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코 뜰 새 없다’ ’24시간이 모자라’ ‘시간에 쫓기다’
시간에 관한 관용구를 살펴보면 시간이 넉넉한 것에 관한 말보다 부족한 때를 표현하는 말들이 더 많이 나타납니다.
실제로 우리는 시간에 대해 넉넉하다는 느낌보단 모자라다는 느낌을 훨씬 많이 받습니다. 시간이 모자라고, 시간이 없고, 시간에 쫓기고. 출근 시간에 쫓기고, 마감에 쫓기고, 납기일에 쫓깁니다. 시간을 아껴야 한다며 쉐이크나 에너지바 등으로 끼니를 대충 때운다거나, 잠 잘 시간을 아끼겠다거나 전날 못 잔 것을 보충한다며 커피나 에너지 드링크를 영양제처럼 마실 때면 왜 이러고 사나 싶어지기도 하지요. 시시각각 조여오는 시간의 포위망에 우리는 너무나도 무기력합니다.
얼마 전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숨진 스크린도어 수리공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참변의 요인 중에는 수리를 빨리 마치기 위해 역무실에 했어야 할 사전 보고를 관행인 양 생략하여 구의역에서는 수리를 하는 사실을 몰랐던 것도 있었죠.
그때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던 것은 수리공의 가방에서 나온 컵라면과 숟가락이었습니다. 시간에 쫓겨 보고도 못한 채 수리를 하다 참변을 당한 어린 수리공은, 끼니조차 제대로 챙길 겨를이 없어 가방 안에 수저와 컵라면을 들고 다니며 끼니를 때우곤 했던 것이죠. 그 한 장의 사진에서 시간에 쫓기는 고단한 노동자의 모습을 읽어낸 우리들은 그의 비극이 우리의 비극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24시간으로 이루어진 하루는 촘촘한 일과표로 재단되어 우리 삶을 규격화합니다. 업무 관계로 연락하는 사람에게 점심 즈음이면 자동적으로 ‘맛점하세요(점심 맛있게 드세요)’라고 인사하고요, 저녁 약속은 보통 일곱 시께로 정하곤 하지요. 나인 투 식스, 3교대, 주 40시간, 심야, 철야, 조퇴, 점호 등등, 시간과 관련된 용어들은 우리 삶을 빼곡히 채워넣고 있습니다.
한 달은 또 어떤가요. 달마다 월급날도 돌아오지만 마감일도 돌아오고요, 월간 계획과 가계부를 갱신하면서는 지난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자책하기도 합니다. 1년은, 송년회와 신년회를 핑계로 흩어져 만나던 친구들이 함께 모이기도 하고요,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나이는 하나 더 붙는데 이뤄논 것은 없는 것 같아서 그저 참담해지기만 합니다. 왠지 신년을 빌미로 자아비판과 건설적인 새해 계획 수립을 강요받는 것 같아 누가 연 단위를 구분했냐며 화도 내보고요.
그러면서 우스갯소리로 나를 날짜별로 나누어 대립시키기도 합니다. 어제의 내가 게을러서 오늘의 내가 고생한다거나, 모든 것은 내일의 나에게 맡긴다면서요. 어제와 내일의 내가 얼마나 다르다고 말이에요.
이렇듯 밥벌이와 관련되어서도, 개인적인 생각에 있어서도, 우스갯소리에 있어서도, 시간의 구분은 우리의 사고를 완벽히 지배하고 있어서 우리 중 누구도 시간의 분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를 시시각각 몰아붙이는 괴물과도 같은 ‘시간’. 그런데 이 시간이라는 것이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게 불과 4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은행나무 새 책 《라이프니츠, 뉴턴 그리고 시간의 발명》은 시간이 어떻게 발명되었는지 그 기원을 좇습니다. 시간에 관해 상이한 견해를 갖고 논쟁한 라이프니츠와 뉴턴의 생애를 중심으로 말이죠.
라이프니츠와 뉴턴은 진자시계가 발명되면서 사람들이 시계를 소유하기 시작한 시간의 역사 그 복판에서 호흡한 인물들입니다. 3년 반 터울의 두 위인이 태어날 때만 해도 시계는 도시에 나가서야 탑시계에서 볼 수 있을 뿐, 시간은 해의 움직임을 통해 읽어야만 했었죠. 하지만 분과 초를 잴 수 있는 진자시계가 발명되고 사람들이 시계를 호주머니와 집 안에 들일 수 있게 되면서 사람들은 이제 해의 움직임이 아니라 시계를 보고 시간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계를 보고 시간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멀리 떨어진 장소에 있는 사람들이 시계만 손에 들고 있으면 하나의 시간 체계를 공유하는 것이 되었고, 해의 움직임과 무관하게 시간을 구획한다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또 시간을 재서 소요 시간을 정교하게 비교하는 일도 가능해지게 되었죠. 실제로 17세기 영국에서 ‘시간과의 싸움’인 경주나 경마가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하고요.
시계가 생기면서, 이전에는 없던 시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시간 개념이 지금의 우리에겐 너무 당연한 만큼 시간의 발명에 열광하는 당시 유럽인들의 모습이 참 낯섭니다.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를 갖는 것이 유행이 되면서 집에 들인 시계의 크기를 경쟁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회중시계를 지니고 다니는 당대인들의 모습에선 마치 스마트폰과 TV 사양에 열광하는 우리의 모습도 겹쳐 보이고요.
그렇게 시간이 발명되고 나서부터 당대인들은 ‘시간 엄수’를 입에 올리기 시작합니다. 책에 인용된 당대의 인물들 중 9년간 런던에서의 생활을 일기로 기록한 새뮤얼 피프스를 보면, 근무시간 안에 밀린 일을 처리한다며 ‘바쁘다’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합니다. 시계가 상용화되지 않았던 농촌과 달리 근무시간과 여가시간이 분리되어 각 스케줄마다 시간의 영역이 지정되기 시작한 것이죠. 시간을 편편이 나누어 용처에 따라 이름을 붙이는 일. 이제 근대인들은 호주머니의 시계가 선사하는 구획에 따라 생활하는 사람을 모범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라이프니츠는 묘비에 “시간을 허비하면 삶의 일부가 사라진다.”라고 썼다고 하지요.
이처럼 시간이 근대의 산물로 발명된 것이 17세기, 크리스티안 하위헌스가 최초의 진자시계를 발명한 것이 1657년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400년도 되지 않은 때입니다. 그때부터 그 짧은 시간 안에 인간은 현대의 생활 리듬을 습득하기 시작한 것인데요.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의 발명품에 이렇게 끌려다니고 있을까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의 약속에 따라 만들어진 시간은 오늘날 절약해야 할 하나의 자산으로 여겨집니다. 시간 관리, 시간 절약, 효율성과 같은 단어들은 자기계발서들의 표지 면면에서 범람하고 있지요. 그런데 효율을 핑계로 진짜 필요한 것들이 잊혀진 나머지 인명까지 희생되는 현대사회에서라면 한 번쯤, 그 고약한 시간의 정체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쯤 되면 돈을 숭배하는 것처럼 시간마저 숭배하는 것도 아닌가 싶어질 지경입니다. 하기사 시간보다도 역사가 짧은 스마트폰에 많은 이들이 생활을 저당 잡힌 것을 보면…
그래도 시간은 근대의 발명품이고 사람들 사이의 규약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지, 절대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시간의 기원에 대해 좇는 책, 지금의 시간 체계가 없던 자리를 보여주는 책. 《라이프니츠, 뉴턴 그리고 시간의 발명》에서 갓 태어난 시간을 정의하려 애쓴 위대한 두 학자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일대기와 논쟁사를 읽다 보면 시간이라는 존재가 괜시리 낯설게 느껴집니다. 시간의 분절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우리가 한 번쯤 그런 기회를 갖는다면, 시간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깊이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