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세상에서 뭘 할 수 있겠느냐고? ─ 《자유의 기술》 편집 후기

지금 자유로우신가요?
지금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통해 이 글을 읽고 있으신 분이라면 적어도 지금 어떤, 일과 무관한, 여흥으로서 블로그 포스트를 읽어볼 정도로 시간을 ‘자유로이’ 활용할 정도는 되시겠어요.
예를 들어 건강상의 문제로 침상에 꼼짝없이 누워서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 웹서핑을 하시던 중에 이 글에 시선이 걸리셨거나 격무에 야근을 하는 와중에 잠시 숨 좀 쉬자며 화장실에 앉아 폰을 만지며 이 글을 접하신 거라면, 조금 부자유스러우시겠고요.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로울까요?
‘우리’로 주체가 묶이다 보니 공간도 시간도 조금 거시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2016년을 살아가는, 한국 사회의, 고단한 생활인들. 어쨌건 수도권 통근 직장인인 저를 기준으로 생각하면─매일 출퇴근 열차와 도로에 몸과 차를 싣고 정오 즈음에 점심밥을 씹어 넣으며 저녁까지, 혹은 밤까지 일하는 우리들. 계약 상황이나 직무에 따라 남들의 휴식시간인 심야마저도 회사에 시간을 맡겨야 하고요.

갑자기 여러분이, 혹은 우리가 자유로운지 여쭤본 이유는 지난 초가을에 나온 페터 비에리의 신간 《자유의 기술》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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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메르시어란 필명으로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쓰기도 한 독일의 철학자 페터 비에리의, 《삶의 격》과 《자기 결정》과 함께하는 ‘삶과 존엄’ 시리즈 마지막 책이죠.

이 책을 한창 작업하던 여름, 저는 자유를 철학적이고 교양적으로 말하는 이 원고를 읽으며 늘 ‘자유’란 단어를 머리에 달고 살았었습니다.
제목이 ‘자유의 기술’인 만큼 주제는 자유. 그러다 보니 자유, 그리고 반증을 위해 제시되는 부자유라는 단어 두 가지가 책에 빼곡하게 차 있었기 때문이지요.
어려운 원고를 놓고 독일어 원서와 번갈아가며 눈을 줘가면서 ‘자유’와 그 독일어인 ‘freiheit’ 사이를 오가는 와중, 급히 잡힌 회식 때문에 저녁에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며 미안해하던 친구에게 내심 안도하며 괜찮다고 안 그래도 회사에 일이 많아서 야근이나 하면 된다고 말하는 저를 보면서 좀 억울해졌습니다.

기억하시나요?
7월 초, 우리를 엄청 분노케 한 발언이 있었죠. “민중은 개, 돼지다.”
당시 교육부 정책 기획관이던 나향욱 씨가 사석에서 한 말이 보도되며 정부 요인이 국민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 정도구나, 라는 (사실 막연히 느꼈지만 에이 설마 그러겠어 의심했던 것에 대해) 심증이 굳어지면서 모든 국민들이 분노했습니다.
다른 생각은 무시하고 먹고살게나 해주면 된다면서 하는 말이었는데,
실제로 어느정도 먹고살게나 해주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차치하고라도, 숨 쉬는 동안 생을 적당히 꾸려나갈 수 있도록 내일과 내년과 10년 뒤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나의 내면이 송두리째 부정당한 것 같은 말이었죠.
나는, 내 친구들은, 동료들은, 이렇게 하루하루 고민하고 자괴감도 느껴가며 분투하고 또 버텨내면서 내 삶을 스스로 도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모든 노오력을 무시하고 있구나, 싶어서요.

그들은 왜 우리를 개돼지라고 생각할까요?
그리고 저는, 우리는 왜 화가 났을까요?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
이 말에는, 먹고 사는 삶의 기본적인 문제 이외에 삶의 주체로서 아무런 생각이나 고민도 할 필요가 없다는 멸시가 담겨 있지요. 어차피 너희에게는 큰 선택지가 없다, 그러니까 삶을 꾸려갈 자유가 없다, 로 읽히는…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존재라고 폄하받은 그런 느낌.

‘어찌할 수 없다’. 선택의 자유가 없는 존재. 현실에 수많은 제약이 있든, 선택을 고민할 지적 능력이 없든, 어쨌든 허다한 이유들로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죠.
그즈음 제가 원고를 작업하고 있던 《자유의 기술》에는 ‘어찌할 수 없었던’ 존재가 가장 주요한 사례로 제시됩니다.
바로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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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에 조세프 본 스텐버그가 영화로 만든 《죄와 벌》에서 피터 로어가 연기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

라스콜리니코프는 ‘어쩔 수 없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말하는 인물입니다.
가난 때문에 학업도 중단하고 근근히 먹고살게 해주던 일자리를 잃은 상황에서, 동생은 팔려가듯 결혼을 ‘당해야만’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평소 생각하던 사회 정의에 따라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면서요.
라스콜리니코프의 ‘어쩔 수 없었다’라는 말에는, 선택의 여지나 자유가 본인에게는 없었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자유의 기술》의 저자 페터 비에리는, 그런 라스콜리니코프를 상상 속 법정에 세웁니다. 자신에겐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고 ‘어쩔 수 없었다’ 변론하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주장은 일견 그럴듯해 보입니다.
빈곤은 라스콜리니코프를 정신적으로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습니다. 돈 때문에 학업도 중단해야 했고, 돈벌이도 끊긴 마당에, 고향에 있는 여동생이 그런 자신을 위해 마음에도 없는 인성 나쁜 변호사에게 팔려가듯 결혼을 한다고 하니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겠어요. 그때 늘 갖고 있던 생각에 따라, 그리고 주점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것을 들으니 더욱 확고하게, 사회를 위해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버러지 같은 전당포 노파를 제거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물론 돈을 위해서요.
자신이 처한 빈곤이라는 환경, 비참한 처지, 그로 인해 갖게 된 사회 정의관. 이런 것들로 인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노파를 살해하는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선택의 자유가 없었는데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 건 부당하다며, 페터 비에리가 만든 상상 속 법정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정말 자유가 없었던 걸까요?

죄를 묻는다는 것은 책임을 지운다는 것이고, 그때 책임은 벌인 행동과, 그 행동에 대한 결정에 대해 묻는 것이고,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는 것이죠. 때문에 라스콜리니코프를 처벌하려면, 그가 갖고 있었던 선택지에 대해서 고민해봐야 할 텐데요.
《자유의 기술》의 상상 속 법정에 선 라스콜리니코프는 《죄와 벌》에서처럼 유죄를 선고받는데요, 페터 비에리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변명을 해부하여 마치 쥐 몰이를 하듯 그의 변론의 여지를 조금씩 삭제해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 후 그에게 책임을 지우게 됩니다.
어쩔 수 없었다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변론하는 라스콜리니코프에 대해 페터 비에리가 제시하는 개념이 선택의 여지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자유에 있어서의 ‘여유 공간’입니다.

라스콜니코프의 행동은 자유로운 것이다. 그는 몸이 마비되지도, 손발이 묶인 것도 아니고 전당포 노파의 집으로 뻗은 계단을 오르는 동안 그의 행동을 저지할 만한 그 무엇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살인 의지를 마음껏 뻗어나가도록 놔둘 수가 있다. 그런데 그의 자유에는 또 다른 무엇이 있다. 노파를 쳐 죽이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가 아니다. 다른 것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있는 힘껏 다른 일자리를 알아본다든가 여동생의 남편이 될 사람이 주는 돈으로 살아간다든가 아니면 은행을 털 수도 있다. 그에게는 가능한 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 여지, 여유 공간이 있다.
이 ‘여유 공간’은 페터 비에리가 자유를 이야기하는 데에 있어서 굉장히 핵심적인 개념입니다. 그 여유 공간이 좁고 넓고의 차이일 뿐, 누구에게나 자유로이 선택할 여유 공간은 존재한다는 것인데요.
곤궁함의 극치에 빠져버린 상황, 사회 정의에 대한 생각이 극대화된 내면, 버러지 같은 노파와 노파가 가진 많은 돈, 결국 노파 앞에서 도끼를 든 손을 쳐들어버린 상황. 이 모든 조건들이 너무나 강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노파를 살해하는 것 말고도 다른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좁디 좁은 여유 공간이 라스콜리니코프에게는 존재한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갑자기 살인을 저지른 자신에게 실망할 여동생의 눈망울이 떠올라 도끼를 급히 감추고 술 취한 척 노파를 껴안고 안부를 묻는다거나요…
어쨌건 그 모든 여유 공간, 선택지를 외면하고 어쩔 수 없다고 뇌까리며 노파를 죽인 것은 라스콜리니코프의 선택이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어쩔 수 없어’라고 자조하는 상황들을 떠올려봅시다.
우리를 제약하는 조건들이 너무나 많아서 우리에겐 여유 공간이 없는 것만 같죠.
당이 떨어진 것처럼 기운이 없는데 어제 과식을 해서 ‘어쩔 수 없이’ 저녁을 굶고요, 용돈이 모자라서 사고 싶었던 악세사리를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고요, 적당한 매물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독립을 포기해야 하고요, 야근을 하고 나니 너무 피곤해서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고요, 전날 숙취가 채 가시지 않았는데도 회식이라 ‘어쩔 수 없이’ 또 술을 마십니다. 결혼 자금을 마련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이번 여름 휴가는 해외 여행을 꾹 참고요, 퇴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가족을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계속 회사를 다니고요,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을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취직을 하기로 합니다.
우리 삶에 어쩔 수 없는 것들은 얼마나 많던가요.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정말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다이어트보다 당장 기운이 더 중요하면 식사는 제때 챙겨야 하고요, 그 악세사리가 정말 사고 싶다면 7000원짜리 백반 먹을 것 3000원짜리 김밥으로 때워가면서 살 수도 있고요, 정말 독립을 하고 싶다면 조금 조건 안 좋은 집이라도, 대출을 받아서라도, 예산보다 월세를 올려서라도 나갈 수 있고요, 아무리 피곤해도 지친 몸을 이끌고 대중교통을 탈 수는 있고요…… 형편 어려운 가족, 몇 년 눈 질끈 감고 나만 본다 생각하며 장학금 받아서 대학원 공부를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얄밉고 속 모르는 소리 같고 야멸차고도 기계적인 해결 방안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정말 존재하지 않는 해결책도 아니잖아요. 내가 다이어트를 하기로 결심했으며, 내가 식사를 제대로 챙기는 사람이며, 내가 가정 형편을 살뜰히 돌보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결정들을 내리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뿐이지, 조금 더 애써서 생각했더라면, 다른 선택의 가능성들을 진지하게 ‘숙고’했더라면 다른 선택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랍니다.

《자유의 기술》에서 페터 비에리는 이것을 두고 ‘조건적 자유’라고 말합니다.
나를 둘러싼 환경, 내가 가진 생득적인 기질, 그 모든 것들이 ‘조건’으로 작용하며, 그 조건때문에, 혹은 그 조건에도 불구하고, 숙고 끝에 어떠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우리가 가진 자유라는 것이지요.

요즘 광장의 촛불들을 보면서 1년 전 민중 총궐기 때와 지금의 광장을 바라보는 시선의 온도차를 생각하며, 페터 비에리가 말하는 ‘조건적 자유’를 떠올려봅니다.
1년 전이나 지금이나 광장에 나오지 않거나 나온 사람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 삶은 여전히 팍팍하고, 그간 취업이 되었거나 결혼 또는 출산을 겪는 정도의 변화는 있었을지언정 광장에서 모아 내비치고픈 사회적인 뜻을 지니고 있고 있지 않고의 차이는 없거든요.
우리가 전보다 살기가 좋아져서 주말을 내팽개치고 광장에 모이는 걸까요? 예전에는 현실에 비판적인 시각이 없었는데 갑자기 스위치가 눌려버린 걸까요? 물론 1년 전보다 지금 낱낱이 까발려진 시국이 참 암담하긴 합니다마는……
저는 여기에서 광장에 나오는 시민들의 ‘조건적 자유’를 생각합니다.
똑같은 사회적 현실과 똑같은 내 생활이지만, 그리고 나의 영향력은 여전히 미미할 것 같지만, 참다 참다 못해 이제는 밖으로 뛰쳐나와 내 작은 힘이라도 보태어야 함을 ‘숙고 끝에’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지요.
우리 민초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갖고 있는 제약이 허다하지만, 갖고 있는 여유 공간에서 또 다른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제약, 조건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유롭게 내린 선택이 더 값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보다 더 넓은 여유 공간을 갖고 있으면서도 참 일차원적이고 이기적인 선택을 한 다른 편의 누군가들이 오히려 개, 돼지인 건 아닌지……

이렇듯 페터 비에리가 이야기하는 진정한 자유, 곧 ‘조건적 자유’는 참으로 매력적입니다.
‘어쩔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삶을 일궈나갈 수 있는 희망을 주거든요. 우리가 가진 조건들 때문에,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진 여유 공간 안에서, 심사숙고하여, 어떤 선택을 한다면 그건 내가 자유로운 것이라며.
페터 비에리는 라스콜리니코프를 비롯해 다양한 상상 속 예화들을 생생히 펼쳐내면서 의지, 결정, 행동에 있어서의 조건적 자유를 논해갑니다. 그 반례인 부자유스러운 상황이나 무조건적인 자유에 대해 먼저 논하고 그것을 반박해나감으로써 마침내 진정한 자유, 조건적 자유를 찾아가는데요. 그 여정은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하지요.(비단 488페이지를 다 읽어내서뿐만이 아니라)
자유에 대해 한창 생각하던 지난여름의 제게 힘과 희열을 선사한 페터 비에리 논리의 묘는 《자유의 기술》을 통해 직접 확인 가능하십니다.
고된 삶에도 불구하고 치열하게 삶을 꾸려가는 우리의 곤란함을 서로 보듬고 응원하십시다.

지음 페터 비에리 | 옮김 문항심
시리즈 일상 인문학 8 | 분류 종교/인문 | 출간일 2016년 9월 9일
사양 변형판 148x216 · 488쪽 | 가격 17,000원 | ISBN 9788956606026
페터 비에리
1944년 스위스 베른에서 태어났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버클리 대학, 하버드 대학, 베를린 자유대학 등 여러 곳에서 연구 활동을 했으며, 마그데부르크 대학 철학사 교수 및 베를린 자유대학 언어철학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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