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인터뷰]
『청동정원』을 쓴 최영미작가 인터뷰
“지금에야 80년대가 제대로 보여요”
마치 청동기 시대처럼 아득했던 1980년대를 그리며
“편지함이 담긴 서랍을 열고 닫을 때, 불현듯 밑에서 올라오는 묵직함이 나를 채찍질했다. 내가 어두운 시대의 그림자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한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고? 천만에! 내 몸에서 아직 80년대가 빠져나가지 않았다.” - 『청동정원』 중에서
장편소설 『청동정원』을 출간했습니다. 『청동정원』은 어떤 의미를 담은 제목인가요?
지금 우리는 철기시대를 살고 있지요. 소설을 쓰며 저는 1980년대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2014년에 돌아보니, 1980년대가 마치 청동기 시대처럼 아득했어요. 쇠붙이로 무장한 전경들이 교정의 푸른 나무들과 겹쳐지는 풍경이 바로 ‘청동정원’이지요.물론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데뷔하기 훨씬 이전부터 구상했던 작품이라고 밝히셨는데, 왜 그동안 발표하지 않았는지, 이 소설을 완성하기까지 왜 26년이라는 시간이 걸려야만 했는지 궁금합니다.
1988년 여름, 원고지에 처음 소설을 끼적였어요. 쓰고자 하는 마음이 앞섰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는 어렴풋했지만,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했지요. 그 뒤 틈틈이 메모는 계속했지만, 바싹 긴장하고 달려들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그러다 시인이 되었고, 소설보다 시와 산문을 주로 썼지만, 소설 쓰기에 대한 욕망의 불이 꺼지지 않았어요. 오십대에 들어서면서 노안이 와서 눈이 점점 나빠지는데, 더 늦기 전에 그때 그 시절의 열망과 좌절을 글로 남겨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운동권 여대생, 애린을 통해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경계인의 초상을 그려냈다는 점이 이채롭습니다.작중모델이 된 실제 인물이 있는지, 또는 작가의 경험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창조된 인물인지 듣고 싶습니다.
주인공 애린은 예쁜 옷과 맛난 음식에 탐닉하는 한편, ‘백마 탄 기사’를 기다리는 아주 낭만적인 여대생이에요. 작중인물들의 모델은 물론 있지만, 일단 문장 속으로 들어가면 ‘다른’ 사람이 되지요. 물론 제 경험이 소설 속에 녹아 있지만, 세부 묘사나 대사는 작가가 만든 허구입니다.
이 작품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지요?
처음부터 어떤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소설을 시작한 건 아닙니다. 쓰다 보면 내 속에 이런 게 있었구나, 아-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싶었구나, 하고 문득 깨닫는 순간이 있습니다. 진실은 순색이 아닙니다. 저는 역사 속에 숨겨진 페이지들을 들춰내 복원하고 싶었습니다. 큰 강물이 흘러가면 그 주변에 여러 작은 물줄기들도 같이 휩쓸려 흘러가지요.
애린의 동창생 광우가 들려주는 5월 광주에 대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친구가 좋은 예이지요. 장갑차에 한번 올라가 타보는 게 소원이라 장갑차 타고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는 소박한 젊음도 있었지요.
시가 아닌 소설로써 ‘80년대’를 담아내려고 결심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시로는 다 못한 이야기들이 있어서입니다.
‘작가의 말’에서,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셨는데, 취재를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료 조사나 취재하면서 있었던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5월 광주를 어떻게 쓸까를 놓고 제일 많이 고민했습니다. 당시 대학의 상황과 생생한 사회 분위기를 파악하려 옛날 친구들도 만나고, 1980년에 서울 시내 영화관 조조 관람료를 알려고 신문광고까지 복사했지요. 신문사 자료실도 어지간히 뒤졌습니다. 서울 시내 광화문에 위치한 어느 신문사 입구의 수위에게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컴퓨터 앞에 앉아 옛날 신문들을 돌려본 뒤에 이십여 장 넘게 인쇄했는데, 자료실 직원이 종이 값을 안 받는 거예요. 제가 누군지 알아본 누군가 여직원에게 귀띔한 거죠. 2만원은 넘었을 텐데. 그런데 그렇게 공짜로 자료를 복사한 뒤로는 그 신문사 자료실은 미안해서 다시는 못 가겠더군요,하하.
한때 운동권의 후일담 문학 작품의 출간이 붐을 이뤘던 적이 있는데요. 뜨거웠던 시절을 회고하는 소설로서 『청동정원』의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글쎄요, 그건 제가 감히 말할 처지가 못 되는 것 같아요. 독자들이 읽고 판단할 문제라고 생각해요. 소위 후일담 문학이 소련이 망한 직후인 90년대 초에 쏟아졌는데, 한 시대를 돌아보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닌가요. 저는 변화에 반응하는 속도가 느려서, 제 경우 몇십 년이 지난 지금에야 80년대가 제대로 보여요.
차기작이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연애소설을 한번 써보고 싶습니다. 세 가지 색깔의 연애소설을 각각 300매 정도의 분량으로 시리즈로 엮어보고 싶어요. 저는 마감이 닥쳐야 써지는 스타일이라, 연재할 데가 있다면 내년 봄부터 시작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