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읽는 정신분석(개정판)
김서영의 치유하는 영화읽기
내가 보는 영화, 나를 보는 책! 김서영의 치유하는 영화읽기
—“책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이 책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
라캉과 지젝에 대한 연구와 작업을 활발하게 해온 김서영 교수가 2007년 출간한 『영화로 읽는 정신분석』이 은행나무 ‘일상인문학’의 두 번째 책으로 재출간되었다. 출간 이후 7년이라는 시간의 갭을 채우고, 글과 화보를 추가하여 개정한 이 책은, 그동안 영화는 물론이고 라캉이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꾸준히 읽혀 왔다. 단순한 영화비평을 넘어 나를 읽고 남을 읽는 법, 그리하여 담담한 일상을 꾸리며 행복하게 사는 법에 대한 김서영 교수만의 아주 특별한 강의.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시간과 함께 바래는 책이 있을 테지만, 이 책은 시간이 지나도 매번 새로운 의미의 길을 생성해 내며 읽는 이에게 ‘치유-기계’가 된다.
영화와 삶: 잘 놀기와 잘 살기
세상에는 두 종류의 영화가 있다. ‘로즈버드’가 있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 불멸의 고전,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에 등장하는 로즈버드는 영화 전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하나의 모티프를 이른다. 잘 만든 영화는 사건과 인물, 주제가 산만하게 흩어지지 않고 하나의 모티프(=로즈버드)를 잘 따라가는 영화로, 중간에 흐지부지 되지 않고 끝까지 밀고나가서 영화를 보는 이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게 한다.
잃어버린 모든 것을 상징하는 로즈버드는 진정 우리가 영원히 욕망할 수밖에 없는 궁극적 대상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자면 그것은 우리를 욕망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것, 언제나 비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 바로 그 빈 공간 때문에 우리는 욕망하게 되는 것입니다.(본문 319쪽)
‘(화려한) 블록버스터이거나 (지루한) 예술영화이거나’. 보통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화를 분류하는 방식이, 이 책을 읽고 나면 완전히 뒤집힌다. 그것이 아무리 대중오락영화일지라도 그 안에서 풀어내고자 하는 중심이 있고, 그걸 끝까지 잘 풀어낸 영화는 “잘 논” 영화로 우리의 삶에서 참조해야 할 것이 된다. 잘 논 영화는 방향성을 잃지 않고 흩어지지 않은 영화로, 그 방향성이란 것은, 우리가 삶에서 잃지 말아야 할 것이기도 하다. 무엇을 찾고 싶은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나를 기쁘게 하고, 무엇이 나를 충만하게 하는지 영화 속 로즈버드만큼이나 내 삶의 로즈버드를 찾는 일이 중요함을, 「감각의 제국」,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등을 통해 우리는 어렴풋이 깨닫는다.
천덕꾸러기 ‘해리’가 마법세계에 가서 진실로 자신을 알아보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들을 만나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고, 영웅이 되는 것. 이것은 비단 호그와트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여기에서도 가능한 것이다. 내가 나를, 나의 무의식(가능성)과 신화의 존재를 믿기만 한다면 말이다.
치유의 방법: 영화를 보고 나를 보기
영화는 언제나 사람들의 여러 모습들과 수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따라서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맞는 영화 비평을 쓸 수 있다. 꿈을 좇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인 사람, 사랑이 인생의 모든 것인 사람, 가족이 제일인 사람…… 저마다 영화를 읽는 시각이 다르고, 그것이 곧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가 된다.
꿈의 조각을 항상 한 주머니에 넣고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을 보살피는 방법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생활의 어딘가에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이 놓여 있다면 우리는 이로부터 삶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힘든 일은 많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언제나 내 주위에 있습니다. 그것이 나를 보살피는 길입니다.(본문 346쪽)
오래전 영화지만, 「죽어야 사는 여자」의 주인공들이 자신의 몸을 대하는 걸 생각하면 자신을 돌보는 일의 필요성을 새삼 느낄 수 있다. 더 젊어 보이고, 더 아름다워 보이고, 날씬한 외양만이 중요하고, 그 속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면 그 삶은 죽은 것과 같다.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이 말은, 그러나 현대를 사는 우리의 현상태이기도 하다. 내가 무얼 원하는지,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보다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뭘 원하는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훨씬 더 중요한 우리는, 자신을 돌볼 여력이 없다. 눈을 들면 여기저기에 지겹게도 ‘힐링’ ‘치유’가 붙어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나를 보살펴 주지 않는다. 나를 보살피고 치유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어야 하고, 그 치유는 나를 제대로 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 책은 비록 “치유하는 영화 읽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긴 하지만, 너를 치유해 주겠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 이제 변하세요”라고 말하고 “내가 누군지 스스로에게 묻지 마세요. 남에게 묻지 마세요”라고 말하고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책을 읽는 스스로가, 영화를 읽는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읽는 스스로가 그 힘을 찾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상처 입었다면, 고통스럽다면 그 상황을 바꾸는 힘은 자신의 내부에 있음을 저자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해 준다. 너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너의 힘을 믿으라고. 치유는 전문가의 영역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셀프’다.
그리하여 우리는 살아가는 내내 자신을 읽고, 고치고, 변화하는 수밖에 없다. 다만 그러는 과정에 영화와 정신분석은 ‘나’로 향하는 여정에 도움을 주는 조력자인 셈이다. 라캉에게서 ‘실재계’란 인간만이 감지할 수 있는 영역으로, 한 사람이 최선을 다할 때 그 정신세계가 내뿜는 에너지를 뜻한다. 이 보이지 않는 힘이 발산되면 자신과 다른 사람 그리고 세상이 변화한다. 영화를 보거나 글을 쓸 때 우리는 이 ‘실재계’를 인식한다. 이는 곧, 삶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인식한다는 말이다. 사소한 것 하나로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 있다.
내 안의 신화: 부족함과 불완전함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포스가 함께 하기를.”(May the Force be with you)
유행처럼 회자되는 「스타워즈」의 대사, 이 캐치프레이즈와도 같은 말 속의 ‘포스’는 우주의 기운이자 힘이기도 하지만, 곧 ‘내 안의 힘’이기도 하다. 「스타워즈」뿐만 아니라, 「에라곤」, 「해리포터」에서 주인공들에게 스승들이 하는 말—“너 자신을 믿어라.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항상 네 안에 있을 것이다.”—은 곧 포스를 이용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온 마음을 다해 권법을 익힌 주인공들은 이미 스승의 모습으로 변해 있고, 내 안의 목소리를 듣고 나면 이상하게도 변한 것 하나 없이 여전한 상황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 이 책의 저자 김서영이 말하는 포스와 무의식의 힘은 바로 여기서 발현된다. “비로소 멀고도 험난한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느껴진다. 내부의 포스를 느꼈다면 이제부터 무의식은 치유력을 발하기 시작할 것이다.”
무의식이란 내가 의식적으로 깨닫지 못하는 내 일부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다른 말로 바꾸어 가능성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무의식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의식적으로 규정했던 세상이 변하게 된다.(본문 245쪽)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저자는 말한다. “내 안의 신화를 믿어야 한다”고. “그것은 다른 말로 자신을 믿는 것”이라고. 영화에 용이 등장하고, 마법이 등장하고, 웬 신비한 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단순히 현실감 없는 판타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을 보고 보살피는 행위, 그리고 무의식을 인식하고 그것을 가능성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은유다. 무의식을 인식하고 제대로 보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부족함 혹은 불완전함을 긍정하고 삶의 에너지로 전화(轉化)할 수 있을 것이다.
환상은 결코 허상이 아니고, 우리가 현실을 대면하고 그것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공간이다. 자신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이 ‘환상’공간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이 공간 안에서 기쁘고 행복할 때, 나를 이끄는 신화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치유가 시작된다. 힘들고 고통스럽고 이 상처가 아물지 않을 것 같지만, 그 괴로움에도 끝은 있다. “당신만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시간은 우리를 바보로 만듭니다. 감정은 우리를 속입니다. 위기의 순간을 괴롭게 견뎌내고 나면 조금 나아집니다”라고 말하는 이 책은 따라서, ‘영화읽기’라고 쓰고 ‘삶읽기’라고 읽어야 한다.
2014년 서문: 배반을 통한 복귀
들어가는 글
1. 정신분석 이야기 : 치유적인 영화읽기
한 편의 영화가 할 수 있는 일
히스테리와 강박증 : 불완전함을 위하여
상상계를 넘어서 상징계로 : 허상을 넘어서
상징계를 넘어서 실재계로 : 나보다 큰 나
융과 영화 : 신화의 힘
대극의 합일 : 그림자와 하나 되기
치유적인 영화읽기 : ‘나 괜찮니?’
용어 없이 쓰는 정신분석적 영화비평
2. 영화 이야기 : 치유적인 영화비평
김기덕의 「빈집」 : 닫힌 마음의 문을 열며
「피에타」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살인을 추억하는 영화 「살인의 추억」 : 그 치명적 시점화면과 방향성 없는 분노
「취화선」, 그 비극적 신비의 탄생을 위하여
잃어버린 신화를 찾아서
매트릭스론 : 우리들의 천국을 위하여
미하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 : 마음의 감옥을 나서며
지젝의 기묘한 서커스 : 들뢰즈를 통한 프로이트로의 복귀
햄릿과 영화 : 호레시오를 기다리며
장 콕토의 시인 삼부작 : 초현실주의와 정신분석
스타워즈의 구원을 위하여
박쥐 이야기 : 정신분석적 비평 vs 분석심리학적 비평
「데인저러스 메소드」의 치명적 오점 : 사비나 슈필라인을 기억하며
너라고 부를게 : 킨제이 보고서 vs 킨제이
진정한 보편성을 위하여 : 키클롭스의 죄
한 여자와 한 남자를 위한 기도문 : 욕망, 그 치명적 윤리학을 위하여
3. 못다한 이야기 : ‘정신분석과 영화’ 공개강연
프로이트와 융 사이에서의 선택
꽉 찬 영화와 2% 부족한 영화
로즈버드를 찾아서
사랑에 관하여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진실이란 무엇일까?
에둘러가기
난 소중하니까
변화를 위하여
부록 : 치유적인 논문 읽기
애타게 수원댁을 찾아서 : 지젝 다시 읽기
영화 찾아보기
안녕하세요? 저는 정현주라고 합니다. 몇 년 전 이 책을 아주 잘 읽었습니다. 오늘 다시 읽다보니 심각한 오류를 발견했습니다. 320쪽부터 <사랑에 관하여>라는 글이 나오는데요.상상계적 사랑, 싱징계적 사랑, 실재계적 사랑을 설명하고 있어요. 그런데 322쪽을 보면 “상상계적인 사랑은 이와 반대의 특징을 가지기도 합니다.” 라고 해놓고 다시 상상계적인 사랑을 설명하고 있네요. 작가는 322쪽에서 상징계적 사랑을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러니까 상상계적 사랑과 상징계적 사랑이 혼재되어 있다고 보여집니다. 수정판을 내셔야 할 듯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