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색조의 섬
절대고독의 섬에서 갈망하는 원형으로의 회귀
투명하게 깊어져 발하는 윤후명 소설의 빛깔
2021년 제62회 3·1문화상 예술상을 수상한 소설가 윤후명 소설전집 다섯 번째 권 《팔색조의 섬》. 2016년에 출간된 윤후명 소설전집 제5권 《섬, 사랑의 방법》의 개정판으로, 지심도를 배경으로 쓴 <팔색조의 섬>을 비롯해 이른바 ‘섬’ 연작이 수록되어 있다. 윤후명 소설의 1인칭 화자는 군중과 외떨어진 존재로서 절대고독의 섬을 닮아 있다. 시간이 유예되고 추억마저 허락되지 않는 곳에서 그는 인간의 아픔, 신비한 열정, 고독과 소외를 잔잔히 드러낸다. 한편, 작가는 이번 전집에서 기존에 실렸던 단편들을 전체적으로 손보고 제목도 교체했을 뿐만 아니라 단편 <북회귀선을 넘어서>와 중편 <섬, 사랑의 방법>을 엮어 두 편의 연작소설(<향기의 이름> <초원의 이름>)로 확대, 개작했다.
섬에 갈 때마다 그곳에 살고 있는 나를 만난다. 여러 섬들에 내가 살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홀로’ 있으려 하기 때문에 남들은 그를 모른다. 그러므로 그는 ‘나’로서 또 다른 나를 만난다. 다분히 현학적인 이런 말을 구차스럽게 해야 하는 내가 가엾다. 나는 섬에 사는 나를 진정 만날 수 없는가. 이 소설도 구차스러워서 나는 어디론가 떠나지 않을 수 없다. 이 소설이 떠남을 말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이다. _‘작가의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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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멸을 거듭하는 영겁회귀의 탐구적 여정
시와 소설의 경계를 탈주하는 윤후명 문학의 총체
《윤후명 소설전집》 3차분 여섯 권 출간하며 전 12권 완간
4년 동안 ‘하나의 서사’를 위한 개별 단편의 통합과 개작에 심혈을 기울여…
한국문학의 독보적 스타일리스트 윤후명의 중․단편, 장편소설을 총망라한 《윤후명 소설전집》이 전 12권으로 완간되었다. 올해 등단 54주년을 맞이한 윤후명 작가는 그동안 수많은 명작들을 통해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하는 한편 녹원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소설문학작품상, 한국일보문학상, 김동리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김준성문학상, 고양행주문학상, 만해님시인상(작품상), 연문인상, 3・1문화상 예술상 등 많은 문학상을 수상하며 명실 공히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자리매김해왔다. 아울러 시와 소설의 경계를 탈주하는 언어의 아름다움을 웅숭깊게 형상화하며 우리 문학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윤후명 소설전집》에는 작가의 반세기 문학 여정, 다시 말해 소설과 ‘대적’하며 소설을 ‘살아온’ 한 작가의 전 생애가 집적돼 있다. 작가는 기존의 작품 목록을 발표순으로 정리하는 차원을 벗어나, 자신의 모던한 문학관을 반영하여 새롭고도 방대한 분량의 ‘하나의 소설’을 완성할 수 있길 바랐다. 각각 다른 시기에 발표했던 소설과 소설이 한 작품으로 거듭나고 각 권에서 보이는 주인공의 여정이 유기적으로 서로 이어짐으로써 ‘길 위에 선 자’로 대표되는 ‘하나’의 서사를 그려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의 소설 문법이 서사 위주의 전통적 방식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윤후명의 소설은 그간 소설의 관습으로 인정되어왔던 핍진성의 긴박한 요구와 일정 부분 거리를 두고 있다. 그는 어느 때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서사성의 원칙에 개의치 않고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어 그 이야기를 향해 달려간다. 그리하여 그렇게 제시된 또 다른 이야기의 끝에서 다른 이야기의 지류를 파생시키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1인칭 서술자에 의해 끊임없이 해석되는 삶의 삽화들은 원래 한 몸이었다는 듯 스스로 작품의 경계를 허물고 다른 차원의 성찰을 이끌어내며 자연스레 얽혀든다.
이번 전집 완간을 위해 윤후명 작가는 수록작 전체를 새롭게 교정, 보완하는 한편, 몇몇 작품들을 과감히 통합하고 개작하면서 ‘길 위에 선 자의 기록’이라는 자신의 오랜 문학적 주제를 구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오래전 출판사의 요구로 삭제하거나 넣어야 했던 부분들을 과감히 손보았다. 기존 단행본에 함께 묶여 있던 작품들 대부분이 자리를 바꿔 앉았다. 제목을 바꾸고 서너 개의 단편을 새로운 중편소설로 묶어냈다. 중․단․장편의 구분은 서사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소설에선 큰 의미가 없었다. 각 권 끝에는 새롭게 쓴 작가의 말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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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위에 선 자의 기록, 《윤후명 소설전집》을 펴내며
윤후명의 소설은 오래전부터 수수께끼였다. 윤후명의 소설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언어적 수도사의 고통스런 몸짓을 표정한다. 그는 종래의 이야기꾼으로서가 아니라 함께 상상하고 질문하는 존재로서 새로운 작가적 태도를 취한다. 얼핏 사소해 보이고 무심하고 적막한 삶이지만 그 속에서 불확실한 실재, 적막과 고독, 길을 헤매는 자들의 미혹과 방황의 의미를 발견해 잔잔히 드러낸다. 이러한 그의 문학적 성과를 기려 출간되는 《윤후명 소설전집》은 길 위에 선 자의 기록이자 심미안을 가진 작가의 초상화이다. 강릉을 출발해 고비를 지나 알타이를 넘어 마침내 다시 ‘나’로 회귀하는 방황과 탐구의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