으며…… 충신의 후손이오만…….”
대장에게서 배운 거짓말을 내뱉는데 눈물이 덩달아 왈칵 쏟아졌다.
“십상시의 농단으로 멸문의 화를 입고 홀로 살아남았으나 끝내 이 꼴이 되었나이다…….”
울면서도 나는 장수의 눈치를 보았다. 장수는 내 말을 믿는 눈치였다. 내가 그렇게 말하며 울어서 더욱 나를 믿는 듯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름 같은 것 정말로 모르니까. 거지 떼끼리는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고 이름을 짓지도 않았다. 어차피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애 이름을 기억해봤자, 지어줘봤자니까. 이름으로 부르면 기억에 오래 남아 피차 괴로우니까. 무리의 누구도 내 이름을 모르듯 나 또한 누구의 이름도 알지 못했다. 대장의 이름조차 나는 몰랐다.
―본문 28쪽

‘나’를 거둔 군인은 황제의 스승인 ‘자사’ 지위에 있는 왕윤으로, 왕윤은 ‘나’를 양녀로서 잘 키워 여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 즉 천자나 태자의 아내가 되게 만들겠다고 말하지만, ‘나’는 여자로서는 정녕 관직에 오를 수 없는지 묻는다. 왕윤은 여자로서 관직에 오르는 유일한 길은 높은 관직의 관리에게 허락되는 초선관이라는 관모를 관리하는 ‘초선’뿐이라고 대답하고, 이에 ‘나’는 초선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이것은 곧 ‘나’의 이름이 된다. 한편 ‘나’는 자신을 구해준 왕윤에게 아버지 이상의 친밀감을 느끼고 왕윤이 더 높은 관직에 올라가면 그의 초선관을 관리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비틀린 애정을 품는다.

그렇지만 그때, 아버지가 자사 같은 것은 생각도 말라던 때에, 나는 어려서 아버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 고집을 부렸다. 저도 자사가 되고 싶습니다. 아버지처럼. 왜냐하면 어떤 아이도 다리 밑에서 굶어 죽는 일이 없게 하고 싶어서. 아버지는 그제야 여자에게는 벼슬을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말 여자는 관리가 될 수 없습니까? 그래, 여인으로서 관모에 손댈수 있는 자는 오직 초선뿐이란다.
초선관모는 담비[貂] 털과 매미[蟬] 날개로 만들어 망가지기가 쉽다. 삼공이나 그 이상 가는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의 집에나 황제의 곁에는 그 관만을 모시고 손보는 여인을 둔다. 그런 여인을 초선이라 부른다.
그러면 저도 초선이 되겠습니다.
―본문 51~52쪽

어느 날 ‘나’에게 또래의 시종 ‘도화’가 붙는다. 말벗을 만들어주려는 왕윤의 의도와 달리, 도화는 ‘나’에게 네가 거지 출신이라는 것을 안다며 의뭉스럽게 군다. 집 안에 연못을 파면 어떻겠냐는 도화의 제안을 ‘나’는 못 이기는 척 수락하고, 일꾼으로 온 무리에서 거지 대장을 알아본다. 도화와 거지 대장의 이야기를 통해 둘이 태평도에서 서로를 알게 되었으며, 곧 태평도의 무리(황건적)이 왕윤의 집을 습격하리라는 것을 알게 된 ‘나’는 거지 대장이 ‘나’에게 몰래 건네준 면사지편(죽음을 면하게 해주는 조각)이라고 쓰인 패를 받는다. 한편 거지 대장을 좋아하던 도화는 왕윤에게 ‘나’가 거지 출신이라는 사실을 고하고, ‘나’는 왕윤을 독대해 자신이 거지 패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 전에 충신의 가문에 있었다는 것은 믿어주셔야 한다고 말하며, 도화와 거지 대장의 이야기로 추론한 황건적의 습격 소식을 밀고한다. 확실하게 속이기 위해 자신을 벌하고 가두라고 하며 ‘나’는 왕윤에게 계략을 말하고, ‘나’의 계략대로 행동한 왕윤은 자신의 집을 습격한 황건적 무리를 완전히 토벌하게 된다.

“저를 가두소서.”
“뭐라?”
“저를 모함하여 집안의 이목을 제 쪽으로 모아두고 아버지를 습격하는 것이 애초의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마땅한 벌을 받는 듯이 보이지 않으면 죽편에 적어둔 일자대로 움직이지 않을 공산이 큽니다. 하여 제게 벌 내리는 시늉을 하시고 은밀히 군사를 모아 죽편이 가리키는 일자에 태평의 무리를 일거에 때려잡으소서.”
“하지만…….”
아버지는 망설이셨다. 어질게도 나를 위해 망설여주셨다.
“네 말대로 하는 것은 군사적으로 모범된 작전이다. 그러나 그러려면 네가 고초를 겪어야 하지 않니.”
“아버지…….”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더욱 조아렸다.
“아버지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소녀는 어떤 고초든 달게 겪을 수 있나이다.”
이것이야말로 내 속에서 나온 뜻 중 가장 참된 것이었다.
―본문 100~101쪽

토벌에 성공한 공을 인정받아 수도 낙양으로 향하는 길에서 ‘나’는 왕윤에게 자신의 지아비가 되어줄 것을 청한다. 왕윤은 이를 단칼에 거절하고, 낙양에 도착하자 ‘나’를 집 안에서 부리는 기생, 가기(家妓)의 처소로 보낸다. 가기들 사이에서 노래와 검무를 익히던 ‘나’는 같은 방을 사용하던 도화와의 관계를 통해 성적 욕망에 눈뜨기 시작한다.

“나는 사람의 미추를 모르겠다.”
도화는 꾸물거리며 다시 나를 향해 돌아누웠다.
“애초에 다 똑같이 보이니까. 생김새로 사람을 구분할 줄 모르는데 얼굴이 잘나고 못난 건 어떻게 알겠니.”
“너는 몰라?”
“뭐를?”
“네가 예쁜 걸 몰라?”
언성을 높이는 일은커녕 말수 자체가 적은 도화가 벌컥 화를 내며 물었다. 내가 예쁜데 왜 네가 화를 내지? 그보다, 예쁜 게 무슨 소용이지? 어차피 아버지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는데. 가슴이 답답해져 눈물이 나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울음 섞인 목소리로 물은 것은 목과 가슴을 옥죄는 그 괴로움 때문이었다.
“얼마나 예쁜데?”
도화는 말이 없다가 불쑥 다가왔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내가 알아차리기 전에 도화의 입술이 나의 입술에 맞닿았다.
―본문 134쪽

한편 역사의 수레바퀴는 쉬지 않고 달려 초선을 당대의 두 영웅과 만나게 한다. 낙양에는 황제를 손에 넣고 권력을 쥐락펴락하던 동중영(동탁)이 있는데, 왕윤의 집을 드나드는 사람 중 동중영의 양자이자 당대 최고의 무인인 여봉선(여포)가 있었다. 왕윤은 동중영을 무너트리기 위해 둘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싶어 하고, 이를 파악한 ‘나’는 자신이 가야할 길을 선택해야 함을 서서히 깨닫는다.

 

선과 악, 사랑과 폭력을 모두 경험하고
그것을 남김없이 세계의 일부로 받아든 인간의
존엄한 자기 탄생 서사

이 소설은 그동안 아름다운 여인으로만 소비되어 사라져온 초선에게 목소리를 부여함으로써 남성 영웅 서사가 주류인 《삼국지》의 세계를 완전히 다른 세계로 만든다. 박서련의 초선은 더럽고 영악하고 매정하며, 똑똑하고 사랑스럽고, 기지를 발휘한다. 그녀는 삼국지의 다른 영웅들이 그러하듯이 때로 성공하고 때로 실패한다. 박서련은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리하여 이야기의 필요로 발명된 여자는 살아서 이야기를 빠져나간다. 나의 초선은 살아남는다. 이것이 당신이 원한 이야기였는지 묻지 않겠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 여자는 살아 있다.” 살아 숨 쉬는 온전한 캐릭터로서 초선의 탄생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삼국지》에서 초선에게 부여된 역할을 외면하지 않는다. 초선은 아름다움을 이용해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하며 성적 폭력에 노출된다. 그리고 화자 초선은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함으로써 살아남는다. 그는 삶의 다른 면에서 자신 안에 놓인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적극적으로 탐험하고 욕망한다. 어딘가 일그러지고 기묘한 관계, 퀴어한 관계 들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안에 있는 힘을 자각한다. 그러함으로써 그녀는 피해자가 되어 사라지지 않고 생존자로서 존재하게 된다. 평론가 전승민의 말처럼 이 소설은 “억압적인 성 도덕을 전복하며 인간 내부에 잠재된 욕망의 다양한 가능성을 퀴어하게 폭로한다.”
한편 박서련의 ‘초선’은 《삼국지》를 알지 못하는 독자들에게도 열려 있다. 처음 보는 낯선 세계를 탐험하고 낯선 인물에 몰입해가는 과정이 소설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폐월; 초선전》은 무엇보다 본질에 가까운, 재미있는 소설이다. 《삼국지》와 그 배경을 알지 못하는 독자들도 혼란한 시기에 가난하게 태어난 한 여자아이의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여자아이가 생존을 위해 꾀를 내어 음식 한줌을 얻었을 때의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은 순간의 당혹과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순간의 설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가 이 모든 일을 겪고도 살아내기를 선택했을 때 그녀를 응원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이 책은 독자를 새로운 판본의 《삼국지》의 세계에, 《폐월; 초선전》의 세계에 입문시키는 것이다.

 

 

▣ 본문에서

떠나기 싫은 사람이 있다면 남아도 좋다고 했지만 남고자 하는 아이는 없었다. 거기 있자면 계속 거지여야 했고 또 요괴여야 했다. 성을 나가서 황건군에 합류하면 우리는 거지도 요괴도 아닐 수 있었다.
사람이 되려고 우리는 성문을 나섰다.
겨우 사람이 되려고. (24~25쪽)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거짓말을 하다 보면 어느덧 그것이 참이 되기도 한다. 시늉도 백 번이 되고 천 번이 되면 더는 시늉이라 할 수 없게 되는 이치다. 하지만 신분만은 시늉으로 고칠 수 없다. 천출이 천 번 만 번 귀인 행세를 해봤자 무소용이다.
저 스스로 천하다는 것을 잊어야 진정으로 귀한 행세를 할 수 있는데, 천하지 않으려 애씀이 이미 천한 것이다. 제가 천한 것을 모르면 귀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불운하게도 나는 내가 천한 것을 알고 말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를 아는 사람은 천하에 나 하나뿐이어야 했다. (58쪽)

“내가 안다. 너는 이런 집안에 갇혀서 늙은이의 인형 노릇이나 할 사람이 아니다.”
미쳤구나.
내가 이 집에서 얼마나 호사를 누리고 있는데. 웃음을 꾹 눌러 참느라 정말이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럼 나는 어떤 사람인데?”
“너는…….”
대장은 또 한참을 망설이다 말했다.
“……내 곁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
너무 우스워서 웃음을 참다 얼이 빠져버릴 것 같았다.
네가 어쩔 건데? 온 예주의 백성과 군사를 다스리는 우리 아버지로부터 나를 어떻게 구하겠다는 건데. 몇 해간 네가 내게 해준 것을 다 합쳐도 아버지와 처음 만난 날 대접받은 것에는 미치지 못하는데 누가 누구로부터 누굴 구한다는 거야? 서로 떨어져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지낸 세월은 또 얼마인데 갑자기 이제 와서?
대장, 바보가 되었구나. 그렇게 똑똑하던 사람이 이제는 영 못쓰게 되었어. (82~83쪽)

“네가 직접 태평도를 믿는다 말하지 않아도 결국은 다른 이들이 증언하게 될 거야.”
나는 두화가 머리를 비벼댄 발끝을 내려다보며 무심히 말했다.
“그러면 이렇게 갇혀서 굶는 시간만 늘고 아무 좋을 것 없겠지. 지금 태평도를 믿는다 말하면…….”
두화가 무엇을 좋아했더라,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원하는 것을 좀체 숨길 줄 모르는 아둔한 아이였는데 뭘 좋아했는지 많이는 떠오르지가 않았다.
“구운 닭고기를 먹게 해줄게.”
나는 두화가 눈물도 거의 흘리지 못하면서 어린아이같이 큰 소리로 엉엉 우는 것을 보며 곳간을 나왔다.
저녁상에는 닭고기 구이가 올라왔다. (107쪽)

배 속에서 촛불이 타고 있는 것 같았다. 부드럽게 꼬여 있던 심지가 타들어가며 조금씩 풀려가는 듯했다. 초가 짧아져가며 불꽃이 맹렬해지고 촛농은 뜨겁게 흘러내리는, 그런 일이 배와 다리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양손으로 도화의 머리를 잡은 채로, 내 손가락들을 도화의 머리칼 안에 심은 채로 몸을 젖혔다. 도화의 손가락이 다른 방향으로 내게 답했다.
“이만큼 예뻐.”
모든 것이 끝난 후에 도화는 말했다.
“천하에서 제일로.” (137쪽)

가마 밖에서 옥이 깨지는 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왔다. 나는 봉선에게 말할까 말까 망설였다. 그대에게서 피비린내가 납니다. 저 멀리로 가주세요. 왜 그런 냄새가 나는 것일까. 군인이기 때문인가. 하지만 나의 아버지도 군인인데. 나는 아버지에게서 불쾌한 냄새를 맡은 적이 없었다.
“그대에게서 피 냄새가 난다.”
내가 봉선에게 하려던 말을 봉선이 내게 던졌다. 나는 황당해서 가마 창의 발을 걷고 밖을 내다보았다.
“소인이 아니라 귀공에게서 나는 냄새겠지요.”
“분명 이 몸에도 피 냄새는 배 있겠지만, 그대에게서도 난다. 내게서 나는 냄새와는 다른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소인은 모르겠습니다.” (174쪽)

내 눈으로 본 사람 가운데 가장 하늘에 가까운 사람은 동중영이었다.
상국 동탁이 어떤 사람이더냐고 누가 내게 물으면 나는 그리 답하곤 했다. 그러면 상대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 천자를 늘 가까이 두고 손아귀 속 놀잇감마냥 쥐락펴락하는 그자의 권세는 과연…… 그런 식의 납득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다. 하늘에는 마음이 없고, 동중영도 그러했다.
그보다 더 담백하게 동중영에 대해 말할 길이 있으랴.

동중영에게는 사람다운 마음이 거의 없었다. 잃으면 애타고 잊히면 서럽고, 뒤처지면 분하고 이기면 양양하며 들키면 민망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고 품을 법한 마음이 온통 미미했다. 어쩌면 그래서인가, 그가 나를 귀여워한 것은. 그가 그렇듯 나에게도 어딘지 결여된 바가 있다는 것을 알아봄이 아닐런가. (190~191쪽)

달아나야 해.
거울 속의 아프고 미친 여자가 내게 말했다.
그러나 어디로?
내가 여자에게 물었다.
거울 속의 여자는 답을 몰라 내 눈길을 피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226쪽)

그러면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젊고 아리따웠던 초선은 어디로 갔을까.
혹자는 내가 봉선을 따라가 조용히 가정에 종사하였다고 믿고 또 어떤 이는 내가 조맹덕에게 거두어져 관운장에게 하사되었다고 한다. 관운장은 내 의기에 탄복하여 나를 거두기도 하고 나라를 망칠 요녀라며 나를 죽이기도 한다. 나는 때로 의리를 지키고자 관운장의 검 앞에 뛰어들어 자결하고 닳디닳은 정조를 한탄하며 몰래 자결하기도 한다. 진작에 아버지를 따라 자결하였음을 굳게 믿는 이도 있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내가 살고 어떤 이야기에서는 내가 죽는다.
죽다니, 내가?
웃기고들 있네. (229쪽)

나는 이제 아무도 애모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귀애받지 않는다.
계절을 따라 품을 팔아 입에 풀칠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버섯이든 풀뿌리든 캐다 먹는다. 이처럼 사는 것도 별다르게 어렵지는 않다. 한때 나는 지체 높은 이의 양녀였고, 가기였고, 또 한때는 거지였고, 이웃과 바꿀 먹이였다. 그렇다고 해서 내 명운이 삼공구경과 다를 것은 무언가. 천자와 다를 것은 무엇인가. 영웅은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고 새 나라가 또다시 망하고 흥하는 것은 그보다도 더 쉽다.
그러한 모든 순리는 허망한 것이로되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내가 움막을 짓고 사는 산자락에는 담비가 살고 여름이면 매미가 운다. 머리 위에 초貂와 선蟬을 이고 사니 부러울 것이 없다.
숱한 영웅들의 의기와 용맹을 구경거리 삼고 나라를 세우고 무너뜨리는 대의와 명분을 우스개로 여기며 끝끝내 오래도록 나는 살아남고 만다.
살아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 (230~231쪽)

▣ 작가의 말

이리하여 이야기의 필요로 발명된 여자는 살아서 이야기를 빠져나간다. 나의 초선은 살아남는다. 이것이 당신이 원한 이야기였는지 묻지 않겠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 여자는 살아 있다.

살아 있다는 건 정말 이상하지?
마지막으로 할 만한 질문은 역시 이것이겠다.

 

▣ 추천의 말

자기 삶을 다시 쓰는 작업을 거치며 초선은 남성에 의해 생의 운명이 좌우되는 여자, 남자의 머리에 씌워진 초선관을 돌보는 여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담비貂와 매미蟬를 몸의 일부로 삼고 살아가는 인간으로 거듭난다. 《폐월; 초선전》은 선과 악, 사랑과 폭력을 모두 경험하고 그것을 남김없이 세계의 일부로 받아든 인간의 존엄한 자기 탄생 서사다. 급진과 전복의 극단은 어떤 존엄을 낳기도 한다. _전승민(문학평론가)

목차

▣ 차례

무명
자사
두화
초선
도화
폐월
봉선
중영
초선

작가의 말
발문

작가 소개

박서련

소설가. 철원에서 태어났다.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체공녀 강주룡》 《마르타의 일》 《더 셜리 클럽》 《마법소녀 은퇴합니다》 《프로젝트 브이》 《카카듀》, 소설집 《호르몬이 그랬어》 《코믹 헤븐에 어서오세요》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나, 나, 마들렌》 《고백루프》 등이 있다. 2018년 한겨레문학상, 2021년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2023년 이상문학상 우수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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