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불안에서 희망으로 선회하는 요시다 슈이치 문학의 원류
파크 라이프
127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존재의 불안에서 희망으로 선회하는
요시다 슈이치 문학의 원류
《퍼레이드》 《사랑에 난폭》 《악인》을 비롯해 최근작 《분노》까지 발표하는 작품마다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는 일본 현대문학의 대표작가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집 《파크 라이프》 개정판이 은행나무에서 출간되었다. 《파크 라이프》는 대중성과 작품성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섬세한 문체로 동시대의 감수성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요시다 슈이치 작품 세계의 시작점이다. 작가를 국내에 최초로 알린 작품으로, 제127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파크 라이프〉와 〈플라워스〉 두 편의 중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현대’라는 시간과 ‘도시’라는 공간 속에서 아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청춘의 자화상을 현실감 있게 그려내며, 인간 존재의 근원적 고독과 지금 이 시대 전체를 관통하는 불안감을 묘사한 두 편의 소설에서 요시다 슈이치 문학의 원류를 찾아볼 수 있다.
표제작 〈파크 라이프〉의 주인공 ‘나’는 도쿄에서 일하는 회사원으로 늘 히비야 공원의 벤치에서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고, 근처 쇼핑몰 미팅에 참석하는 반복적인 하루 일과를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히비야 공원을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한 여자와 우연히 마주치고 짧은 대화를 나누는데, 이를 계기로 둘은 매일 점심 무렵 공원에서 만남을 지속하며 친밀해진다. 수록된 또 하나의 작품 〈플라워스〉 역시 히비야 공원 근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 ‘이시다’는 배송회사에 취직해 ‘간단’의 조수로 일하는데, 간단이 저지르는 비도덕적인 행동들을 속속들이 마주하며 내면의 갈등을 겪는다. 두 작품은 모두 도쿄로 상징되는 대도시의 삭막함과 공허한 인간관계를 말하면서도 동시에 일말의 희망을 내보이며 열린 결말을 제시한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사이,
도시 생활을 위한 적당한 거리두기
유라쿠초 마리온 빌딩을 생일 케이크의 데커레이션에 비유해 상공에서 예리한 칼로 한가운데를 가른다면, 스펀지 부분에는 지하철역과 통로들이 흡사 개미집처럼 얽히고설켜 있을 게 틀림없다. 지상의 데커레이션이 제아무리 화려해도 속이 숭숭 빈 케이크 따위는 그리 달갑지 않은 법이다. _본문 중에서
〈파크 라이프〉에서 묘사하는 도시와 현대인은 닮아 있다. 눈에 보이는 도시의 외관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빌딩들로 화려하지만, 정작 땅속은 온갖 통로들로 텅 비어 있다. 잘라보기 전까지는 속을 알 수 없는 케이크처럼 도시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겉모습으로 상대가 누구인지 구별할 수 있을 뿐, 내면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타인의 진짜 내면을 알기 위해서는 서로의 진심이 통하는 가까운 사이가 되어야 하지만 무한경쟁시대에 도태되지 않기 위해 저마다 일정량의 성과와 성장이 필수적인 사회에서, 도시의 낯선 이웃과 친숙해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타인과 적당한 거리를 두며 생활한다.
〈파크 라이프〉의 주인공 ‘나’ 역시 지하철 안에서 우연히 마주친 여자에게 호감을 느끼고 매일 그녀와 함께하는 점심시간을 즐거워하지만 그뿐, 둘의 사이에 더 이상의 진전은 없다. 이름도 직업도 사는 곳도 모르는 두 사람은 그저 추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따라서 어떠한 사건이나 갈등도 발생하지 않는다. 도시에서 생활하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이 정도의 적당한 거리감이 매우 친숙하고, 얼핏 보기에 정상적으로 보이며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느껴진다.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 일으킨
일상 속 숨은 비일상의 고요한 파문
타인과의 적당한 거리감이 무너졌을 때 비로소 갈등은 시작된다. 〈플라워스〉는 〈파크 라이프〉 주제의식의 연장선에서 〈파크 라이프〉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이 지점을 다루고 있다. 이시다의 회사 선배 간단은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친한 동료의 부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아무에게나 험담을 일삼고, 어려운 일은 요리조리 빠져나가는데, 이시다는 간단의 모든 행동들을 목격한다. 이시다는 간단과의 적절한 거리두기에 실패하고 그의 내면을 엿본 것이다. 둘 사이에는 미세한 균열이 생겨난다.
“아니야, 틀림없이 내 말이 맞아. 그렇지만 보통 이중인격이라고 하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겉과 속이 다른 걸 의미하잖아. 좋은 사람과 좋은 사람으로 묶인 이중인격이란 게 있을까? 겉도 속도 다 좋은 사람.” _본문 중에서
이시다의 아내 ‘마리코’는 겉도 속도 다 좋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간단의 추악한 본성은 점차 명확하게 드러난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시다와 간단 사이의 균열은 커지고 실제로 갈등은 한순간에 폭발한다. 이 갈등은 원만한 관계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긍정적인 갈등이 아니라 ‘나는 네가 싫다’는 아주 단순한 의미에서의 갈등에 불과하다. 결국 갈등은 봉합되지만 봉합의 결과는 서먹서먹한 사이, 즉 적당한 거리를 두는 삶으로 나타난다.
“공원을 지나가는 싱그러운 바람처럼 마음을 두드리는 소설”
자극적이지 않은 담담한 일상의 기록이 주는 충격은 의외로 강력하다. 《파크 라이프》에 수록된 길지 않은 두 편의 소설을 읽으며 독자는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얻을 것이다.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나의 본성은 어떠한가, 영원히 우리는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인가, 현대 특유의 존재의 불안감은 극복할 수 없는 것인가. 작가는 마지막 부분에서 이 같은 물음의 해답이 될 수도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파크 라이프〉에서 내내 서로의 주변을 맴돌던 두 사람은 “좋아. ……나, 결정했어”라는 말과 함께 오늘과는 다른 내일을 결심하며 희망찬 작별을 고하고, 〈플라워스〉에서 한차례 충돌 끝에 떠나버린 간단에게서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음을 암시하는 연하장이 도착한다. 그래서 이 소설집은, 항상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지만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독특한 이야기며, 시작되지 않았으므로 결국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는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살아 움직이는 도시와 현대인의 오늘이다.
■ 본문 중에서
공원 벤치에서 오랜 시간 멍하니 있다 보니, 풍경이란 실은 의식적으로만 볼 수 있는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파문이 번지는 연못, 이끼 낀 돌담, 나무, 꽃, 비행기구름, 그런 모든 것들이 시야에 들어오는 상태는 실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이고 뭔가 한 가지, 예를 들면 연못에 떠 있는 물새를 본다고 의식함으로써 비로소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진 물새가 물새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_29~30쪽
“예를 들어 미즈호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잖아. 그러면 뭐랄까, 신경을 써준다고 할까, 늘 같이 있으면 집사람이 숨 막혀 할지도 몰라서 난 침실에서 책을 읽지. 그러다 미즈호가 침실로 들어오면 불 때문에 잠을 못 잘 것 같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거실로 나가고. 같이 있고 싶지 않은 게 아니야. 같이 있고 싶으니까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 다니는 거지.” _42~43쪽
“감춘 건 하나도 없어.”라며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렇지만 왠지 뭔가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이라도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딱히 나쁜 의미는 아니에요. 멋있어 보였으니까.”
“감춘 건 아무것도 없다니까 그러네. 오히려 자기에게 감출 게 없다는 걸 필사적으로 숨기려는 거 아닐까.” _50~51쪽
“나도 비슷해. 주말 정도는 몸을 충분히 쉬어줘야지.”라며 웃었는데, 내 경우는 몸을 쉬어준다기보다 말을 쉬어준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함께 있고 싶어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 다닌다는 가즈히로 씨는 아니지만, 주위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해 주말 정도는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누구와도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_88쪽
■ 옮긴이의 말
이 두 소설은 때로는 냉정하고 우아한, 때로는 열정적이고 추레한 인간과 그들의 삶의 양상을 다각적인 시각으로 조망하고자 하는 작가의 꾸준한 문제의식과 의도가 잘 드러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은 이따금 자기 자신의 내면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존재다. 따라서 이 작품은 대상을 통한 자기 점검이 늘 필요한 우리에게 자기를 낯설게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리라 믿는다._이영미
■ 아쿠타가와상 심사평
요즘은 〈파크라이프〉처럼 구석구석까지 소설의 풍미가 담긴 작품을 만나기가 어려워졌다. 본래 소설이란 모두 그러해야 하는데도. _미우라 데쓰로
〈파크라이프〉의 완성도는 더없이 높다. 인간이 살아서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 물음이 대단히 편안하면서도 깊게 전해진다. _고노 다에코
‘무언가가 항상 시작되고 있지만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는 현대인의 존재의 불안감과, 뒤틀린 유머는 미미한 희망 같은 것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_무라카미 류
무리가 없다. 의도적으로 힘을 가하거나 주장하거나 다듬은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인간을 보는 눈이 곳곳에서 날카롭게 빛나고, 다만 문장으로 은근슬쩍 결정적인 임팩트를 준다. _다카키 노부코
파크 라이프 … 7
플라워스 … 115
옮긴이의 말 … 205