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피어나 겨우내 꽁꽁 얼린 사랑
내 서툰 진심이 봄이 되어 너에게 닿을 때까지
젊은작가상 문지문학상 수상 작가 정용준 신작 소설
“사랑은 너와 나 사이에 있지 않다. 너와 나를 껴안고 있다.
그러므로 사랑은 우리를 지켜줄 수 있다.” _최진영(소설가)
-
젊은작가상, 문지문학상, 젊은예술가상 등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하며 평단과 독자의 뜨거운 지지를 받아온 소설가 정용준의 신작 장편소설이 은행나무출판사 ‘시리즈N’으로 출간되었다. 《겨울통》은 작가가 집요하게 천착해온 화두인 ‘언어’를 근간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의 형상을 세밀하게 조각해나가는 작품이다.
이야기는 소랑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시작된다. 소랑도서관의 레지던시 작가로 머물고 있는 ‘인하’는 언어장애로 인해 말을 할 수 없다. 대신 패드에 입력한 텍스트를 디지털 음성으로 출력하는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한다. 누구에게나 살갑고 다정한 인하의 모습은 평온해 보이지만, 관찰자인 ‘동아’는 그 태도 너머에서 넘을 수 없는 단단한 벽을 느낀다. 벽 앞까지는 얼마든지 다가와도 좋지만 그 안쪽의 내밀한 세계는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겠다는 그의 자발적 고립을 읽은 것이다.
인하는 정용준 작가가 그간 밀도 있게 그려온 ‘언어의 상실’을 전면에 내세운 상징적 인물이다. 동아는 인하가 구축한 침묵의 층위를 끊임없이 두드리는 존재로 작동한다. 도서관에 앉아 줄곧 인하를 관찰하던 동아는 아주 느린 속도로 그에게 다가간다. 매끄러운 디지털 음성 대신 느릿한 필담을 나누고, 굳게 걸어 잠긴 인하의 입술 앞에 앉아 그가 스스로 걸어 나오기를 묵묵히 기다린다. 하지만 인하가 마음의 빗장을 풀 즈음 동아는 ‘겨울통’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상실의 공포를 극복해야 하는 연인 앞에, 죽어버린 언어는 어떻게 다시 생명력을 얻어 발화할 것인가. 모든 것이 빠르게 휘발되는 시대의 복판에서 《겨울통》은 닫혀 있던 마음이 절기를 따라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개화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따라간다. 사랑이라는 가치가 무용하게 느껴지는 지금. 작가는 여전히 우리를 구원하고 실존의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 아닌지 묻는다.
“사랑에 빠지면 기적을 바라게 된다. 어떤 사람은 바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기적을 향해 걸어간다. 그 기적은 믿음이다. 네가 나에게 오고 있다는 믿음. 내가 너에게 갈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우리 헤어지지 말자’. 사랑은 너와 나 사이에 있지 않다. 너와 나를 껴안고 있다. 그러므로 사랑은 우리를 지켜줄 수 있다.”_추천의 말, 소설가 최진영
-
내 온도만큼 따뜻해지는 이불 같은 부드러움
내가 그토록 바라던 딱 적당한 사람이었다
동아와 인하는 소랑도서관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에서 처음 만났다. 참여자 스스로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뒤 글과 그림을 묶어 ‘나만의 이야기책’을 만드는 프로젝트다. 동아는 이야기 수업을, 인하는 그림 수업을 맡고 있다. 도서관 레지던시 작가로 소랑에 머물고 있는 인하는 언어장애로 인해 말을 할 수 없다. 음성 출력 프로그램을 이용해 사람들과 원활한 소통이 가능하지만, 동아와는 조금 느리게 대화를 나눈다. 인하가 쓰면 동아가 읽는다. 동아가 말하면 인하가 다시 쓴다. 인하는 자신에게 스며드는 방식으로 다가오는 동아가 좋았다. 둘은 느린 속도로 서로를 알아가고, 가까워지고,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어느 날, 동아가 겨울통에 걸린다.
“그때 그의 얼굴을 처음으로 제대로 봤다. 그는 스펀지 같았다. 온갖 감정을 머금고 있지만 겉으로는 한 방울의 마음도 맺히지 않은 얼굴. 나는 그를 움켜쥐고 쥐어짜고 싶었다. 말이든 생각이든 감정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질질 흘러내리는 걸 보고 싶었다. 그렇게 가벼워졌으면 했다.”(24쪽)
겨울통에 걸린 사람들은 신체 일부, 혹은 몸 전체에 묘한 감각을 느끼면서 감염을 확신한다. 그 느낌이 워낙 생경해서 증상을 느낀 사람들은 그냥 알게 된다고 한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분쇄된 얼음알갱이가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 같은 느낌. 바이러스의 모양이 육각형 모양의 스노우 크리스탈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도 겨울통이라 부른다. 피부나 근육에서 검출되면 부분 겨울통, 혈액에서 발견되면 전신 겨울통으로 분류한다. 전신 겨울통은 온몸을 잃고 부분 겨울통에 걸리면 신체 일부를 잃는다. 녹은 버터가 부드러운 절단면을 남기고 사라지듯 뚝, 하고 떨어진다. 바닥에 투명한 젤 형태의 액체만 남긴 채. 갑작스럽게 퍼지기 시작한 겨울통의 원인을 누구도 밝혀내지 못했으므로 겨울통은 운명의 문제가 됐다. 둘은 슬픔에만 잠기지 않고 남은 시간 있는 힘껏 서로를 사랑하기로 한다. 하지만 동아는 안다. 인하가 자신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런데 여기에서 널 만났어. 이상하게도 너는 갖고 싶더라. 곁에 두고 싶더라고. 그런데 나 요즘 또 그런 기분에 시달리고 있어. 널 잃게 될까봐, 갑자기 사라질까봐, 빈자리를 우두커니 바라보는 그 끔찍한 삶으로 돌아가게 될까봐, 작은 방이 다시 빈방이 될까봐 두려워.”(95~96쪽)
-
자발적 고립의 시대
우리를 끝내 구원하는 것은 사랑일까
인하는 관계에 지친 현대인의 초상이다. 조소과에서 주목받던 루키였던 그가 대학원을 둘러싼 복잡한 이해관계에서 밀려나 소랑이라는 낯선 소도시에 정착한 것은, 어쩌면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지우기 위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타인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성실하고 무던한 청년으로 머물기. 이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인하가 택한 최선의 존재 방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마주 앉아 꾸준히 마음의 파장을 일으키는 동아로 인해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이 바랐던 것은 철저한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이라는 것을. 비슷한 속도와 비슷한 온도로 자신을 온전히 긍정해줄 누군가를 필요로 했음을. 그런 사람에게라면 자신의 모든 마음과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기꺼이 내보이고 싶어 했음을 말이다. 자발적 고립의 시대. 우리를 끝내 구원하는 것은 역시 사랑일까.
1부 소랑
2부 인하
3부 겨울통
4부 동아
작가의 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