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 인터뷰 ]
우리들의 삶은 아무 이유도 없는 우연의 연속에 불과하다
8년 만에 소설집《우연한 생》 펴낸 정길연 작가 인터뷰
우리들의 삶은 우연의 장난에 끌려가는 것이며 이 괴로움은 삶이 끝날 때까지 결코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 방민호 문학평론가의 《우연한 생》 작품 해설 중에서
2007년 《나의 은밀한 이름들》,《가족 수첩》 청소년판을 출간한 지 8년 만에 신작 소설집을 내는 소회는 어떠한가?
담담하면서도 쓸쓸하다. 소설 면허를 취득한 지 30년을 넘어선 시점이라 나름 장기근속에 해당하는데, 근무태도는 썩 좋지 않았던 듯싶다. 그래서인지 누군가 내 앞에서 내 책을 언급하면 아 제발 그만하라니까, 외치고 싶다. 어떤 동료 작가로부터 자기가 아는 두 명의 음치 중 하나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음치인데 그 주제에 마이크를 잡아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처럼 곤혹스럽다. 그보다 더 곤혹스러운 것은 내가 내 책에 대해서 말해야 할 때다. 가령 지금처럼 소회를 물어올 때나 내가 쓴 책의 내용을 물어올 때. 과연 나는 어떤 기분이지? 내가 뭘 썼지? 사실 지난 8년 동안 아주 푹 놀거나 생판 딴 짓을 한 건 아니다. 에세이나 동화, 장편소설 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럼에도 ‘8년 만’이라는 단서가 붙는 걸 보니 소설집을 내지 않으면 개점휴업으로 보는 건가? 아! 내부수리를 마치고 간판을 고쳐단 느낌? 그러니까 다시 출발선에 선 기분!
이번에 출간된 《우연한 생》에는 7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인가?
글쎄, 〈당신의 심연(深淵)〉? 〈알래스카, 그 후〉? 해설을 쓴 방민호 문학평론가가 가장 이채를 띤 작품으로 이 둘을 꼽은 것을 보고 속으로 찔끔했다. 그의 눈이 정확했다. 이 두 작품에 내 개인적인 이야기가 가장 많이 녹아 있다. 그러므로 애착이라기보다 애증이라고 해야 더 적확하겠지만, 아무튼 가장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다. 뭐, 제 속으로 난 자식을 두고 등위를 매기긴 좀 그렇지만 그 둘의 인물이 썩 빼어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표제작 〈우연한 생〉에서는 ‘타고난 대로 살다 접으면 그만이다’라는 경비원 양 씨의 인생관이 나온다. 결국 양 씨는 자살하는 주인공에게 깔려 함께 죽음을 맞는다. 제목 그대로 ‘우연한 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상황 설정과 작품의 의도가 궁금하다.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가 미래를 최종적으로 구축한다고 믿지 않게 된 지 오래다. 설계 정도라면 모를까. 언제 어디서 뒤통수를 가격 당할지, 누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이란 알 수 없는 것이지 않은가. 알고자 노력할 뿐이지. 이런 태도 때문인지, 행운을 바라 마지않지만 나는 대체로 불운에 대해서도 관대한 편이다. ‘내게 왜 이런 일이?’가 아니라 ‘내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구나’라는 나의 정서가 자꾸 작품에 개입한다. 굳이 설정하지 않아도, 또 의도하지 않아도 그렇게 된다. 아무래도 그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점점이 흩어진 우연의 포자가 하나의 형태 내지 궤도를 이루어 필연 또는 운명이 되는 것 말이다.
방민호 문학평론가가 지적했듯, <수상한 시간들>과 <자서(自序), 끝나지 않은>은 연민 때문에 자기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 여성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여성들의 삶에 특별히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은 공부 잘하고 집안 좋고 착하고 예쁜 아이들을 아주 미워했다. 소위 깻잎머리에 껌 좀 씹는 아이들을 은근히 끼고 돌았는데, 계도나 교화의 사명감에서가 아니었다. 그저 그 아이들이 편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타인의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눈이 가지 않는다. 그들은 불편하고 불쾌하다. 내가 연민 때문에 수렁으로 빠지는 여성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면, 어쩌면 나 자신이 바로 그런 ‘딱한’ 유형의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빌어먹을’ 연민 때문에 생의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그러고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앞에서 불운에 관대하다고 말했는데 그 가당찮은 오기에 중독된 덕분에 연민도 끊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 연민이 많다는 건 아직 기운이 남았다는 뜻이 아닐까. 아직 내어줄 것이 있고, 텅 비더라도 채울 것이 있다는 오만함, 자해에 가까운 상처를 해독하고 복원하는 능력에 대한 과신. 비록 자기착취로 귀결되지만.
7편의 소설이 그려내는 삶은 결코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등장인물들의 격정적인 감정선이나 어수선한 동요가 크게 드러나지 않는데, 이러한 서술에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내 인물들은 대부분 순응주의자들이다. 격정이나 동요를 드러내기보다 사멸이나 소멸을 택하는 유형들. 다른 이유로는 내 문체가 주는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개성으로 볼 수 있겠지만 캐릭터의 치우침과 함께 내 소설의 한계이기도 하다. 게다가 나는 정리벽이 좀 있다. 살짝 병적일 정도로. ‘울컥’과 ‘욱’ 하는 성미이긴 하지만 산만하지 않은 건 얼른 감정정리 모드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내 인물들이 화끈하게 성질을 부리며 살지 못하는 것이 나로서도 미안하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까 소설의 인물들에 대해서 묻는데 자꾸 나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림이 그 그림을 그린 이의 외양과 내면을 복사하듯 내 인물들도 다 나의 어떤 점을 드러내고 있는 모양이다. 분명 쓸 때는 의식하지 않았는데 쓰고 난 뒤에 읽어보면 나조차도 그 결과에 당황스럽긴 하다.
올해로 등단 31주년을 맞이했다. 작가로서 나의 삶은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근무태도가 훌륭했다고 말하기에는 좀……. 시간을 거슬러 열네댓 살 무렵부터 글 외에 다른 쪽을 기웃거려본 적이 없으면서도 작가로서의 삶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전업이고 생업이긴 했지만 내게 주어진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어서 피할 수 없는 길, 즉 천직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하는데-정답일 것이다-나는 자꾸 작품에서 작가의 내면성을 읽으려고 드는 경향이 있다. 문행(文行)이 일치하는 삶, 내 궁극적인 목표는 그 지점이라고 나를 설득하는 걸 보면. 스스로 불멸의 작가가 못 될 것을 알기에 합리화의 선수치기를 하고 있다는 혐의, 부분적으로 인정한다.
차기작 혹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해준다면?
출판시장이 확실히 축소된 감이 있고 문학에 열광하는 독자가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환경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길을 갈 수 있는 최적기(最適期)라고 생각한다. 현재는 탈북자로서 남한이 아니라 제3국을 택한 난민에 관한 소설을 떠듬떠듬 쓰고 있다. 결국 꾸준히, 묵묵히 쓰는 자가 남을 것이다. 아, 괜찮은 소설을 써야 할 텐데…….
탈북자나 위안부, 고려인 등 역사에 희생된 사람들을 소재로 한 순수문학 책을 만들고 있는 정길연 작가에게 있어서 ‘연민’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기계화된 감정에 지배당하고, 진짜 감정에 인색한 요즘 같은 시대에 상대를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는 ‘연민’은 쉽사리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 할 만하죠. 하지만 이런 시대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연민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감싸 안은 여성들을 <우연한 생> 속에서 그리고 있습니다. 연민, 그토록 순수하고 지독스러운 사랑이 또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