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의 진경(珍景), 절정에 이른 『동천』
동천
‘서정주를 통하지 않고는 시에 이를 수 없다’
한국 시의 진경(珍景), 절정에 이른 『동천』
시인들의 시 창작의 귀감이 되다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은 눈썹을/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동천」 전문
‘서정주를 통하지 않고는 시에 이를 수 없다’는 우리 시단의 통설을 낳게 한 시, 뭇 시인들이 자신의 시를 경계하고 가다듬을 때 가장 많이 참고하는 시 「동천」이 수록된 다섯 번째 시집 『동천』이 새롭게 단장해 (주)은행나무출판사에서 출간됐다. 1968년 민중서관판을 저본으로 삼되 체제 및 표기는 『미당 서정주 전집』 (은행나무, 2015)을 따랐다.
「동천」은 다섯 행의 짧은 시임에도 불구하고, 시어 하나하나의 정밀한 선택과 절차탁마, 행마다 자연스러운 4음보 율격의 변주로써, 온 우주를 망라한다. 시인 정호승은 “나는 『동천』을 읽고 또 읽으면서 서정주 시인을 결정적으로 새롭게 만나게 되었다. 우리 시에 있어서 전통적 정서와 가락을 내 나름대로 이해하게 된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동천」 외에도 그리움을 우주의 이치로 순하게 끌어올린 「내가 돌이 되면」, 시인의 고향인 전북 고창 선운사 입구에 시비로 서 있는 「선운사 동구」 등 걸작 시들이 실려 있다.
시인은 “1961년 제4시집 『신라초』를 낸 뒤 여태까지 발표해 온 것 중 50편을 골라 모아 『동천』이란 이름을 붙여 보았다. (…) 『신라초』에서 시도하던 것들이 어느 만큼의 진경(進境)을 얻은 것인지, 하여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의 최선은 다해 온 셈이다. 특히 불교에서 배운 특수한 은유법의 매력에 크게 힘입었음을 여기 고백하여 대성(大聖) 석가모니께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다”라고 이 시집의 의의를 밝혀놓았다.
이렇듯 『동천』의 시 세계는 『신라초』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으며, 겨레의 삶 속에 녹아 있는 마음과 정서와 지혜를 노래하는 절창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 책속에서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은 눈썹을/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동천」 전문
섭섭하게,/그러나/아조 섭섭치는 말고/좀 섭섭한 듯만 하게,//이별이게,/그러나/아주 영 이별은 말고/어디 내생에서라도/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연꽃/만나러 가는/바람 아니라/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엊그제/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한두 철 전/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전문
선운사 골째기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디다. ―「선운사 동구」 전문
내가/돌이 되면//돌은/연꽃이 되고//연꽃은/호수가 되고//내가/호수가 되면//호수는/연꽃이 되고//연꽃은/돌이 되고. ―「내가 돌이 되면」 전문
시인의 말
[동천]
동천冬天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피는 꽃
님은 주무시고
모란꽃 피는 오후
내 영원은
내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은
추석
눈 오시는 날
마른 여울목
무無의 의미
동지冬至의 시
저무는 황혼
[고대적 시간]
선운사 동구
삼경三更
재채기
우리 님의 손톱의 분홍 속에는
여자의 손톱의 분홍 속에서는
비인 금가락지 구멍
수로부인의 얼굴
영산홍
봄볕
고요
무제(매가 꿩의 일로서…)
내가 돌이 되면
외할머니네 마당에 올라온 해일
어느 날 밤
한양호일漢陽好日
산골 속 햇볕
전주우거全州隅居
중이 먹는 풋대추
마흔다섯 실한 머슴
가벼히
연꽃 위의 방
고대적 시간
[여행가]
여행가旅行歌
봄치위
내가 또 유랑해 가게 하는 것은
칡꽃 위에 버꾸기 울 때
일요일이 오거든
무제(몸살이다…)
석류꽃
어느 가을날
산수유 꽃나무에 말한 비밀
경주소견慶州所見
강릉의 봄 햇볕
무제(피여. 피여…)
나는 잠도 깨여 자도다
나그네의 꽃다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