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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을 출발해 고비를 지나 알타이를 넘어
마침내 ‘나’로 회귀하는 방황과 탐구의 시편들
‘시인’으로 돌아온 윤후명 10년 만의 신작 시집
“시를 놓지 않겠다고 한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작가 윤후명이 10년 만에 신작 시집을 출간했다. 윤후명에게는 두 개의 정체성이 있다. 하나는 1980~90년대 한국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서 ‘소설가 윤후명’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문학적 출발점인 ‘시인 윤후명’이다. 한국 현대 문학사에 확실한 위치를 점한 소설가이지만 윤후명은 시인으로 출발하였고 그 정체성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해왔다.
윤후명은 19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빙하의 새>가 당선되며 문단에 등단하였고 197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산역>이 당선되어 소설가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소설 당선까지 시작에 전념한 그는 1977년 첫 시집 《명궁》 출간으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가져온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터져 나온 고독의 언어들은 낯설었고 두 눈을 부릅뜨고 삶의 한복판에 활시위를 당겨도 대개는 비탄과 쓰라림의 음조였다. 거대담론과 이념에 추수한 ‘민중문학론과 리얼리즘론의 시대’에 개인의 이상과 삶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허무주의 내지는 무위의 감각은 단번에 독자와 평단을 매료시켰다. 그러나 이 시집은 동시에 시인으로 하여금 문학적 갈증을 유발시켰고 소설을 향한 길을 모색하는 계기가 된다. 소설가로 등단 이후 활동 중심을 소설로 옮겼지만 그는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 《쇠물닭의 책》 등 두 권의 시집을 펴냈고, 시 선집 《강릉 별빛》과 시전집 《새는 산과 바다를 이끌고》에 90편의 신작시를 더하여 출간하는 등 꾸준한 시작 활동을 보여주었다.
시와 소설 창작을 병행하는 것은 장르 간의 벽이 완강한 우리 문학 풍토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 윤후명은 두 개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분명하게 정립한 거의 유일한 작가다.
“한국에서는 시인과 소설가를 구분한다. 장르 자체를 가른다. 시인은 시인이고 소설가는 소설가라는 식이다. 외국에는 없는 행태다. 이것은 언젠가 없어져야 할 장벽이라고 본다. 작가는 시를 쓸 수도 있고, 소설도 쓸 수 있다.”_‘작가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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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서 둔황까지, 둔황에서 강릉까지
윤후명 문학 여정의 총정리
윤후명의 소설들을 일컬어 ‘강릉을 출발해 고비를 지나 알타이를 넘어 마침내 다시 ‘나’로 회귀하는 방황과 탐구의 여정‘이라고 했는데 시인은 이번 시들 또한 그러하다고 말한다. “그동안의 ’나‘를 말하며 이 시들은 여기에서 전쟁과 혁명과 사랑을 증명한다. 끔찍이도 아름답고 슬픈 인생이었다.”
지난 2017년 발표한 시전집 《새는 산과 바다를 이끌고》가 윤후명 시력 오십년, 시의 총체였다면 이번 시집은 윤후명 문학 여정의 총정리라고 할만하다. ‘대관령’ 연작시는 ‘어디까지 나를 이끌어간다’며 비로소 끝을 맺고, 시인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고갯길을 넘어 몽골 초원, 고비 사막을 지나 텐샨을 넘는다. 언어는 따뜻해지고 이미지는 이야기가 된다. 시 속에 소설이 들어오고 소설 속에 시가 들어선다. 그리움은 안타깝지만 영혼을 값싸게 흥정하지는 않는다. 시의 씨앗을 찾아서 간직하는 게 시인이며, ‘그래야 세상은 제 길을 잃지 않는다.’
거쳐온 인생이 풍경이 된다/ 자연 속에 서 있는 집 한 채/ 그 안에 나는 형체 없이 서성거린다/ 아, 살아왔구나/ 부끄러운 딱정벌레처럼 웅크리고/ 시를 썼구나/ 그 형체가 내가 맞는다면/ 풍경은 완성될 텐데/ 서성거리는 사람의 그림자는 붙잡을 수 없다/ 한 웅큼/ 내 손안에 쥐여 있는 풀잎을 들고/ 나는 그림자 속에 딱정벌레의 집을 짓는다
_<시를 쓰는 딱정벌레>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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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발걸음은 멈출 수 없다’
총 219편 신작, 시의 향연
이번 시집에는 총 219편의 시가 실렸다. 많은 편수만큼이나 시인은 다양한 시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특히 첫 번째 시집의 시들처럼 일상적인 언어의 규범적, 문법적 질서가 무시되거나 파괴된 시편들은 다시 새로우며 긴장과 집중을 늦추지 않는다. 시적 세계의 본질을 이루는 어떤 태도 또는 관점에서 비롯되는 언어적 고민과 허무의 세계관은 시간이 흘러도 바뀌지 않은 시인의 완강함이다. 그럼에도 시인의 시는 아직 젊다. 환상적인 희망이나 헛된 기대는 가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 방식을 끈질기게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지적 정직성에 도달한 언어들은 우리 삶의 보편적 체험에 대한 생생하고 인상적인 시적 표현을 보여준다. ‘어둠이 살얼음처럼 깔린 모래밭은/ 검푸르게 삶을 휩싼다’(<갯메꽃 피는 바닷가> 중에서) 그리하여 시인은 ‘이 세상이 없을 곳으로 달린다/ 달빛 속에서 나는 세상도 없고 나도 없는/ 그곳으로 지금도 열차를 타고 간다’(<동해남부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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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이어령 등 작가 20명 추모시로 소환
시로 쓴 ‘살롱 드 한국문단’
작가는 등단 반세기를 훌쩍 넘고 생물학적으로도 희수의 나이가 되었다. 시 동인지 <70년대>의 동인이었고, 소설 동인지 <작가>의 동인이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처음으로 도반과 같은 문학 스승과 문우들을 소환한다. 시인 박목월(88쪽), 시인 박남수(89쪽), 시인 김동명(42쪽), 시인 김수영(90쪽), 소설가 이원하(91쪽), 소설가 박영한(92쪽), 시인 박정만(94쪽), 화가 김점선(95쪽), 시인 김형영(96쪽), 화가 김향안(105쪽), 시인 윤동주(106쪽), 시인 강은교(109쪽), 시인 정희성(109쪽), 소설가 황충상(116쪽), 화가 이인(123쪽), 시인 임정남, 소설가 정태언(224쪽), 평론가 황광수(225쪽), 소설가 이미륵(226쪽), 평론가 이어령(254쪽). 우리 문학의 빛나는 이름들로 실로 풍성한 인연이다. 시로 쓴 ‘살롱 드 문단’의 숨은 얘기는 문학사 그 자체이다.
1969년 출판사 삼중당에서 일하면서/ 선생님의 책을 만든 게 처음 만남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저를 신춘문예와 이상문학상에도 올려주었습니다/~중략
-<그러나 그러나, 선생님은 가시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