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만들다 보면 표지나 띠지 어디에 적지는 못하는데, 독자분들과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알게 됩니다. 그런 이야기, 본격 인문 예능 알쓸신잡에 기대어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알고 보면 쓸 데는 없어도신명나게 책 읽을 얘기를 하는 게 내 job…….
이 책의 출발점은 작가가 느낀 배신감이었다
이미 저희 포스트를 통해 이 책의 모티브는 실재했던 노예 탈출 비밀 조직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작가는 어릴 적에 이 지하철도가 실제 지하에 깔린 철도라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이게 비유라는 사실을 알고 약간 화까지 났다는 소년 화이트헤드. 그는 ‘만약 실제 지하철도라면?’이라고 상상했고, 이 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소녀 코라는 뒤를 바짝 쫓는 노예 사냥꾼을 피해 지하철도를 통해 조지아의 농장에서 다른 주로 도망을 갑니다.
이 책이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을 함께 받으면서 ‘올해는 이 책이야’라고 도장을 찍었습니다만, 저는 SF 걸작들에게 주어지는 아서클라크상을 함께 받은 점이 더 놀랍다고 생각을 했어요. (작가도 놀랐다는 소식이..)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작가가 노예제의 부조리를 쉽고 입체적으로 그리는 데, 지하철도라는 장치를 얼마나 영리하게 활용했는지를 생각한다면 아서클라크상이야말로 당연히 그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 퓰리처상측에서도 ‘리얼리즘과 픽션의 영리한 융합’이라고 선정 이유를 밝히기도 했지요.
논란의 20달러 주인공 해리엇 터브먼이 코라의 모델?
지난해 미국 행정부는 20달러 지폐 주인공을 흑인 해방 운동가 해리엇 터브먼으로 교체하겠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그녀는 지하철도를 통해 300여 명의 노예를 탈출시킨 운동가이자 그 자신이 지하철도를 통해 노예 신분을 벗어던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후 남북전쟁에서는 북부군의 스파이로, 전쟁 이후에는 여성 참정권을 위해 활동했고요.
코라를 보면 바로 이 해리엇 터브먼이라는 인물이 떠오릅니다. 작가가 현실 고증을 위해 참고했다고 밝힌 목록 중에 해리엇 터브먼의 전기가 있기도 하지요. 코라는 남부 농장 시절, 할머니와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땅뙈기를 빼앗으려는 웬 무뢰한 같은 노예와 충돌하게 됩니다. 그 노예가 코라의 밭을 갈아엎고 그 위에 개집을 지어놓자, 코라는 말없이 도끼를 끌고 가 개집을 박살을 내지요. 그리고 눈빛으로 말합니다. ‘네가 나를 이길지는 모르겠지만,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어쩌면 해리엇 터브먼이 코라의 모델이라기보다 코라를 통해 해리엇 터브먼이 노예였을 시절, 이런 담대한 모습이었으리라고 추측해볼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최근 20달러 지폐 교체를 보류하고 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다른 사안들이 더 급하다는 이유로 비준을 거부하고 있다는데요, 실제 이유는 트럼프가 현재 20달러 지폐 모델인 잭슨 대통령의 팬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입니다. 여성 투표권이 생긴 지 10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해 2020년 디자인을 공개하기로 했던 계획은 무산 위기에 놓였습니다. 미국도 고생이 많아요..
이 책에 나오는 수배 전단은 모두 실제
코라가 지하철도를 통해 다른 주로 넘어갈 때마다 위와 같은 현상수배 공고가 하나씩 나옵니다. 이 공고문은 작가가 만든 게 아니라, 실제 있었던 공고문들입니다. 작가는 미국 방송국 NPR과의 인터뷰에서 그럴듯하게 만들어도 “때로 역사적 기록물과 견줄 수 없을 때가 있다”면서, 그린즈버러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의 디지털 도서관에서 참고했다고 말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그 당시 30달러는 현재 550달러 정도의 가치라고 합니다. 이 책에 공개된 수배 노예들이 모두 붙잡히지 않고 자유 속에서 살아갔기를 바랍니다.
이 책은 실화다
코라는 원래 도망갈 생각이 없었던 인물입니다. 백인들이 어차피 자신들을 죽일 테지만, 죽임을 앞당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다 탈주를 결심하게 되는 결정적 사건이 일어납니다. 도망갔던 다른 노예가 붙잡혀왔는데, 3일 밤낮을 마당에 묶여 있게 됩니다. 주인은 백인 손님들을 데리고 오고, 그들은 차를 마시며 고문 장면을 지켜봅니다. 그리고 성기를 잘라 입에 물리고 꿰맨 후, 소리조차 치지 못하는 그를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입니다. 동료의 타들어가는 살 냄새에 고개를 돌리거나 눈물을 흘리는 자의 얼굴을 내려친 주인은 백인 구경꾼들을 데리고 농장을 구경시켜주려 떠납니다.
소설에 담긴 이러한 당대의 살풍경은 모두 충실한 사전조사를 통해 완성된 것입니다. 특히 작가가 ‘감사의 말’에서 밝혔듯 1930년대 발행된 노예였던 자들의 인터뷰집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현실감 넘치는 디테일들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독자들도 코라와 함께 다음 열차가 오길 간절히 기다리게끔 하지요.
작가 본인은 ‘지하철도’가 실제 지하철도가 아니라서 부들부들했다지만, 작가의 이 작품이 앞으로 많은 이들로 하여금 지하철도가 실재했던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이 책을 다 읽고 나시면 퓰리처상측에서 왜 이 책을 ‘영리하다’라고 말을 했는지 수긍이 가실 겁니다. 인종 문제를, 나아가 폭력과 억압의 문제를 이렇게 쓸 수 있다니, 하는 생각이 드는 책입니다. 처음 이 책 원고를 사장님께 건네고 나서, 언젠가 한번 부르셔서 올라갔더니 (날 왜?!) ‘내가 이 책을 읽느라 에어컨 끄는 걸 깜빡해서 감기가 걸렸다’라고 말씀하신 건, 실화입니다. 아무쪼록 즐거운 독서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