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집에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세 권이 나와 한 권을 선물하면서
‘그 싱아 내가 다 먹었다’고 너스레;를 떤 적이 있습니다.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해서 책장을 훑으며
‘나한테는 없는데 무슨 책이 재밌다더라’ 라고 말하고 있으면
딱 그 책이 ‘나?’ 하면서 빠끔히 고개를 내밀기도 합니다.
느슨한 기억력과 직업병에 이런 일을 겪는 저에게는 참 반가운 상상력입니다.
책에도 수컷과 암컷이 있어서 그 사이에서 책이 태어난답니다.
그래서 자칫 책을 잘못 놓아 궁합이 좋은 것끼리 만나면 큰일이 벌어진답니다.
본격 관능 소설입니다, 엄청 야해요, 는 제가 주접을 떠느라 하는 말이고,
따뜻하고 재밌는 소설입니다. 회사에서 인기가 엄청나지요.
책은 외할아버지의 기밀을 자신의 아들에게 누설하는
입 싼 남자가 그린 한 집안의 연대기입니다.
책과 책 사이에서 태어난 책을 ‘환서’라 하는데,
이런 책이 생겨나지 않도록 책 위치를 바꾸지 말라는 엄포와 함께 시작하고 있습니다.
한 애서가의 서가에서 시작해 예측불허의 세계를 그리는,
시시콜콜하게 어마어마하고, 중대하게 사소한 ‘전 지구적 동네 판타지’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이 책을 만들면서 ‘꽂혔던’ 부분은,
기상천외한 발상 속에 흐르는 묘한 리얼리티였습니다.
책이 책을 낳을 정도의 능청은 못 되더라도,
저마다, 집안마다, 동네마다 작은 신화와 금기가 있지 않나 싶어요.
평범한 회사원도 한때는 신동이었고, 지금은 늘 같은 일상이어도 누구에게나 ‘왕년’이 있고,
밤에 피리 불면 뱀 나온다는 말이 문득 생각 나 발뒤꿈치가 싸해지고,
누가 내 이름을 무심코 빨간 펜으로 쓰면 저게 나 죽으라고 저러나 싶어 섭섭해지고…..,
따지고 보면 삶이라는 것 자체가 실제와 환상 그 중간 어디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이 귀여운 할아버지 집안에 흐르는 이야기에 저 먼저 능동적으로 설득당하고 말았습니다.
독자분들도 자신만의 이야기들을 반추하면서 즐겁게 읽으셨으면 좋겠어요.
책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잔잔한 미소와 함께 궁금증을 가질 만한 이야기,
소소한 웃음과 감동을 기다려온 독자들에게도 반가울 이야기입니다.
이 책을 두고 저명한 번역가 기시모토 사치고는 이렇게 얘기했다지요.
“이상합니다. 좋은 의미로.”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끝으로, 회사에서 환서 이벤트를 한다고 해서 저도 살짝 발을 담가 봅니다.
저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과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만나
《도리언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초상》이 탄생하길 바라봅니다..
변태가 따로 없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바삐, 오늘도 여러분의 책장에 은근히 들어앉을
무시무시한 책을 만들러 가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