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작가들의 진솔한 대화가 마음을 건드리는 책─《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편집 후기

‘그림책’.

어떤 울림을 주는 단어인가요? 저에게는 유년시절의 무한한 상상력, 그림책을 읽는 방 안의 안온함, 무엇이든 놀랍고 신기했던 호기심의 순간들이 재생됩니다. 지인 중에 일러스트레이터가 있어서 어른이 어린이를 위해 메시지를 담아 그리고 쓰는 그림책이 어린 시절의 유물만이 아님을 인지는 하지만, 어른인 나와는 사뭇 거리가 있는 것만 같아서 막상 잘 접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런 그림책에, 속절없이 빠져버려서 그 그림책과 관련된 무언가를 하고 싶었던 작가님의 그림책에 대한 사랑이 담뿍 담겨 있는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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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고를 처음 만난 것은 올해 봄이었습니다. 글쓰기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아실 법한 옆 포털 사이트의 브런치북 프로젝트를 통해 은행나무에서 “유럽 그림책 작가의 엄마 창의학교”라는 제목으로 연재되던 매거진을 대상으로 선정하면서 만나게 된 것이었죠.

보통 원고를 만나면 책으로 만들기까지 너댓 번 읽게 됩니다. 맨 처음 보았을 때, 그리고 세 번의 교정(전문용어로 3교), 원고를 좀 수정할 일이 있으면 한 번 더 추가. 이 원고의 경우에는 꼽아보았더니 총 여섯 번을 읽었더라고요. 처음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뽑을 매거진을 선정할 때, 그리고 출간을 위해 개고를 요청드릴 사항 검토하느라 한번, 다녀온 원고를 확인하면서, 그리고 세 번의 교정. 봄에 만나, 여름을 지나, 가을에 한껏 들어섰을 때까지 2016년의 복판을 함께했어요.

저는 인문서, 교양서 담당이라 조금 재미는 없을지언정 ㅎㅎ 시절을 함께하는 원고들에게서 마음을 걸어둘 수 있는 조각들을 찾아내는 순간들에 기대어 일을 하는데, 이 책은 정말이지… 수많은 곳에서 제 마음을 건드려와서 원고를 읽을 때마다 가슴이 벅차올랐던 기억이에요. 처음 읽었을 때엔 저 작가였는데, 그 다음엔 다른 작가가, 같은 작가라도 그 사람의 이 말이 인상적이었는데, 다음엔 또 다른 말이… 그래서 제 마음에 깊이 다가왔던 작가들의 이야기를 몇 가지 소개하려고 해요.

전 스포츠에는 재능이 전혀 없었죠. 그렇다고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지도 못했고요. 시험을 치면 모든 과목에서 20점 만점에 9, 10, 11점이었답니다. 당시 전 그 숫자들이 주는 메시지가 명확하다고 생각했어요. “넌  보잘것없고 시시한 애야”라는 메시지였죠.
(……)
학창 시절에 유일하게 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순간이 그림을 그릴 때였어요. 뭐 하나 잘하는 게 없는 ‘보잘것없고 시시했던 애’가 다르게 보이는 순간이었죠. 남들이 절 주목하니 기분이 좋아서 더 많이 그림을 그렸고, 그러다 보니 더 잘 그리게 되는 선순환이 있었어요. 속으로 다짐했어요. ‘그림에서만큼은 내가 우리 반 대표가 될 거야!’ 다른 친구가 나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걸 견딜 수가 없었어요. 다행히 그런 일은 많이 일어나지 않았고요. 그림을 그릴 때 힘이 세진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타인의 평가가 두려워 꼼짝 못하는 상태에 빠질 수도 있지만, 제 경우 다른 사람이 나를 지켜봐주고 있다는 실감이 저로 하여금 용기를 갖게 해주고, 한계를 넘게 해줬던 것 같아요. 만약 그림과 나, 단둘뿐이었다면 지금처럼 잘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스키 캠프로 유명하여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수준급으로 스키를 타던 마을, 프랑스 브리앙송에서 태어난 작가 벵자맹 쇼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에는 《곰의 노래》 시리즈로 유명하다고 해요.
저는 어른이 되고 그림책을 읽은 적이 없어서 모든 작가들을 이 인터뷰들로 처음 만나보았는데요, 벵자맹 쇼는 제가 이 책을 작업하면서 가장 마음에 남았던 인터뷰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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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자맹 쇼의 《방학 때 뭘 했냐면요》에 사용된 원화.

심지어 책에 함께 곁들일 인터뷰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보게 된 원화들도 완전 제 스타일. 이렇게 빼곡한 그림을 오로지 상상만으로 담아내는 것으로 유명한 경이로운 창작자인데, 인터뷰 동안 벵자맹 쇼는 자신의 유년기를 두고 “뭐 하나 잘하는 게 없는 보잘것없던 아이”, “약점을 감추려고만 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완벽한 누군가가 되고 싶었다”라는 식으로 표현했다는 데서 놀랐어요. 그런 상상력과 창조성을 가진, 자기 분야에서 입지를 갖고 있는 전문가라면 왠지 어린 시절부터 유별나고 남달랐을 것만 같으니까요. 그런데 왠지 인정받고 싶어서 체력장 매달리기까지도 열심히 하고 친구들하고 이야기하는 데 빠지고 싶지 않아서 모르는 것도 아는 척하던(이것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버릇…)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너무 친근하더라고요.

그랬던 벵자맹 쇼는 대학에 가서 미술을 전공하면서, ‘결점과 함께 일한다 (Faire avec les défauts)’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해요.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한계가 어디인지 이해하면서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간다는 의미입니다.
(……)
제가 다른 창작자들 작품에서 감동받는 지점은 기계 같은 완벽성이 아니라 인간적인 빈틈이거든요. 우리가 똑같지 않은 이유도 그 빈틈과 서투름에 있고요. 그걸 소중히 여겨야 해요. 만약 모두가 완벽한 그림을 그리게 된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그림이 전부 완벽하게 지루할 겁니다. 또 자기 작업의 강점과 약점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최선의 인물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도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단체 사진을 찍고 나면 저마다 자신이 제일 못 나왔다고 말할 때가 있잖아요? 스스로에 대해 객관적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결점과 함께 일한다’, faire가 영어의 do에 해당하는 동사이니 일이 아니더라도 무엇이든 결점을 인정하고 그런 대로 일한다는 의미가 되겠죠.

사실 벵자맹 쇼가 어린 시절을 묘사하던 문장들, 뭐 하나 잘하는 게 없는 것 같고 약점 투성이지만 결점을 감추려고 애쓰려는 모습은 지금의 저와 너무나도 닮았거든요… 나이는 계속 먹는데 일도 일이고, 인간관계도 인간관계고, 매사에 여전히 서툰 것만 같아서 갈수록 의기소침해지던 저. 친구들을 질리게 할 정도로 우울하단 말을 입에 달고 사는 2016년의 저에게, 벵자맹 쇼의 이런 말들은 너무나 큰 힘이 되었답니다.

자꾸만 작아지는 것 같은 마음에 다가온 또 다른 메시지가 있어요. 우리나라에는 《나는 기다립니다…》 《어느 날 길에서 작은 선을 주웠어요》로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로서 40년에 달하는 경력을 가진 거장 세르주 블로크는 ‘작은 용기 내기 습관’을 권유하는데요.

전 창의성이 그저 무언가를 할 용기를 의미한다고 생각해요. 단지 그것뿐이에요. 스스로에게 무언가 해보는 것을 허락하는 마음, ‘왜 안 되겠어’ 하는 생각, ‘실패해도 괜찮아. 별거 아냐’라고 말해주는 자세.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는 작가들로부터 창의성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 진행된 인터뷰들로 엮여 있기 때문에 창의성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세르주 블로크의 우선 질러보는 작은 용기는 어른인 우리에게도 참 와닿는 점이 많아요.

저는 뭔가 삶을 꾸며줄 취미를 하나 갖고 싶은데, 지인들 중에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그려 취미로 독립출판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그들이 부럽고 대단해보이면서도 제가 시도할 생각을 못하겠더라고요. 저는 사춘기 시절 만화가나 소설가를 장래희망으로 꼽을 정도로 글쓰기와 만화 그리기 모두에 심취했었는데, 그 체험을 조금만 더 벼리면 저도 못할 건 아닌데 왠지 모르게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이유는 ‘못할까 봐’.

남들보다 못하고, 제가 보기에도 후져보일 것 같아서. 그래도 일 때문에 어찌저찌 하게 되는 글쓰기도, 상당한 고역이에요. 책을 언론사에 소개하는 보도자료는 물론이고 이런 블로그 글을 쓸 때도, 문장을 만들어내려고 단어를 써놓고 그 문장이 흡족하지 못하게 완결될 것 같아서 한참을 못 나가는 적도 많아요. 그림 그리기도, 학창시절에 늘 연습장을 끼고 살았는데, 이 또한 언제부턴가 펜으로 글씨가 아닌 것을 끼적이는 건 완전히 낯선 일이 되어버렸어요.

세르주 블로크는 A4 용지에 펜이나 색연필로 슥삭, 빠르게, 가장 마음에 드는 선을 찾을 때까지 계속 그린다고 한다.

세르주 블로크는 A4 용지에 펜이나 색연필로 슥삭, 빠르게, 가장 마음에 드는 선을 찾을 때까지 계속 그린다고 한다.

그치만 세르주 블로크의 ‘작은 용기’ 덕분에, (사실 친구들도 잘 모르는 일이긴 한데) 저는 그림을 다시 그려보려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답니다 ㅎㅎ 이 원고를 두 번째 읽으며 작가님께 가필을 요청드리고 제 손에 돌아와 첫 번째 교정을 본, 지난여름 두 달 정도, 드로잉을 잠깐 배웠었어요. 어렸을 때 수업 시간에도 몰래몰래 연습장을 꺼내 그림을 그릴 정도로 좋아하던 일인데 혹시? 싶어서요.

물론 오랜만에 그리는 그림을 저는 정말 못 그렸고… ^^……. 나의 절망적인 능력을 새하얀 도화지 위에서 적나라하게 확인하게 되는 것만 같아 매 시간 정말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이었는데요.

지금도 매일매일이 두려워요!
정말로요. 새로운 프로젝트에 들어갈 때마다 ‘아, 이거 못할 것 같은데?’ 하는 불안함에 시달린다고요. 프로젝트를 마치고 나면 그림이 너무 후진 것 같아서 아틀리에 옆에 있는 운하에 몸을 던지고 싶을 때도 많고요. 타고난 재능이 없는 저에겐 모든 작업이 승리랍니다. 속이 울렁거려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얻은 작은 승리죠.

이렇게 계속 세르주 블로크의 응원을 받으면서 어떻게든 꾸역꾸역 다니다 보니 그럴싸한 그림 하나를 완성하게는 되더라고요. 취미로 삼는  데는 실패했지만…. 어렸을 때 좋아하던 일이라 기대가 컸는데 좀 아쉬웠어요. 남들은 생계를 위한 일과 별개로 뭔가 생산적인 활동을 하면서 생활을 꾸며가는데 나는 너무 막연하게 살아온 건 아닌가 싶고요.

그러던 때에 이치카와 사토미의 인터뷰가 딱 와닿았습니다. 이치카와 사토미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일본 출신의 작가인데, 스무 살 때 프랑스어도 모른 채 무작정 프랑스에 도착하여 보모 일을 하면서 살다가, 이전에 그려본 적 없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동화책 작가가 된 인물이에요. 보통 스무 살이면 대학교에 진학하거나 취직을 하여 어른으로서 삶을 꾸려가야 한다고들 하는데, 어린 시절의 토대를 완전히 허물고 새로운 공간에서 살아가며 전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시작했다니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싶은 차인데요,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어릴 때부터 정확히 알고 확신을 갖는 게 가능한가요? 어릴 땐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잘 몰라요. 생각하고 탐험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죠. 때때로 이것저것 해봤는데 ‘다 아니다’ 싶을 수도 있어요.

사실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게 당연한 건데 아무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는 거죠. 무언가를 해볼 시간, 실패할 시간, 마음껏 헛짓해볼 수 있는 여유는 아무도 말하지 않으니까요.

이치카와 사토미의 말들은 무엇보다 유럽 국가들에 비해 우리나라와 사회적인 삶의 궤적이 너무나도 비슷한 일본 사회와 비교하면서 이야기하는 만큼 와닿는 점이 많더라고요. 초중고등학교를 나와, 대학교를 가거나 취업을 하여, 20대 중후반에는 안정적인 직장을 잡고, 20대 후반, 늦어도 30대에는 결혼을 해 가정을 꾸려 자식을 낳고… 우리나라건 일본이건 정말 획일화된 타임라인인데, 왠지 여기에서 누락되면 안 될 것 같아서 모두가 조마조마하지요.

이치카와 사토미는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찾는 데,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데 시간을 충분히 들이라고 말합니다. 이치카와 사토미가 말하는 것뿐 아니라 다른 데에도 그 조언은 유효합니다. 저는 아직 결혼을 할지 말지, 한다면 자식을 낳을지 안 낳을지도 여즉 못 정하고 있는걸요. 물론 취미도 마찬가지고요. 아직 시간을 갖는 중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생산적인 취미도 없고, 여전히 못하는 것투성이인 저이지만 그래도 오랜 기간동안 작가들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참 많은 위로를 받았어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 갈피를 잡지 못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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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마르뜨에 자리한 아틀리에에서 만난 이치카와 사토미.

저는 육아 경험이 없는 미혼이라 이런 것들이 마음에 와 닿았지만, 생애발달과정(ㅎㅎ)에서 다른 장소에 계신 분들께는 또 다른 작가들의 말이, 혹은 다른 메시지가 마음을 울리실 거예요.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아픔이 있으신 분들은 프랑스 국민 작가 클로드 퐁티에게서 위로를 찾으실 수 있을 것이고,

사실 이 책의 가장 주된 타겟인 앞으로 자식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걱정하시는 젊은 부모님들께서는, 완벽한 부모는 없다는 클로드 퐁티, 아이들에게 굳이 무엇을 해주지 않되 대화만은 잊지 말라는 에르베 튈레, 부모들이 좋아하는 것을 공유해준 것을 자산으로 삼고 있는 조엘 졸리베와 안 에르보의 이야기가 눈에 확 들어오실 거예요. 자신들의 유년시절에 관한 고백도 있거니와, 본인들의 육아 경험에서 체득한 이야기들도 진솔하게 보여주고 있거든요.

유럽의 내로라하는 그림책 작가들의 아틀리에를 찾아 우리 안의 어린이와 어린이의 성장을 도와야 할 우리를 위한 많은 영감을 담아온 책, 아틀리에를 생생히 보여주는 아름다운 사진들이 곁들여진 인터뷰들을 통해 저처럼 많은 위안과 응원을 받으시길 바라요.

지음 최혜진 | 사진 신창용
분류 비소설 | 출간일 2016년 10월 20일
사양 변형판 175x152 · 312쪽 | 가격 17,000원 | ISBN 9788956605944
최혜진
잡지사 제이콘텐트리m&b에서 10년간 피처에디터로 일했다. 크고 작은 인터뷰로 각기 다른 결을 지닌 천여 명의 사람을 만나 수만 개의 질문을 던졌다. 10년차가 되던 해에 프랑스로 날아가 3년 동안 살며 유럽 그림책의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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