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을 것인가”
일제강점기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마주하여
선인들의 지혜를 되새긴 유학자의 치열한 기록
오랜 시간 민간에서 소장해온 일기와 편지 등의 사료를 발굴‧번역해온 한국국학진흥원 인문융합본부가 ‘국학자료 심층연구 총서’ 제27권 『경설유편 : 퇴계학파의 경학 전통과 계승』을 출간했다. 20세기 유학자 서석화가 편찬한 『경설유편』은 퇴계학파에 속한 퇴계 이황, 갈암 이현일, 대산 이상정, 정애 류치명의 이론을 집대성한 방대한 저술이다. 『경설유편』을 집필찬 1919년은 3·1운동이 있었던 해로, 일본의 침탈 이래로 농민과 양반이 힘을 합친 의병과 서구의 문물을 자주적으로 받아들인 개화파 등이 자신들의 이상을 내세워 일제에 맞서고 있었다. 역사의 격동기 한복판에서 서석화는 선현들의 사상을 집대성하는 작업에 몰두해 있었는데, 이는 현실도피가 아니라 조선 왕조 500년을 이끌어온 유학의 지혜에 의지해 돌파구를 찾아보려는 시도였다. 그는 퇴계 이황으로부터 시작된 퇴계 경학의 전통이 류치명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계승·심화되었는지 면밀히 살핀다. 충실한 학자이자 나라의 안위를 걱정한 그의 생애와 붓끝을 따라가며, 조선 성리학의 중요한 계통인 퇴계 경학의 면면을 살펴보자.
동학과 서학, 의병과 개화파,
나라를 구하려는 격변의 시기 속 퇴계학의 의미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조선은 항상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밖으로는 조선을 침탈하려는 일본, 중국, 러시아 등이 각축을 벌였고, 안에서는 왕과 조정의 무능, 탐관오리의 횡포와 학정으로 나라가 무너지고 있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권력투쟁 역시 국정을 분열시키는 요소로 작용했다. 대내외적 혼란은 민중의 삶에 고스란히 반영되었고, 서학 혹은 동학의 도를 바탕으로 의병이 집결하고 있었다. 각자 자신의 생존을 위해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격변의 시기였다.
서석화의 아버지 서효원은 퇴계학파의 학맥을 잇는 주요한 유학자 정재 류치명의 제자였고, 서석화 역시 학맥을 이어받은 유학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이듬해 류치명의 제자들과 함께 청송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이러한 영향 아래 서석화가 창칼을 들 수 없는 만년의 나이에 『경설유편』은 3·1운동으로 드러낸 독립의 바람에 조응하여 학자의 양심을 드러내는 방법이었다. 그는 조선이 500여 년 동안 수많은 외침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 유학의 실천 정신이라고 여겼고, 그 본질이 영남 퇴계학에 있다고 보았다. 『경설유편』이 주희에서 시작해 류치명으로 끝나는 것은 퇴계학의 학문 정신을 후대에 남겨 다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씨앗이 되길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아무리 제국주의와 식민정책이 활개를 치더라도 나라의 근간이 되는 올곧은 학문관을 보존할 수 있다면, 언젠가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리라고 믿으며 미래를 도모했다.
“진정한 배움은 실천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경설유편』 속 퇴계학과 그 의의
서석화 외에도 유학의 문명이 되살아날 날을 기약하며 후학 양성에 전념했던 유학자들은 상당히 많았다. 그것은 유학이 지닌 실천정신 때문이기도 했다. 퇴계학은 공부한다는 것은 어떤 일을 익혀 실천하는 일로 보았다. 퇴계학에서는 배우는 일과 더불어 생각하는 일까지도 실천으로 인지했다. 이황에게 ‘생각’은 단순히 사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 얻는 바가 있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현실과 도덕적 이치에 부합하는지 끊임없이 검토하고 확인하는 것이 진정한 배움이라고 보았다.
서석화 역시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아 유학의 핵심 경전인 사서삼경을 그저 읽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배우고’ 또 ‘생각했다’. 그는 경전을 수신과 함양의 도구로 활용했다. 그는 인의, 천리, 인욕의 의미를 주자의 뜻에 맞게 해석하고 그것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방향을 고민했다. 경제·정치 사상에 관해서는 학문적으로 꼼꼼하게 검토하였고, 이와 함께 경전의 본질을 삶 속에 녹여내는 생활의 철학을 지향했다. 그가 퇴계학의 명맥을 다시 살핀 것은 학문을 올곧게 세우기 위한 학자로서의 의도도 있지만, 자신과 미래 세대를 위한 실천 지침으로서의 목적도 있다.
『경설유편』은 자칫 나라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과거의 학문에 몰두하는 시대착오적인 저작으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을 창작한 배경, 저자의 삶, 선인들의 지혜를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 등으로 미루어보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길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경설유편』은 선인들의 지혜가, 조선이라는 국가가 쌓아온 탄탄한 과거가 위기에 처한 미래를 구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어느 유학자의 분투로 기억될 것이다.
책머리에
1장 조선시대 청송 지역 달성 서씨 가학의 연원과 전승
머리말 | 달성 서씨의 청송 정착과 퇴계학파와 인적 관계망 구축 | 18~19세기 전반 가문의 보족保族 활동과 심학의 경향성 | 19세기 중반 족적 결속의 강화와 서석화의 퇴계학 집성 | 맺음말
2장 『경설유편』 「대학」 편의 편찬 방식과 의의
머리말 | 「학용의의변」 | 『경설유편』 「대학」 편의 편찬 방식과 의의
3장 16~19세기 영남 퇴계학의 학문관과 성리설 : 서석화의 『경설유편』에 등장하는 이황·이현일·이상정·류치명의 접점과 간극
머리말 | 학문관의 동이同異 | 성리설 비교를 통한 퇴계학과의 접점과 간극 | 맺음말
4장 20세기 퇴계학파 경학의 모색과 퇴영 : 서석화의 『경설유편·맹자』의 경우
문제제기 | 서석화의 학문여정과 『경설유편』의 편찬 | 『경설유편』의 분석 : 「맹자」 편의 경우 | 남는 문제
5장 서석화의 『경설유편』과 중용학
서석화의 『경설유편』과 영남 사선생 | 『경설유편』 소재 사선생 경설의 분포도 | 『청석집』 소재 경설의 분포도 | 서석화 중용학의 특징
6장 조선 후기 퇴계학파의 경학 주석서 편찬 개관 : 『경설유편』에 이르는 길
머리말 | 18세기 편찬서 | 19세기 편찬서 | 20세기 편찬서 | 맺음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