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도 꼭 대학교 친구들만 만나면 질리지도 않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만약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다. 우리들의 건설적인(?) 이 놀이는 허무맹랑한 양자택일 방식으로 시작한다.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김태희? 전지현?” “만약에 두 남자가 동시에 고백을 했는데 그 두 남자가 원빈과 정우성이라면?”
적고 보니 민망하기 그지없지만 이런 식으로 아까운 시간을 축내며 한참을 떠들다 보면 어느 순간 꼭 초점이 학창 시절로 맞춰진다. 대학교에서 만난 우리들이 떠올릴 수 있는 지나간 시절에 대한 회상은 중 고등학교 시절이 전부인 까닭일까. 누가 뭐래도 빛나는 가능성이 잠재했을 그 시절, 내가 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과 아쉬움이 언제나 내 발목을 붙잡으며 미련을 남기기 때문일까. “만약에 그때 말이야”로 다시 시작된 수다는 끝도 없이 뻗어나간다.
“만약에 그때 문과가 아니라 이과에 갔더라면” “만약에 그때 자퇴를 했더라면”(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정말 자퇴를 하고 싶었다. 아래 소개할, 강압으로 가득 찬 학교를 경멸하던 오쿠다 소년과 정확히 같은 지점에서. 선생님께도 부모님께도 야심차게 선포했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무슨 베짱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때 그 시절의 나 역시 치기 어린 청춘기의 역풍을 정면으로 맞고 있었나 보다. 하지만 정말 자퇴했더라면? 이렇게 상상은 또 시작된다.)
이런 공상으로 심심치 않은 나날을 보내던 중, 잊고 있던 한 원고가 도착했다. 무려 저자가 오쿠다 히데오다. 그런데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 그중에서도 음악? 또 그중에서도 록이 중심 소재인 그런 원고였다. 맞다. 그랬었다. 원제 역시 《시골에서 로큰롤(田舍でロックンロ-ル)》 그대로이지 않은가.
흔히들 재미있는 책을 만나면, 도저히 손에서 놓을 수 없어서 밤새워 읽었다,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는 등의 말을 하는데 이 책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이 원고를 오랫동안 끙끙대며 붙들고 있어야 겨우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지루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소설에서만 빛을 발하는 줄 알았던 오쿠다 히데오의 글맛은 에세이에서 더 진가를 발하는 느낌이었다. 다른 화려한 수식어 필요 없이 그냥 재미있다. 한 문단마다 한 번씩 피식피식 웃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읽는 속도가 붙지 않았던 까닭은 두 가지다. 먼저 “록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작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문장을 보고, 그렇다면 나 또한 “만약에 그때 록 음악을 들었더라면?” 하는 상상의 세계에 빨려 들어가 헤어 나오질 못했던 것이고, 한 문단을 읽을 때마다 피식거림과 동시에 계속 음악을 찾아 듣느라(음악을 꼭 찾아 듣게끔 글을 써주셨다. 찾아 듣기 귀찮은데 그냥 읽을까 싶다가도 한 문단을 넘기지 못하고 궁금하다. 도대체 무슨 노래길래?) 읽기를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십중팔구 내 인생 방침은 중학교 1학년 여름에 정해졌을 것이다. 자유롭게 살고 싶다, 남이 안 하는 일을 해보고 싶다, 체제와는 반대편에 서고 싶다, 소수파로 있고 싶다, 모두가 오른쪽을 보고 있을 때 나만은 왼쪽을 보고 싶다. 청개구리라고 한다면 “네, 맞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지만, 나는 아저씨가 된 지금도 베스트셀러 책은 읽지 않고, 브랜드 물건 따위 사지 않고, 권위를 믿지 않는다. 문학상을 타면 여러모로 편리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런 거 하나도 안 고맙거든’ 하는 어린애 같은 오기가 있다. 그럼 받지 말라고? 아니, 상금은 탐나니까.
때는 1972년, 일본 기후 현 가카미가하라라는 시골에 지역 라디오 방송 애청자 오쿠다 히데오가 있었다. 중학교 1학년 오쿠다 소년은 처음에는 가요곡을, 이어서 포크 음악을,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외국 팝송에 흠뻑 매료됐다. 다니던 시골 학교가 매우 억압적이었기에 ‘자유’를 상징하는 록에 더욱 빠져들었다. 라디오를 들으며 시작된 오쿠다 소년의 취미는 (아버지를 조르고 졸라) 오디오를 사면서 록 레코드 수집으로 바뀌었고, 비틀스, 핑크 플로이드, 딥 퍼플 등 전설적 명반들을 사 모았다. 1975년 고등학생이 된 오쿠다 소년은 퀸의 첫 내일 공연을 보러 가서 드디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록 스타를 만났고 그 후로도 산타나, 레인보 등 콘서트에 수차례 갔다. 공부는 일찌감치 내던져버린 오쿠다 히데오의 반항적인 학교 생활과 그 위태로운 시기를 지탱해준 록 밴드들에 관한 에피소드와 감상이 적절하게 잘 버무려져 있다.
이 연재를 읽는 분은 진작에 눈치채셨겠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학교가 싫다. 똑같은 옷을 입혀 줄을 세운다는 것만으로도 굴욕감을 느껴 반항하고 싶어진다. 자유를 규제하고 단일한 가치관을 심는, 그런 권력의 지배를 마음속 깊이 증오한다. 그러니 록과 궁합이 잘 맞는 것은 필연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록이 없었다면 내 십대 시절이 과연 어땠을지. 록은 전세계 수많은 사람의 청춘을 구해주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나도 슬슬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이런 말도 있다. ‘대체 뭘 위한 공부인가. 좋은 대학 가서 좋은 회사 취직하고 그럼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는 건가. 넥타이 매고 만원 전철에 갇혀서 회사에 가면 윗사람에게 머리나 숙이고, 난 그런 인생은 살기 싫다.’ 만원 전철 타고 다니는 나를 두고 하는 소리인가, 하는 생각에 얄밉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런 생각 모두가 한번쯤은 해보지 않았을까. 아니 만원 전철로 출근하는 오늘 아침까지도. 나도 그랬던 것 같다. 내 흔들리던 고등학교 시절은 어떤 음악이 보듬어주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다행이다’가 수록된 이적 3집 <나무로 만든 노래>에 한참 빠져들다가 결국 ‘패닉’의 노래들을 사랑했다. 강한 실험정신과 사회 비판적 목소리가 멋있었다. 이 역시 오쿠다 소년과 같은 이유인 것이다. 이 책을 편집하며 자주 듣는 음악 재생목록에 70년대 클래식 록을 추가했다. 명곡은 시간이 흐를수록 깊이가 더해간다는 이야기를 체감하며. 과연 내가 중 고등학교 시절에 “록을 함께 했더라면” 어땠을까? 나도 오쿠다 히데오처럼 작가가 될 수 있었을까? ㅎㅎ
아무쪼록 단숨에 읽기 어려웠던, 이것저것 작업할 것들도 많았던 이 원고를 책상 저편으로 치워놓고 완성된 책을 한번 더 읽어보았다.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갈 길을 잃고 헤매던 수많은 청춘을 구원해준, 길어야 5분 정도인 노래 한 곡이 지닌 힘에 대해서. 그 음악을 들었던 나날들을 글로 옮겨 적음으로써 그때 그 시절을 완벽하게 재생시켜 향수를 불러 일으킨 책의 힘에 대해서. 이 책으로 잃어버린 청춘의 시간을 잠시나마 떠올릴 수 있기를 바라며, 내가 그러하듯이 때때로 지나간 과거를 그리워하며 두 번째 청춘을 갈망하는 분들을 깊이 응원하며 글을 마친다.
<시골에서 로큰롤>에 소개된 음악을 한 곳에서 감상할 수 있는 웹 페이지를 방문해보세요!
오쿠다가 엄선한 전설의 명반 48장의 대표곡을 들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